2018년 11월 7일 수요일

[범용기 제6권] (1614) 생활한다는 것

[범용기 제6권] (1614) 생활한다는 것[마태 6:24-34]

“인간”이라면 하나 하나의 ‘개인’을 말함인데, 그것은 아무와도 바꿀 수 없고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주격’(Subject)입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목숨”이라고 했습니다.

이 개체인간은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윤리적, 영적인 주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성’을 여러 가지 단계로 구분합니다만, 그것이 구분되기는 해도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한 ‘몸’입니다. 그리고 한 삶입니다. 인간이 사는 때, 살아서 ‘인간’ 노릇을 하려 할 때에 이런 여러 가지 분야가 유기적으로 협동합니다.

예수 당시의 인간들도 이런 인간들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날마다 걱정이 태산같은 인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가난에 쪼들려서 오그라들고 정치적으로 눌려서 납작해지고 사회적으로 멸시받아 천덕꾸러기 된 “인간군상”이었습니다.

예수가 떡 다섯 덩어리로 3천명을 먹였다는 소문도 들었기에 그런 잔치에 빠질소냐고 기쓰고 모여들었을지 모릅니다.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보고, 벙어리가 말하고, 사귀들린 사람이 멀쩡해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니 그런 놀라운 권능이 또 어디 있겠나 싶어, “기적”을 구경하려는 호기심에 덩달아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더러는 무언가 세상 끝날이 가까웠나보다 하는 역사의 위기감에서 ‘구원’을 확보하려고 나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나라, 조국을 회복한다는 애국애족의 정열에서 저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약속의 ‘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따라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종교적 진리를 들으려는 지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작정으로 나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리적, 생리적, 심리적, 윤리적,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등등의 인간 욕구의 뒤섞인 소용돌이 속에 예수는 포위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간단명료하게 그 출구를 보여주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보전하는 생리적인 삶, 기쁘고 슬프고 가슴 아프고 즐겁고 하는 등 심리적인 삶, 옳고 그르고 착하고 악하고 하는 윤리적인 삶, 외롭고 공정하에 합하여 사는 사회와 민족의 삶,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며 하느님 나라 역군이 되는 영적인 삶 등등을 예수는 모두 한 ‘몸’으로서의 인간의 삶에 종합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인간들에게는 이 모든 삶의 분야가 가치질서에 혼돈을 일으켜 ‘혼돈무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려고 몸부림치면서 사실은 죽어가고, 흥하려고 싸우면서 사실은 망하고, 선인이 되려고 애쓰면서 사실은 ‘죄인’이 되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사실은 부정부패의 시궁창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삶의 소용돌이에 한 출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아주 간단한 질서를 세웠습니다. 먼저 할 것과 다음에 할 것이 있으니 그 순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공자님도 물건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처음 할 것과 마감에 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고도 했답니다.

근본을 근본으로 세우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세우면 나무를 거꾸로 심은 것과 같아서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요새는 ‘방법’이 ‘원리’를 짓밟고 넘어가는 사건이 속출합니다. “어쨌든 먹고 보자!” 식입니다. 미국의 Watergate 사건도 그 한 예증이 되겠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의 구데타 사건들도 같은 종류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입니다. 독재자는 그것을 거꾸로 심습니다. 나무가 마릅니다.

심은 자도 나무와 함께 마릅니다. 나라도 마릅니다.

독과점 재벌들을 “마몬”과 “하느님”을 뒤바꿔 세웁니다. ‘돈’이 하느님입니다. 그것도 가치도착입니다. 다국적 기업체 자신도 거꾸로 서 가지고서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예수는 벌써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농경시대요 자본주의 시대라기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만, 예수는 현대자본주의자들을 앞에 놓고 경고하는 것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몬(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 한편을 사랑하고 한편을 미워하거나 한편을 중히 여기고 다른 한편을 경히 여기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마태 6:24) 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거기에 제일차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내일’을 걱정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어리석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들에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했습니다. 너희도 하루하루의 노고에서 삶의 의미와 희열을 찾으라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자본축적에 촛점을 맞추는 데 있다고 합니다.

보험에 들고 복지세금을 내고 소비자 보고기구를 만들고 하여 다음에 올지 모르는 불행에 대비하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을 대신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이웃 관심을 말라붙게 해서는 안됩니다.

‘부자’가 곡간에 쌓아 놓은 곡식이 너무 많아서 곡간을 확장하면서 이제는 몇 해를 두고 먹고 마시고 맘껏 연락해도 걱정할 것 없겠으니 오래오래 잘 살아 보자! 했답니다.

예수님 말씀은 – 어리석은 부자여, 오늘 저녁에라도 하느님이 네 영혼을 걷어가시면, 그 많은 재산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너희는 ‘먼저 ’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밖에 모든 없어서 안될 것은 하느님이 더하여 주시리라.”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부자”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정의를 먼저 구한 것이 아니라, 곡간에 곡식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재산이 자기 하느님이었고 자기는 자기 재산의 신자였습니다.

이 “부자”가 무던히 어리석었다고 우리는 가볍게 비웃어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우리 모두가 이 ‘어리석은’ 부자의 반열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무슨 부잔가?” 하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가난뱅이 부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 밑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면서 진수성찬을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놓은 부자의 잔치상을 쳐다보며 그 주인공을 하느님 만큼이나 높이 숭배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 이민사회를 방문해 보면, 눈물겨운 일이 많습니다. 빈손으로 이국 땅에 옮겨 와서 남의 집 지하실에서 헌 침대 하나 얻어 놓고, 품팔이 노임 몇 푼 받으며 뼈빠지게 노동합니다. 그래서 얼마 수입이 나아지면 남의 낡은 집 이층이나 지붕 밑 방에 옮깁니다 거기서 좀 신세가 펴지면 “아파트”로 옮깁니다. 거기서 또 몇 해를 악착같이 벌어서 입주금이나 모아지면 집을 삽니다.

