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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5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122) 제1권 편집후기

[범용기] (122) 제1권 편집후기


위의 글은 “뉴코리아 타임즈지”에 연재해 온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입니다. 필자 자신이 한글 철자법에 정확하지 못하고 신문사에서도 일일이 고쳐 쓸 시간과 부서가 없었기 때문에 철자가 시원치 못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다음 책은 좀더 나은 모습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될 때까지 여러 가지로 수고하신 뉴ㆍ코리아 타임즈사 여러분과 읽어봐 주신 이상철 목사와 인쇄와 제본에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신 칠성인쇄소 이인용 사장에게 감사들 드립니다. 모든 동지와 친구들의 건승을 빕니다.

[범용기 제1권] (121) 조선신학원 발족 – 식구들 서울에

[범용기] (121) 조선신학원 발족 – 식구들 서울에


우리 식구래야 아내와 딸 셋, 아들 둘이다. 애들 이름은 아버님께서 옛날 지은 작명법을 따라 글자 획수를 헤면서 오행(五行)에 맞춰 지은 것이다.

맏딸은 선계(仙桂)라 했고 둘째 딸은 단계(丹桂)라 했다. 맏아들 은용(恩鎔)만은 내가 간도 가는 길에 ‘창꼴집’에서 났는데 그애 이름은 나더러 지으라 해서 나는 ‘은혜’로 주신 애기라는 뜻과 ‘은진’(恩眞)가는 길에 큰 집에서 났다는 뜻도 품겨서 ‘은용’이라고 했다. ‘선계’와 ‘단계’는 기생 이름 같아서 후에 내가 고쳤다. 맏딸은 ‘정자’(正子)라 하고 둘째 딸은 ‘신자’(信子)라 했다. 맏딸에는 정의감이 강하고 어느정도 남성적인데다가 기(氣)가 승(勝)해서 남에게 지기를 무던히 싫어했기 때문에 바를 정(正)자를 붙였고, 둘째 딸은 좀 얌전하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에 믿을 신(信)자로 부른 것이었다.

그때는 일제말기라 일본식으로 여자에게 아들 자(子)자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풍속에서도 여자애에게 아들자자 이름을 붙이면 다음에는 아들이 난다는 얘기도 있어서 두루두루 그리된 것이었다. 해방 후에 본인들이 일본식이 싫다고 ‘子’자를 ‘慈’자로 고쳐 쓰고 있다.

“혜원”은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얻은 첫 아이니만큼 이름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본 것이었다.

사실 정자와 신자는 애기 시절에 ‘아버지’ 사랑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정자’는 내가 신아산 소학교 교사로 있을 때 잉태되어 만삭된 달에 나는 일본 유학을 떠났고 아내는 큰집에 돌아가자 곧 첫아이가 난 것이다. 내가 청산신학교 졸업반 때 하기방학에 귀국에서 처음 내 첫 애기를 면대했다. 그것이 정자가 4살 때였을 것이다. 그것도 잠깐이고 곧 순회전도니 뭐니 하고 돌아다녔고, 잠깐 후에는 귀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자는 내가 미국가기 바로 전에 여비등 문제 등등으로 ‘창꼴집’에 들렀을 때 임신되었는데 미국 유학 4년을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보았으나 아마 신자가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귀국해서 내가 평양에 직장을 갖게 되자 온식구가 처음으로 한데 모여 Home라고 갖게 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다.

전농정에서 식구들이 모여 살았다. 제집같고 살았다는 것이 발전일지 모르겠다. 내가 서울 가면서 가족들은 또 ‘창골집’의 ‘대가족’ 보자기 속에 품겼다가 추후해서 서울에 모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식구들 중에서, 나서 네 살까지 자라면서 아버지 그림자도 못 본 딸은 ‘신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애는 ‘아버지’가 그리웠을 것이고 아버지 사랑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외톨이 학생 기분이었고 다섯 가족의 ‘아버지’란 의식은 뿌리박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한 셈이다. 했을 리가 없다.

부모를 떠나 남편과 연합하여 한몸되는 결혼이나 잘되어 축복받기를 기원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녀들 결혼에 간섭하지 않았다. 여섯 자녀가 예외없이 자유 결혼이다. 자기들끼리서 결정해 놓고서야 아버지께 ‘문의’한다. 아버지는 “사돈될 분이 좋게 여기느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느냐” 등등의 몇가지를 묻고서는 “좋다”, “축복한다”로 끝낸다.

아버지는 그런 점에서 너무 비정서적이랄까. 신자가 어린 시절에 남달리 그리워한 사랑이 결혼 후에도 심층 어느 한구석에 응결되 있지나 않을까 싶어 아버지는 미안한 것 뿐, 이제와서 속량할 길은 막연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는 어느 정도 발언할 권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들, 자녀들에게는 나 자신으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그만큼 부모를 위해주고 자기들 생활에도 큰 재난을 탈선없이 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라고 감사한다.

막내 아들 관용은 이정희(李貞姬)와 역시 자유결혼하여 지금 수유리에서 산다. 아버지가 1959년부터 줄곧 독재반대에 나섰고 해외에 나와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막내는 일종의 인질(人質)로 거기를 뜨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에게도 미안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엉뚱한 대망이 없다. 교회 생활에 충실하고 직장에서 한점 부정도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시련이 닥치지 않는다.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지금 그 학교 자재과장으로 있다.

늙은 아내는 “그애까지 여기 왔으면 얼마나 좋겠소!”하며 입버릇처럼 뇐다.

작은 교직자요, 동지요, 나의 상담자인 이상철 박사는 내 사위로서 아들 직책도 분담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나는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남겨줄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자녀들 효양은 남못잖게 받고 있는 셈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내 유산이랄까? 예수도, 성프랜시드도, 로욜라도, 내게 세례 베푸신 김영구 목사님도 그러했으니 내가 외로울 것은 없겠다.

