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8일 목요일

[범용기 제6권] (1615) 3ㆍ1 정신과 한국역사의 현단계

[범용기 제6권] (1615) 3ㆍ1 정신과 한국역사의 현단계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서에서부터 55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가 해외 국내를 막론하고 3ㆍ1절을 민족적인 제전으로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이 운동이 순수한 우리민족의 심장에서 솟구친 민족생명의 발로 또는 폭발이었다는 것을 말함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씨 까지도 그의 “유신헌법” 서문에 3ㆍ1정신과 4ㆍ19정신을 계승하여……라는 구차스러운 꼬리표를 붙인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우리민족끼리서만의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일본만을 상대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 평등의 대의를 세계만방에 밝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선언의 배후에는 반만년 한국역사의 권위가 있고 2천만 한국민족의 충성이 모여 있고 전 세계 인류의 양심이 함께 서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선언은 세계 역사의 과거를 비판하고 그 미래를 예언한 인류역사의 전환점임과 동시에 그 역사의 새로운 방향 지시며 그 추진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강권주의 침략주의적이었는데, 지금부터의 역사는 도의와 인권의 역사로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말한다면 National interest 중심의 역사에서 National Justic의 역사에로 전입한다는 말이겠습니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했습니다.

우승열패, 양육강식의 원칙밖에 모르던 그 당시의 정치관계 국제관계에서 민족자결의 대의가 새 나라 창건의 새벽날개를 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도의의 시대는 폭력과 보복의 시대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와 협력의 시대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했습니다.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일본의 정치악, 국가악까지도 불문에 붙일 아량을 다짐했습니다. 지금부터 일본은 완명한 침략주의, 강력주의의 구악을 청산하고 동양 3국이 자주독립하면서 연합하여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에 공헌하도록 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실제 행동에 있어서, 6년 후에 인도의 “깐디”가 취한 비폭력, 불타협의 항거방법이 우리 독립선언서 속에 이미 발표돼 있었습니다. “깐디”가 그것을 한국의 독립선언서에서 취재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만 “깐디”가 그걸 모르고 있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이 선언과 함께 한국민족은 궐기했습니다.

일본에서 발표한 대로 보더라도 이에 참가한 인원수가 136만 3천 9백여명이고 학살당한 사람이 6천 6백 70명이고, 투옥된 사람이 5만 2천 7백 70여명이라고 했습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血史”에 집계된 것도 비슷합니다.

이 분들은 당시 세계 5대 강국의 하나라던 일본군국주의 침략에 빈손 들고 항거한 의인들이었습니다.

일본 군경들은 이 평화적인 양심선언에 총칼로 맞섰습니다. 수원 제암리 감리교회 같은 데서는 예배하는 중에 예배당을 봉쇄하고 불을 질러 몰살했습니다. 철모르는 어린이들이 불속에서 뛰어 나오는 것을 창으로 찔러 불속에 도로 집어 넣고 그 타 죽는 몸부림을 좋아라 깔갈댔을 것입니다. “이제사 우리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했다……”고 흐뭇해 웃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독립선언서의 정신에 따라, 이런 일본의 잔학행위까지도 불문에 부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문에 부친다는 것 그 자체가 문재해결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 매몰에 불과합니다. 더 심하게 말한다면 문제 도피라 하겠습니다. 비겁한 Escapism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본인의 인간성 자체가 잔인하게 생겨먹었다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자기 국가에 대한 잘못된 충성심이 그들로 그런 행동까지도 정당화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국가, “나라” - 특히 “자기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치학에 대하여는 A.B.C.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실제 국민생활에서 얻은 경험으로 본다면, 국토와 역사와 민족의식과 그 문화와 전통과 공통된 이해관계 등등에 대한 ‘일체감“이 ”나라의식“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가는 한 거대한 권력구조니만큼, 나라의 주권소재가 그 나라의 체제를 형성한다고 하겠습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면 민주체제가 될 것이고 주권이 본성적으로 어떤 독재자에게 있다면 독재국가가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서독에 갔을 때, 한국의 박정희 씨가 독재자냐 아니냐 하는 것을 규정짓기 위해서 서독정부와 그 관계 단체에서 거기 필요한 재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 10개월이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결론은 역시 “독재”였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직관력이 강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군사정권 당초부터 유신헌법제정에 이르기까지 그 방향은 독재자를 향한 행진이고 민주를 위한 노력은 아니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유신헌법이 박정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규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자유진영 국가들에 대하여 개방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민주”를 가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박”은 “국민주권”을 교묘하게 주물러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은 “주권 소매치기”였고 유신헌법은 그 “교본”이었다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소위 국회의원 3분의 1은 “박” 자신이 임명하고 3분의 1은 공화당에서 차지하고 남은 3분의 1인 “친여야당”에 배급했으니 본질상 여당 일색입니다. 순수야당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당”이란 이름이 붙어 있으니 거기 들어가 진짜 야당 구실을 한다고 용기를 낸 분들도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박”의 폭력 행동 때문에 축출되고 말았습니다.