그 동안의 일편단심은 눈물겨운 삶의 노작입니다.

그럭저럭 아이들이 다 자라서 시집가고 장가들고 제각기 살림 차려 딴 데로 흩어지면 두 늙은이만 남습니다.

“펜션”을 받아가지고 “양로원” 같은 기관에 들어가 기운 없이 흥도 없이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에 이 세상 마감 순간이 찾아옵니다. 모든 것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온전한 포기상태에서 Nothingness에 잠깁니다.

인생의 젊음, 정렬, 향락, 쌕스, 획득욕 – 그 모든 광분 속에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80을 살았다! So What? 살았으면 어쨌단 말이냐? 늙음과 함께 늙고, 죽음과 함께 죽는 기록이 무슨 기록이냐 하고 탄식만 나오는 순간이 오고야 맙니다.

이 시간에 진정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진정 “먼저 구할 것을 구해왔느냐?” 하는 하느님 말씀일 것입니다.

Nothingness에서 혼돈에, 혼돈에서 질서에, 질서에서 창조에로 전개하는 영원한 하늘생명의 일러줌일 것입니다.

더도 말고 창세기 일장만 읽어봐도 하느님의 경륜을 분명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가난하다고 재산 축적을 먼저 구하면 해결될 것 같지만 해놓고 보면 해결보다도 걱정이 더 많습니다. “저” 산 밑에 행복이 있다 하여 가 보면 행복은 거기에 없습니다.

탐욕의 돼지가 진주를 짓밟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이익금을 절약하고 저축하고 그것을 재투자하고, 그 확장된 기업체에서 또 더 큰 수익을 거두고 – 그리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 제일차적인 충성을 다하면 되리라 싶어 동전ㆍ은전 등 주조화(鑄造貨)에 “We turst in God”을 박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G자 다음에 L자가 끼어들었다고 합니다.

미국인 생활에서의 일반적 분위기는 확실히 God가 빠지고 Gold가 대신 보좌에 앉았습니다.

“National interest”, “Power Politics” 이외에 무엇이 또 있습니까? 무엇이 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따라가 보면 그것은 200년 전에 잠깐 빛났다가 사라진 신기루(Mirage)였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라일을 하노라고 합니다. 국가를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특히 최근의 한국에 있어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악이 얼마나 거대하게 악마적인가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가 있다면, 또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받기 위해 있는 것이요 그 반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그 비슷한 나라들에서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국민을 전리품 같이 다룹니다.

독재자 한 사람의 국가요 헌법입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그 한 사람”에게도 사망과 저주를 가져올 ‘국가’입니다.

“절대권력”에서 출세하는 “절대악”은 전 국민에게서 인간됨을 약탈합니다. 그리고 부패부정을 먹이고 자기도 먹고 합니다.

우리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라와 국민은 한 몸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라는 토양 속에 Demonish Power를 심어 키워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 속에 누룩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탐욕 중심의 “나라격”이 “정의를 위한 나라”로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 그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브라질의 대주교 “까마라”가 캐나다에 초청되어 강연하면서 “나라의 문제는 정의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만, 그것은 억년 묵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어디서 얼마를 살든지 “한국이나, 캐나다나, 미국이나, 브라질이나, 소련이나, 동ㆍ서독이나 간에 정의와 자유와 질서가 구현된 나라,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먼저’ 그것을 추구해야 하겠단 마립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영광인데 가치와 긍지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에 “그의 한 일이 그를 따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한 일이 우리의 이름 위에 ‘명패’처럼 붙어서 최후 심판대 앞에 세워질 것입니다. 특히 기독가의 삶이란 엄숙한 의무이며 동시에 특권입니다.

바르게 살면 잘 살게도 됩니다. 그 잘 산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잘 사는 것이기에 그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존합니다.

우리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에서는 이 삶을 목표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것은 은혜 베푸는 것이 아니며, 예법이고 본직에의 충성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책에 기록될 것으로 믿습니다.

1975년 2월 9일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에서
교회지 “선구자”에 게재되었습니다만,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다시 폅니다.

댓글 1개:

  1. 11월 6일(화) 장공 기념강연회 전에 드린 예배 때 설교하신 육순종 목사님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비전'(꿈)을 꾸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깨어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장공 김재준 역시 역사의 현장 속에서 깨어 있으면서 근본을 강조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깨어 있음'을 '생각하는 존재'로 설명하셔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하는 존재, 깨어있는 존재가 바로 (만수 김정준의 표현으로) 역사 창조의 기수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을 근본으로 세우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세우면 나무를 거꾸로 심은 것과 같아서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잡기술에 능한 사람들이 목회를 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착시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최근의 목회세미나 등을 보면 기본보다는 기술을 가르칩니다.

    "이 기술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어느 어느 교회가 사용했던 기술이고~~"

    기술만 강조하다보니,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 속에서 우려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본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을 갖고, 어떤 신념을 갖고 교회를 섬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기술로 형성된 공동체는 기술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한도 없기 때문에 더 기발한 기술을 계속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기발한 기술을 발휘할 수 없을때 속임수를 개발합니다.

    물론 올바른 기본을 갖춘 상태에서 효과적인 기술을 사용하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우선순위는 기술보다 기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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