[범용기 제1권] (120) 조선신학원 발족 – 전농정 ‘우리집’

[범용기] (120) 조선신학원 발족 – 전농정 ‘우리집’


나는 그 동안에 현신교 씨 부인 주선으로 서울 청량리밖 전농정 주택공사에서 새로 지은 한옥을 한 채 계약했다. 부엌, 안방, 마루방, 건너방 등 격식은 갖춰 있었지만 협소하기 그지없는 소옥이다. 그래도 셋방보단 나으리라 생각됐다. 살림도구며 땔 것까지도 다 준비해 놓았다. 부엌문 바로 옆에 백척 길이 우물도 팠다. 물맛이 약수같다. 부토(附土) 모퉁이 집이어서 앞은 인조벼랑이다. 청량리 임업시험소 기사로 있는 현신규 씨네가 그 동리 같은 주택회사 가옥에 들어 있어서 집안 같은 이웃이 되었다. 우리집 길 건너 모퉁이에 송씨 집이 있었다. 따님 ‘정옥’(貞玉) 아가씨가 여의전 재학중이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쳤다는 혐의로 서대문 감옥에서 여섯달 살고 오기도 한 아가씨이다.

[범용기 제1권] (119) 조선신학원 발족 – 미군 진주와 미군정 수립

[범용기] (119) 조선신학원 발족 – 미군 진주와 미군정 수립


미군 진주

결국 미군이 진주했다.

정치인들 사회에서나 해방되자마자 여운형 중심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니,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이니 하는 정당들이 속출했고 총독부에서는 정권을 합법적으로 이양하려고 송진우 등에게 교섭했지만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면 일본총독부정치를 합법화한 것이 되고 자신들도 일제의 후신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수립

1945년 9월 2일에 미 극동사령관은 조선분할점령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9월 8일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 11일에 군정실시를 성명했다. ‘하지’ 중장이 ‘총독’ 자리에 앉고 아놀드 소장이 ‘정무총감’이 되고 그 밑에 민정장관으로 안재홍 씨가 임명되었다.

국민은 아직도 38선이 무언지도 몰랐다. 그런데 9월 2일에 벌써 미 극동군사령관은 조선 분할 점령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래도 미군정은 잠정적일 것이고 남북이 통일된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은 곧 출현될 것이라고 국민은 믿고 있었다.

12월 28일에 모스크바에서 소위 삼국외상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조선신탁통치안이 나왔다고 모두들 흥분했다. 독립국인데 신탁퉁치가 다 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년, 학생, 시민 모두 ‘반탁’ 운동에 나섰다. 좌익사람들도 가담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그들이 ‘신탄찬성’ 데모를 한다. 제 정신이 아니라, 지령에 움직이는 꼭두각씨였다고 모두 실망한다.

그 당시 송진우 씨의 훈정 5년설이 유포되어 거기에도 상당히들 반발했다.

국민들이 너무나 거센 반발을 고려해서였던지 신탁통치설은 유야무야로 되고 그 대신에 조선독립에 관한 미, 소 공동위원회가 성립됐다. 거기에는 김규식 박사, 이윤영 씨, 기독청년 대표로 강원룡도 참가했다. 결국 미, 소간의 합의는 기대할 수 없게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임정요인 입국

이승만 박사는 벌써부터 입국해 있었고 상해 임정요인들도 추후에 모두 입국했다. 그러나 ‘임정’으로가 아니고 개인자격으로 허입된 것이다. ‘미군정’이 정식 정부니만큼 다른 ‘정부’가 또 인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임정요인들을 환영하는 모임이 감리교 정동예배당에서 열렸다. 김국, 이승만, 김규식, 3거두를 비롯하여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등등 기라성이 단상에 앉았다. 한마디씩의 인사 이야기가 모두 능숙했다. 모두가 막역한 동지 같았다.

김구 선생은 기독교회가 나라의 혼이 되면 경찰이 쓸데없을테니 교회는 늘고 파출소는 주는 나라가 되야 한다고 했다.

청년학생들이 모두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정객’들이고 해방 한국의 정치현실을 요리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대망(大望)이 몸에 밴 분들이니만큼 그때에도 ‘동상이몽’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승만 박사는 어떤 부자의 별장인 ‘돈암장’에 유숙하며 정략을 다듬고 있었다. 강원룡, 조향록, 이명하 등도 처음에는 부지런히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 김규식 박사에게로 갔다. 이박사는 “너희는 내 하라는 대로만 해”하는 독재벽이 너무 일관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정과 좌익계열

하지 중장은 군정초기에 공산당도 합법적인 정당의 하나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정당 중의 하나로 군정 아래서 얌전하게 협조하기에는 너무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폭력혁명’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존질서 존중을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장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선동하여 1946년 9월 28일부터 11월 중순까지 남한의 산업기능을 마비시켰고 참가인원이 3백만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가서 유세에 분주했다. 하지 중장에 공산당 합법화는 처음부터 반대였다고 한다. 어쨌든 자유분위기였기에, 학생, 청년, 시민, 정객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특히 언론기관은 ‘자유과잉’이랄까, ‘신문’이란 이름의 간행물이 수십종 나왔다. 어제는 우익이다가 내일은 좌익 – 그리고 ‘비판’이 아니라 야비한 ‘욕지거리’가 활자화 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디서나 ‘좌’와 ‘우’들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해방되자마자 미국교단본부와 W.C.C. 관계기관에서 그동안에 출판된 중요한 서적들을 골라 몇 궤짝 보내왔다. 거기에 토인비의 『역사 연구』도 들어 있었다. ‘한신’에도 보내왔기에 나는 탐독했다. 교회와 세상과 역사의 현실과 미래가 차츰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서울대학을 위시하여 좌익학생들이 어느 정도 우세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유물사관을 읽고 이론 정연하게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익에는 그런 조직적인 학문의 준비가 없었고 다만 기독학생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 뿐이었다.

사실, 조선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정통신학으로 다졌기에 타계주의적인 부흥집회가 대표작이고 이론적인 역사 관심을 거의 없었다. 기독학생들은 이 점에서 좌익 학생들과 맞설 수 있는 역사관과 역사의식이 필요했다.

기독학생들은 학술강연회를 열고 강사를 초청하여 그들의 갈급을 축이려 했다.

제1회 학술강연에서 그들은 내게 토인비 역사관을 소개해 달라고 청했다. 내가 그 방대한 저서를 다 읽었을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마침 시카고 대학에서 이미 간추려놓은 요령을 더듬어 세 시간 강의했다. 강연장소는 경동교회 별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대학생들이 창밖에까지 빼꼭 서 있었다. 한국역사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나는 믿게 됐다.

학생들은 ‘이제 우리도 할 말이 있다’하는 자신을 갖고 헤어졌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얼마든지 맞설 수 있다는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그때 연대 총장으로 있던 백락준 박사는 선생들 앞에서 “그 책이 우리도서관에도 한질 와 있는데 소위 역사를 전공한다는 너희는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꾸지람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군정청에서는 일제 때의 여러 관립 단과 전문학교들을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부르게 했다. 그리고 미국인 무어란 사람을 총장으로 임명하여 그 통합절차를 맡겼다. 그는 갖가지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이를 강행 실현했다. 기독학생들은 통합된 기념이라면서 서울대기독학생 주최로 내게 특별강연을 청해왔다. 장소게 어데였던가 시민회관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기억이 분명치 않다. 학생들도 빼꼭 차 있었다. 서울대 총장이란 분이 개회인사와 아울러 통합의 취지를 말하고 내 강연은 시작됐다. 연제도 잘 기억되지 않지만, 내용인즉 새로운 각도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는 것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강연은 대성황이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통합한다는 뜻이 포함된 기독교적 유신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의 움직임과 국내운동

미국은 1947년 10월 18일, 조선문제를 정식으로 국제연합에 제소했다. ‘국련’ 감사하의 남북총선거에 의하여 통일한국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안이 ‘국련’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국련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래서 1948년 3월 1일에 하지 중장은 남조선 단독선거안을 발표했다. 여론은 찬반 둘로 갈라졌다. 영구분단의 징조래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현실에서 ‘차선’(次善)이라도 해놓고 봐야 한다는 찬성파와의 두 갈래였다. 나는 반대편에 서명했다.

1948년 4월 2일에는 제주도에서 공산반란이 치열했다.

1948년 4월 19일에 평양의 주동으로 남북정당 및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남한에서 김구 선생 일행이 참석했으나 북노당 일방통행적인 의사진행에 실망하고 돌아왔다. 이승만 박사는 공산당과의 협상에서 통일을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라고 일소에 붙였었다. 그러나 결과 여하를 막론하고 ‘통일’을 의논하자는데 불참할 수 있느냐 하는 ‘도의론’에서 김구 선생은 비장한 심정으로 북행한 것이었다.

군정에서 대한민국 수립에로

1948년 5월 10일 하지 중장은 마침내 국련 감시하에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동년 8월 15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수립을 선언했다.

동년 9월 9일에 소련점령군 사령부에서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북조선에 수립하고 10월 19일로부터 12월 26일까지에 소련군 철수를 완료했다.

동년 10월 20일에 남한에서는 좌익음모에 의한 ‘여수 반란 사건’이 발발해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국군과 경찰의 토벌로 평정됐다. 그 얼마전의 ‘대구 반란 사건’도 같은 부류의 것이었다.

이렇게 소요, 반란 등 사건이 빈번했다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국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을 가결했다.

1948년 12월 12일, 제3회 국련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 한국에서는 장면 씨를 수반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여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란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도 채택되었다.

[범용기 제1권] (118)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직후의 날들

[범용기] (118)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직후의 날들


해방직후의 날

이삼일 후에 나는 우선 혼자서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은 환희에 미쳤다. 교통질서도 아무 것도 없었다. 전차고 기차고 지붕에까지 사람 무더기고, 달리는 전차 뒤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걸 문제 삼는 사람도 없었다.

거리는 ‘만세’ 도가니였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만나는 대로 손잡고 축하한다.

미군 진주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는데, 이남에는 미군이 오지 않는다. 일본군이 질서를 유지한다고 총에 칼을 꼽아 갖고 모퉁이를 지킨다. 그러나 이미 항복한 군대라 맥쌀이 없었다. 저금을 모두 찾아가라고 한다. 조선은행에서는 지폐를 마구 찍어서 저금을 청산했다. 그동안에 총독부에서 강제 저금 시켰던 것을 부지런히들 찾아간다.

우리는 날마다 경성옆 앞, 세부란스옆 나가 미군이나 소련군 오기를 기다렸다. 4대국이 똑같이 조선독립의 산파요, 사심없는 친구인줄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평양쪽으로간 기차가 예외없이 ‘함흥차사’다.

이북에서 피난민이 내리닥친다. 소련군의 ‘다와이’(물건강요)와, 가정 침입, 난행, 행패에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공산정권 수립, 조만식 선생 납치와 감금, 조선민주당 및 교회탄압 등등으로 기독교 지도자, 교인 사회유지들의 월남이 부쩍 늘었다.

단신 또는 가족 대동으로 빈손들고 무작정 넘어오는 것이다.

이남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이북 월남민이 수만인데다가 일본, 만주, 북지, 상해 등지에서도 독립국에 간다고 떼저이 돌아온다.

작은 물웅덩이 정도밖에 안되는 서울 바닥은 인간소용돌이였다. 사람이 천하고 물건이 귀하다.

[범용기 제1권] (117)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의 기쁜 소식

[범용기] (117)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의 기쁜 소식


나는 아직도 도농에 있다.

1945년 8월 14일이다. ‘긴급방송’이라면서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담화가 발표되었다. 이 농촌에도 들려온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숨을 모아 맥없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은 의례 독립하는 거라고 나는 다짐했다.

동리 사람들이 남녀노소 모두 통장집네 앞 타작마당에 모였다. 나더러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나는 이제사 애국지사 독립운동자들의 염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느 노인 한분이 “이번에는 진짜 독립이 될까요?”하고 묻는다. 지금 생각하면 함축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독립은 되는데 당분간 미, 영, 중, 소 네나라 합동위원회에서 그 업무를 감시 추진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동안에 서울 소식을 전달하는 연락원이 계속 있었기에 나는 대략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건국이념

그리고 하루 들어 앉아 ‘한 크리스찬이 본 건국이념’이란 글을 썼다. 주로 칼빈신학에 근거한 것이었고 ‘카이퍼’의 ‘칼비니즘’을 참고했다. 급해서 퇴고할 사이도 없었다.

그래도 거기서 ‘권위’ 문제부터 다룬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라’의 권위가 정부 수반에 있느냐? 국민에게 있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어느 편에서도 궁극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분의 ‘스튜워드’며 그의 앞에 충성해야 할 책임적인 ‘종’일 것 뿐이라는 것이다.

맏딸 사위 들어오고

해방된 몇일 후였던가 나는 시내로 들어가려고 도농정거장엘 가는 중이었다.

정거장 바로 못미쳐 논뚝길에서 맏딸 ‘선계’를 만났다. 혼자 허수레한 피난 보따리를 이고 주춤거리고 오는 것이었다. 도농서 신영희 의사와 결혼하고 만주 공주령에 따라가 살던 아이다. 소련군이 공주령에 진력한데서 신의사가 혼자서라도 먼저 가래서 떠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공주령 살던 일본인들이 부녀자를 먼저 동만주 간도 방면으로 피난시키는 틈에 끼어 같은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기도 그 일행과 같이 갈 작정이었지만 안동현 가까이서 갑자기 서울갈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들 일행은 행동을 같이하자고 했었지만 자기는 거부하고 혼자 이렇게 왔노라 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 나는 감사했다. 동만주쪽으로 간 일본인 부인들은 소련군에게 유린, 강간, 강제수용 됐다가 많이들 죽고, 남은 부대는 시베리아로 강제수용됐다고 들었다.

두주일 후엔가 신영희 의사도 왔다. 공주령에서 얼마 가산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그건 철없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동리 중국인들이 집집마다 덮쳐 약탈하고 인민재판에서 죽이고 불질르고 하는 바람에 손댈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자기는 그들에게 인심잃은 일이 없었기에 아는 사람들의 증언으로 인민재판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공산당에게 간데마다 걸렸었지만, 용케 빠져 나올 기회가 마련되더라고 한다.

[범용기 제1권] (116) 조선신학원 발족 – 최후 발악상

[범용기] (116) 조선신학원 발족 – 최후 발악상


최후 발악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만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일본 녀석 하나가 말 끝에 “유단 다이덱끼”란 말이 옳다고 한다. 이건 “방심(放心)하는 게 큰 적(敵)이다” 하는 뜻이다. ‘유단’을 그들은 한자로 ‘기름 유’ 자와 ‘끊을 단’ 자를 쓴다(油斷). 말하자면 “기름이 끊어지는 게 큰 적”이다 하는 뜻이 된다.

그 무렵 일인들은 송진(소나무 진액)을 긁어 오라, 피마자를 심어 그 열매를 가져오라 하는 걸 보면 기름이 떨어진 게 확실했다. 집집마다 놋그릇을 바쳐라, 쇠꼬치는 무엇이든 가져오라 한다. 그리고 공용시설에서도 엥간한 쇠부치는 거의 다 뜯어간다. 그래 가지고 얼마나 오래 싸울건가 싶었다. 그 뿐인가? 수송선을 만든다고 묘소나 능(陵) 지대의 잘 자란 소나무를 마구 베어간다. 목선을 만든다는 것이다. 동구릉 숲도 엉성하게 짤렸다. 청년만이 아닌 중년층까지도 불러내다 군사체조며 분렬연습을 시키고 아이들까지도 격검 연습으 ㄹ시킨다.

그런다고 열심히 날 조선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찌못해 하는 일이라, 빨랑빨랑하질 못하다. “고라! 메다마가 신데 이루조!”(이 자식, 눈알이 죽었다)하고 악을 쓴다.

민간에는 ‘시일이 갈상고’(是日이 曷喪고)란 말이 속담처럼 돈다. 이건 악정에 시달린 백성의 원망을 표시한 맹자의 말이다. (是日 衷 余及汝俱亡) 즉 이 날이 언제 없어질까, 내가 너와 함께 망하련다 하는 뜻이다. 내가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 죽는게 시원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조선 사람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이살(日)을 ’일본‘(日本)으로 치부하면 더 재미있다.

나두 동네 사람들과 같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래서 악에 바친 일인들도 트집잡을 수가 없었다. 육류도 물론 극도로 통제되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밤중에 몰래 숲 속에서 소를 잡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돼지를 추념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집에도 얼마 갖다 준다. 값은 분담하지만 아주 싸게 먹는다. 그것으로 못 먹는 창자에 기름칠하는 것이었다.

“하라는 데로 하면서 제속 차린다.” 이것이 대대로 몸에 밴, 조선 민족의 ‘처세술’(?)이 아닌가 싶었다. 겉으로는 적응하면서 속으로 항거하는 전술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신(劒神)이라는 이도류(二刀流) ‘미야모도 무사시’(官本武藏)는 평생 진검시합(眞劒試合)에서 져 본 일이 없다고 한다. 제자들이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버들은 눈에 꺾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있다. 버드나무(수양버드나무를 말한다)는 가지가 가늘게 축 늘어져 바람 부는 데로 흐느적거린다. 그래서 눈이 붙어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눈에 눌려 부러지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진검시합’이란 진짜 칼로 시합하는 것이기에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흥분하는 일 없고 조급히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수동적이고 방위적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조급해져서 함부로 덤벼드는 틈을 타서 결정타를 준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싸움이 이 비슷한 타입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민족성’이 아니라, 한 ‘전술’일 것이다.

해방직전 의(義)에 순한 우리 학생 두 사람

박학수가 신학교 2학년이었던가? 어쨌든, 그는 그때 뚝섬교회 전도사로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 아이 둘도 같이 있었다. 아이 때 집에서 덮어놓고 짝지어준 아내였다.

그녀는 적어도 내 보기에는 드물게 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싫어했다. 목사되기로 작정하고서도 그게 고민이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지원병 모집반대유세를 하다가 잡혀 육개월 징역하는 중에 모든 과거를 참회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 자체가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언’이니 ‘사랑의 신비’니 하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닐까?

나는 둘 사이를 의좋게 만들려고 애썼다. 내 앞에서는 제법 좋은 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박학수가 얼굴이 활짝 피어 장마 끝에 햇빛처럼 환해갖고 왔다.

“선생님, 난 놀라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정말 위대한 여성이예요. 나는 그녀하고 결혼하렵니다. …”

“둘이 사랑하는 사이냐?”

“그래요,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하고?”

“이혼하지요.”

그는 아내에게 보상금을 주고 타일러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받았다.

‘둘다 불행할 바에는 갈라지는 게 좋지 낳으냐’ 했더니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호덕과 결혼했다. 전호덕도 그땐 아름다웠고 특히 그녀의 개방적인 성격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몇 달 후에 박학수의 전처가 중화장에 결혼 첫날 색시같이 차리고 집에 찾아왔다. 자기도 자기 길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후에사 안 이야기지만 그녀는 혜화동 어느 부자영감 소실로 갔다고 한다.

박학수는 물론 뚝섬교회를 그만두었고 신학교도 퇴학했다. 교직자 자격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일을 못할바에는 독립운동이나 한다고 나섰다.

그가 3학년생(졸업반)으로 있을 때, 1943년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는 조용히 내게 와서 말했다. “일본이 손들 것은 뻔한 일이고 그 ‘때’도 가까워졌으니 이렇게 무심코 지낼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 일본이 갑자기 물러날 경우 우리가 공백기간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독부 각부서로부터 지방이 관공서와 면사무소까지라도 그 대체 인물을 마련해 두었다가 즉석에서 그 사무를 인계해서 일사불란 정상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단을 준비하는 공작에 나섰다고 한다.

서울에는 식량이 문제다. 그러므로 일본군량 창고를 지키고 미리부터 식량을 반입해 두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동안 여운형 씨를 따라다녔으나 ‘경륜없는 선동자’란 인상밖에 받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당부했다. 그런 광범위한 인간명단을 준비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게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느냐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지하운동은 3년 안에 발각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낙관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서 사십리 동쪽인 도농에 농촌에 소개해 살고 있었기에 학교 시간 이외에 날들은 거기서 지냈다. 주일오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왕천에 멱감으로 나갔다. 웬일인가 싶었다. 월요일에 학원에 갔다. 주일날 박학수가 잡혔다는 것이다. 박학수가 찾아서 우리집에까지 왔던 것이라고 짐작됐다.

박학수는 194년 8월 10일이었던가? 하여튼, 해방 직전에 석방되었다. 그의 아내 전호덕이 우리집에 알리러 왔다 갔다. 그때 그는 파주에서 북촌 계동에 옮겨살던 때였다. 나는 곧 그리로 갔다.

그는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皮骨相接)이란 말 그대로였다. 뼈에 가죽 씌운 모습이다. 그렇게 여윈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거꾸로 달아매서 비행기 태우고 물먹이고 주리틀고 벌거벗겨 얼음통에 통조림하고 구둣발로 짓밟고 손톱에 못박고 … 당하지 않은 고문이 없다고 한다. 거기다가 식량부족이라고 콩밥 한덩어리도 얻어 먹기 어려웠으니 그럴 밖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다 왜놈이 시킨 일이지만 직접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치가 떨리도록 분하면서도 살아서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격려했다.

그대로 며칠 두면 죽을 것이기에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 전호덕의 정성어린, 적절한 간호로 현상유지 되는 것 같았다. 정신력은 강렬했다.

8월 15일, 그가 예상한대로 해방이 되었다. 아직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는 정계에 나설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운형도 송진우도 따르려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9월이 되었다. 전호덕의 급보를 받고 달려간 때는 벌써 그가 떠난 후였다. 몇 집 건너 여운형 씨 저택에는 어마어마한 간판들이 두세 개 붙고 정객들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다. ‘건준’ 초기였다. 여운형씨과 가까이 지내는 김용기 장로가 장례준비에 수고했다. 나는 그를 관에 넣어 장의차에 실어 파주 그의 선영에 묻고 왔다. 오랜 후일 전호덕 여사가 불란서에서 다니러와 박학수 묘소에 비석을 세운다고 내게 비문을 청하기에 선과 서(書)를 도맡아 큼직한 검은 옥석에 새겨 호덕과 같이 파주 그의 묘소에 세우고 왔다. 나는 그를 ‘순국열사’(殉國烈士)라고 이름했다. 정부나 역사협회의 논공행상 절차를 밟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순국열사’였던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박학수보다 조금 먼저 우리 학원 3학년생으로 대구 출신인 김은도 군이 인천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쌀 공출을 반대했다고도 하고 인간 징용을 비난했다고도 했다.

그 학생이 인천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라기시’(村산岸) 목사와 함께 인천에 면회하러 가 보려고 인천서에 교섭했었지만 인천서에는 ‘면허불허’일뿐 아니라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통고해 왔었다. 그러나 그와 동기동창인 송두규의 말에 의하면 김은도 군은 대구 출신인데 1943년 8월 하기방학에 인천방직공장에 근부하는 고향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사상범으로 몰려서 그도 억울하게 같이 체포되어 얼마동안 인천서 있다가 서대문 감옥 미결수 감방에 옮겨졌다. 그것이 추운 겨울인데다가 일제 말기라 먹을 것도 없고 사상범에 대한 발악적인 잔인성 때문에 결국 감방에서 동사(凍死)겸 ‘아사’(餓死)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때 송두규 목사는 혼자서 빈 기숙사에 있었는데 ‘김은도 위독’이라는 전보가 몇 시간 동안에 두 번이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 보았는데 시체를 거적데기로 덮어 창고 세멘바닥에 내버렸더라는 것이다. 너무 말라서 ‘인지’할 수가 없었는데 그의 뒷머리에 있는 흠집을 보고서야 ‘은도’인줄 알았고 시신을 찾았으며, 통지받고 올라온 ‘어머니’를 위로하며 대구까지 가서 친구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했다.

나는 우리 ‘한신’에서 역사를 바로 쓰게 될 때에는 김은도 군을 졸업생 순교자 1호로 추천할 것을 염원하고 있다.

[범용기 제1권] (115) 조선신학원 발족 – 혜원 졸업과 입학

[범용기] (115) 조선신학원 발족 – 혜원 졸업과 입학


혜원은 동덕소학교에서 줄곳 일번이었고 반장이었다. 졸업반 때 교무주임은 나더러 동덕여고에 보내라고 권했다. 같은 재단 소속이기에 일등한 졸업생을 학교장 추천만으로 무시험 입학시키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화’에 보내기로 마음먹고 있었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혜원의 담임선생은 점심때 막걸리 마시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후 시간에는 술냄새 풍기며 때로는 비틀거리며 교단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혜원은 그게 몹시 못마땅했던지 반장으로서 반을 대표해 선생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선생은 ‘아이들 앞에서 선생을 모욕했다’고 교장에게 혜원을 고발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졸업식날 아침에 ‘2번’ 아이가 ‘1번’으로 발표되고 혜원은 ‘2번’이 되었다. 혜원은 분하다고 울었다. 나도 분노했다. 6년을 줄곳 일번으로 일관했고 졸업시험에도 마찬가지라고 교무주임이 내게 말한 것이 엊그제였는데 오늘 와서 갑자기 아이들 성적을 바꾸어치는 교육자가 어디 있나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교무주임에게 따져보았다. 그는 몹시 죄송하다면서 “사실은 동덕여고에서 얻은 무시험 입학특권을 살려야 할텐데 혜원은 기어코 ‘이화’로 보내신다니 그 애를 ‘일번’으로 추천했답니다” 한다. 그리고 혜원에게는 설립자 특별상을 주고 답사도 혜원에게 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이화에 시험치던 날 나도 가서 밖에서 기다렸다. 소설가 이광수도 와서 언덕 밑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학부형이란 차별없이 천대받는 계급이라고 느꼈다.

발표하는 날에도 갔다. 혜원의 번호도 나붙어 있었다. 혜원이 좋아하는 것과 태가 기뻐하는 것 월계관 받는 마라톤 선수의 기쁨이랄까? 이광수 딸도 붙었다고 한다.

[범용기 제1권] (114) 조선신학원 발족 – 선계 결혼하고

[범용기] (114) 조선신학원 발족 – 선계 결혼하고


맏딸애 선계가 정신여고를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어떤 기관에 취직하든지 결혼하든지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대’로 징발되 가기 때문이다. 어떤 공장사무실에 취직이라고 했다. 그애는 비교적 잘생겼고 한참 예뻐질 연령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직장 그만 두었어요”한다. 이유인즉 주인이라는 젊은 사람의 눈치가 이상해서 일찌감치 그만두는게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속히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 당시 내 큰 조차(利鏞)가 하르빈 합작사(合作社)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르빈 의대에 재학중인 신영희를 좋게 보고 ‘선계’ 신랑감으로 점찍어 두었다 한다. 신영희는 내가 간도 은진중학교에서 가르친 학생이고 나도 그의 진실한 성격과 신앙을 알고 있었고 머리도 총명해서 언제나 ‘톱’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위감’으로 생각해본 일은 없었다. 큰조카는 하르빈서 오래 사귀는 중에 그만하면 만점이라고 추천해 왔다. ‘좋다’고 나는 그를 도농에 불렀다. 그가 하르빈 의대를 졸업하고 공주령에서 공의로 있을 때였다.

아예 결혼하러 온 것이다.

선계는 초대면이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둘이 자유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신영희는 우리집 ‘건너방’에서 유하게 했다. 아내 말에 의하면 신영희가 온, 첫날 저녁에 선계는 ‘엄마’와 함께 신영희 방에 들어가 인사하고 “처음 만나봅니다만, 저에 대한 첫 인상이 어떠십니까? 아예 싫으시면 여기서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리면 저도 말씀드릴께요”하더라는 것이다.

“마음에 듭니다” 하고 신영희가 대답하자 선계도 “저도 그랬습니다. 연분인가 보아요” 하더라는 것이다. 이건 내가 학교에서 오자마자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게 약혼이었다. 나는 교제할 기간을 한달 가량 잡고, 다음에 의사를 물으려 했었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온김에 결혼식을 올리고 갈 적에 데리고 가라고 했다.

첫 딸이라, 이부자리며 입을 의복 몇 벌이라도 해주어 보내려고 무던히 애썼다.

솜을 살 수가 없어서 하용, 춘우, 그리고 나 넷이 한강 건너 송파 어느 농가, 장로집에 몰래 가서 씨 뽑지 않은 목화 뭉치를 사가지고 밤을 타서 도농까지 온다. 몇 번을 그렇게 했다. 아내는 씨앗을 뽑고 솜틀집에서 솜편을 만든다.

천을 살 수도 없다. 일본 부인들 입는 ‘하부다에’ 등속을 일본 선생에게 부탁해서 겨우 몇 필 샀다. 그걸로 이부라지 겉을 씨웠다. 도농교회에서 김영주 목사 주례로 식을 올렸다. 신랑은 걸어갔고 신부는 가마를 탔다.

가마는 하용 조카, 재한 종제, 이춘우, 그리고 동리 청년들이 번갈아 메웠다.

피로연은 춘우가 찹쌀 한가마 사와서 인절미만은 풍성했다. 신랑 신부는 한달인가 집에 있다가 둘이서 만주 공주령으로 갔다.

[범용기 제1권] (113) 조선신학원 발족 – 하용 결혼하고

[범용기] (113) 조선신학원 발족 – 하용 결혼하고


하용 조카가 도농서 결혼식을 올렸다. 위에서 잠시 말했듯이 전농동 우리집 길건너 모새기 송씨댁 아가씨 정옥과 사귀고 있었는데 송양도 여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선역사를 주일학교생에게 이야기했다는 혐의로 한때 연행되었다. 우리가 뚝섬 살 때, 정옥은 아직도 갇혀 있어 앞길을 예측할 수 없었다.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하용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이년이고 삼년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용은 학업도 우수했고 성적으로나 생활로나 아가씨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간호원들 이화학생들이 눈독 들이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가 가마구라(鎌倉) 보육원 주일학교를 책임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은 처치곤란할 정도로 과잉이었다.

간호원, 이대생 등이 자원했기 때문이다. ‘구혼’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의사를 떠본 것이다.

그는 확고했다.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옥’은 육개월만에 나왔다.

그때 하르빈의 형님(在衡)이 회갑이었다. 그래서 하용은 약혼자 정옥을 데리고 하르빈으로 갔다. 나는 못갔지만 ‘창꼴집’에서 자란 식구들은 거의 다 ‘재연합’ 했었다 한다. 하용은 정옥을 친척들에게 선도 보일겸 데리고 간 것이었다.

하르빈서 돌아오자 도농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르빈의 형님과 형수님도 오셨다. 우리집에서 새며느리 큰절 받고 대추 던져주고 즐거우셨다.

[범용기 제1권] (112) 조선신학원 발족 – 도농에서

[범용기] (112) 조선신학원 발족 – 도농에서


도농에

나는 뚝섬을 떠나기로 했다.

땅과 집 사고

그 무렵 한신 졸업생인 도농의 이춘우가 종종 우리집에 들리곤 했다. 올때면 자기 먹을 배급쌀을 갖고 온다. 그럴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뚝섬 살림을 정리하고 도농에 오라고 권한다. 식량은 그래도 농촌이 낫다는 것이었다. 뚝섬집을 팔아 도농에 땅을 사서 감자농사라도 하면 식량이 될거란다. 도농에는 마침 팔려고 내놓은 터밭이 1500평 한필이 있고 초가집도 한 채 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집을 내놓았다. 집이 팔렸다. 나는 예정대로 도농에 이사했다. 그래도 뚝섬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아내는 도농서 제일 고생했노라고 한다.

땔나무 없고

땔나무가 제일 문제였다. 길가나 언덕 밑에 풀도 모두 임자가 있었다. 국유림 속에 잡풀도 임자가 있었고 솔잎 긁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종일 누군가에게 핀잔 맞으면서 솔방울을 주어다 땐다. 촌사람의 인심은 각박했다. 나는 거기서도 매주일 교회에서 설교했다. 유집사란 사람이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네에서도 제일 가난한 소작인이었다.

감자농사도 했고

내가 산 밭의 삼분지 이는 소작주고 삼분지 일은 자작으로 감자, 고구마 등 속을 심었다. 그러나 인분비료 없이 되는 곡식은 없었다. 그만큼 땅이 약탈당해온 셈이다. 농촌에서의 인분은 얻기 어려운 ‘귀중품’이다. 모두 못먹고 사니 배설될 여지도 거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어느날 동네집 비료지게를 빌려 갚혀 있는 비료 웅덩이에서 두세 지게 퍼다부었다. 아닌게 아니라, 감자는 비료준데서만 열렸고 그 밖의 것은 거의 ‘무’에 가까운 흉작이었다. 그래서 농촌에서의 인분 인기는 금비(金肥)를 능가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덕분에 감자 몇 가마 부엌에 쌓아놓고 아내는 겨우내 든든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범용기 제1권] (111) 조선신학원 발족 – 뚝섬에서

[범용기] (111) 조선신학원 발족 – 뚝섬에서


뚝섬에 옮겨살다.

전농정에서 1년 지냈는데 집 ‘모게지’ 물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집값이 조금 올라서 판면 모게지 물고도 다소 여유가 생긴다는 계산이 선다. 그래서 팔고 뚝섬의 좀더 크고 칸수도 많은 집으로 바꾸기로 했다. ‘전철’이 있어서 교통도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부랴부랴 뚝섬으로 이사했다.

뚝섬에서

뚝섬의 겨울은 추웠다. 강바람 산바람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워낙 불길이 들지 않는 데다가 땔나무도 없었다. 방 자체가 ‘알라스카’였다. 전쟁말기라, 살림꼴은 엉망이었다.

콩죽

식량 배급도 있으나마나였다. 기름짜고 남은 콩찌거기(두병)를 만주에서 실어다가 기계로 얇게 잘라 대패밥같이 된 걸 신문지 봉투에 한줌씩 넣어준다. 그리고 통밀과 눌른 보리를 하루 한 사람에게 이홉오작씩 준다. 이것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한참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몰래 콩 한가마 살 수 있었다. 아내는 동대문 시장에서 멧돌을 사다가 그 콩을 갈아서 매끼 콩죽 한 공기씩 보급한다.

막내조카 남용(南鏞)도 같이 있으면서 중동학교에 다녔다. 서울에 유학하는 친척 아이들이 하숙에서 못견디면 우선 뚝섬으로 찾아온다. 어떤 때에는 날마다 식구 열사람 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그 중에는 심한 폐결핵 환자도 있었다. 없는 식량에 콩죽 한그릇씩도 쉽지 않았다. 얼음장같은 방바닥이라 애기자리 펼데가 없다. 그래서 아내는 뒷잔등에 애기를 업고 있다. 젖먹일 때에는 앞으로 돌리면 된다. 젖은 왼종일 빨고 있다. 아내는 그래도 젖이 얼마 나오는 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인즉 젖은 말랐다. ‘하용’이 갖다주는 ‘모리나가’ 분유로 겨우 생존한 것이다. 하루는 엄마 잔등에 업힌 애기가 눈을 못뜨고 머리도 가누지 못한다. 울지도 못한다. 나는 옛날 어머니가 ‘창꼴집’에서 미음 쑤시던 것을 생각했다. 아내는 내 말대로 쌀을 씻어 앉히고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그 물을 떠낸다. 젖같이 보인다. 거기에 설탕을 넣어 숟가락으로 애기 입에 떠넣으면 좋아라고 받아 먹는다. 애기는 당장에 기운차렸다. 고마운 일이다.

큰 아이들은 그런대로 견디는 것 같았다. 경용이가 다섯 살이었다. 여름 더운 때, 한강에 멱감으로 데리고 가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그때 한강은 깨끗했고 좀더 올라가면 수심이 골고루 얕은 데가 있어서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도 없었다. 은용은 배고픈 줄도 모르고 좋아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배고파 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자기는 거의 굶어지내는 것 같았다. 한 숟가락이라도 아이들에게 더 먹여주고 보면 자기 몫은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여기 국그릇 같은 접시를 한 ‘타아스’ 사다가 아내 것까지 꼭 같은 분량을 담아서 내가 직접 배급했다. 그래도 별 수는 없었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내는 누워 있었다.

밭에서 배추뿌리를 뽑아다 끓여먹고 배탈났다는 것이다.

가정교회

일본 군벌 독재정치가 그대로 존속한다면 ‘교회는’ 결국 없어지고 말 것 같았다. 가령 있다셈치더라도 교회란 이름의 정부기관이요 ‘교회’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가정 안에 보존하고자 생각했다. 가장(家長)이 목사고 식구들이 교인이고, 집이 예배당이고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저녁 예배하고 헌금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돌아가며 기도도하고 했다. 그럴려면 가정으로서의 전통도 이에 ‘토착화’ 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족보’도 더듬었다. 그리고 그 유규한 흐름이 지금의 우리 가정교회에 흘러들었다는 신학(?)을 기초로 가훈(家訓)을 만들었다. 그것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치고 조카들에게도 보내고 그때 중국 서주(徐州) 무슨 은행인가 근무하고 있던 재종 동생 재한(在翰)에게도 보냈다. 히틀러도 유대인 가정에 심겨진 유대교를 뿌리뽑을 수는 없었다는 발상에서였다.

뚝섬에서 아이들은 계속 시내로 통학했다. 나도 물론 같은 신세다.

몇 십분에 하나씩 다니는, 큰 마차만큼이나한 기동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뚝섬은 인분냄새로 유명한 채소밭구역이다. 그래서 기동차 안은 파리로 초만원이다. 천정, 벽유리창 할 것 없이 새까맣다. 사람이 돌아서면 떠들썩 난리난다. 낯이고 뒤통수고 마구 덤빈다. 앉을 자리도 없어 나는 서서 간다. 그래도 모서리에 기대서 가벼운 책을 읽는다. 그때만해도 눈에는 자신이 있어서 흔들리면서도 얼마든지 초점을 맞추어갈 수 있었다.

그건 ‘일’이 아니라 ‘소일’(消日)이었다.

그때 신자는 풍문여고에, 혜원은 동덕 소학교에 다녔다.

[범용기 제1권] (110) 조선신학원 발족 – 전농정에서

[범용기] (110) 조선신학원 발족 – 전농정에서


혜원을 소학교에

전농정에 살 때 나는 매 주일 청량리교회에서 설교했다.

1942년 혜원이 만 여섯 살 됐기에 감리교에서 경영하는 동대문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래도 사립학교가 좀더 ‘우리’와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때 학교에서는 조선말 사용 엄금이었고 사용자에게는 엄벌한다는 정책이었다. 혜원는 자기도 학교 간다고 좋아서 참새처럼 깡총댔다. 그런데 저녁에는 풀이 죽어 축 늘어져 온다.

선생이 일본말로만 이야기하는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들끼리서도 조선말로 하면 한마디에 일전씩 벌금 내라면서 상급반 아이가 순사처럼 무섭게 굴더라고 했다.

‘나라 없는 어린 것’ 눈물 없이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 달 다니더니 제법 일본만을 지꺼렸다. 여섯달 후에 그 사립소학교가 없어졌다. 그래서 동덕소학교에 전학시켰다.

동덕소학교 교무주임은 어린이문학 작가여서 나와는 다소 통하는 데가 있었다.

혜원의 담임선생이란 젊은이도 좋은 사람 같았다.

관용이 나고

1943년 전농서 뚝섬에 이사하기 바로 전에 아내가 해산했다. 역시 내가 학교에 간 동안이었다. 저녁 때 학교에서 와보니 아내가 안방 다락 속에 누워 있었다. ‘아들’을 났다면서 갖난 애기를 보여 준다. 옆집 아주머니가 산파도 부르고 산모도 건사해 주었다 한다.

사흘이 지났지만 산모는 젖이 나지 않는다. 쌀밥에 미역국도 소용없었다. 세부란스에서 ‘인턴’으로 있는 ‘하용’ 조카가 ‘모리나가(森永粉乳) 분유를 얻어와서 아껴가며 먹었다.

큰조카(利鏞) 결혼하고

일본 동경서 법정대학을 마친 큰조카(利鏞)는 만주국의 ‘합작사’ 전국연합회에 취직해서 자기 약혼자를 데리고 임지로 가는 길에 전농동에 들러 우리집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영주 목사가 주례했다. 그리고 곧 하르빈으로 떠났다.

일년 후에 아들을 나서 작명을 해왔기에 ‘삼열’(三悅)이라고 불러 보냈다.

창꼴집 없어지고

식구가 이리저리 다 흩어진 다음에 ‘창꼴집’은 빈집처럼 스산했다. 부모님 다 가시고 외동딸 시집가고 아들 셋이 다 떠나 있고 육순에 가까운 형님 부부만이 남았다.

그래서 형님은 집을 팔고 하르빈의 맡아들을 따라갔다. ‘창꼴집’은 가재골 사람이 샀다고 들었다.

관용과 ‘엄마’

갖난애기 이름은 ‘관’(寬)이라 했다. 어려운 때에도 ‘너그러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애가 봉사심이 많은 것 같았다.

방이 추워서 애기 누일 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