그 극회에는 정권교체의 권한이 없었습니다.

예산 심의권도 없습니다.

국회의원의 월급은 한 달에 75만원이라는 거액이니 편한 팔자임에 틀림 없겠습니다.

판검사는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그러니 3권이 소위 행정수반이라는 “대통령”에게 쥐어진 것이 사실인 한, 그가 독재자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민주국가가 아닌 나라에서는 국민에게 정치에 대한 발언권이 없습니다. 알 권리조차 없습니다. 노예로 전락합니다. 노예에는 복종이 있을 뿐입니다. “충성”은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어김없이 잘 섬기면 “충견”은 되겠지요. 주인이 “임금”이 아니니까 “충신”이란 명패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실 남한은 일제 강점기 때와 바탕이 같아졌습니다.

남한이 독립국이라 하지만 “자주국민”이 없는 “독립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주국민”이란, 자기정부의 정책에 대해 잘잘못만이 아니라 그 정부의 “체제”까지도 비판할 수 있는 “개인자유”가 하용되고 확보되어야 그 기능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언론의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가 요새 “동아일보‘ 지원 운동을 일으켜서 눈물겨운 성의의 표시를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한국의 독재탄압 속에서도 ”동아일보“가 국민의 양심적인 의사표시를 어느 정도 대신해주는 언론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이란 “나라”는 “독재자” 박정희 자신의 권력 유지와 그 확장이라는 맹목의지에 독점되었고 이 “구조악”에 반대한 국민은 가축 같이 “국영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입장에서 국가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국민이 국가의 예속물일 수 없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입니다. 대의제도에 따라 이 국민의 주권행사를 위탁받은 정부는 국민의 주권의지에 충성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Steward가 주인인 것 같이 교만하여 국민까지도 자기들의 소유물이나 포로나 노획물, 전리품 같이 다룬다면 그것은 “적반하장”이요 일종의 강도행위라 하겠습니다.

“정부”래야 일인독재 정부여서 정상적인 “정부”라기도 어렵겠습니다만, 박정희 한 사람이 중앙정보부, 방위사령부, 경찰 등 거대한 권력기구를 걸머 쥐고 그것을 “국민사찰”에 돌린다면 국민이 어떻게 견뎌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국민은 자기 나라 안에서 마치 도망자 같이 불안하고 국토는 거대한 감방 같이 음산하게 되어갑니다.

이런 현실에서 국민이 이에 적응하거나 체념하여 무기력한 침묵만을 계속한다면 한국 역사는 침체되고, 한국민족은 위축되어 세계 역사의 진전 과정에서 탈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항거해야 합니다.

기미 독립운동은 민족적 항거였습니다. “항거”란 것은 당장 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특정한 사항에 대한 “횡포권력”의 부정(Denial)입니다.

국민생활에 있어서 법적인 의무와 도덕적인 의무와의 사이에 충돌이 생겼을 때, 법적인 것보다도 도덕적인 것을 우위(優位)에 두려는 실천적인 주장이 항거행위인 것입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민주체제에서는 물론이겠지만, 정부수반에게 “법적”으로 국가의 주권이 있다고 가정된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은 그 권력자 자체 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존속이 가능한 것입니다. Government for the People이 원칙이라면, 저절로 by the People, of the People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에는 민주체제로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 운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독재에 대한 우리의 항거는 역사 생활에서의 당연한 행위임과 동시에 역사의 목표를 향한 바른 행진인 것입니다.

5ㆍ16 군사 쿠데타나 유신헌법이 3ㆍ1 정신이나 4ㆍ19 의거를 계승한 것이라는 “억설”은 3ㆍ1정신에 정면 충돌함으로써 3ㆍ1정신 자체의 새로운 각성을 촉구했다는 Negative한 의미에서나 성립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적반하장” 이상의 가증스런 궤변이라 하겠습니다.

사실상, 현재 박정권 하의 한국은 독립 국가랄 수도 없겠습니다. 우선 군대가 미8군 사령관 밑에 예속돼 있습니다. 독립군대 없는 독립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국토는 강대국의 세력균형을 위하여 둘로 동강난 대로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숨줄을 비끌어 매고 있습니다. 군대와 경제가 외세에 의존된 때, 정치도 자주적, 독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빚진 종”이랍니다.

이북에서는 민족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김일성은 “신화”하여 일인독재를 영구체계화했답니다. 박정희는 히틀러 식을 따라 “이남”에 일인독재체제를 착근(着根)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남침이란 假想(가상) 위에 “비상”이란 감투를 씌워 “독재”란 우상을 주조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통일은 갈수록 어렵게 되고 남한만의 독립도 약화돼 갑니다. 탐욕적인 경제대국들의 착취대상으로 “빈혈”의 창백한 나라가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일본의 “조선총독”으로 전락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어간다는 평론도 있습니다.

할 얘기는 아직도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자랑스럽지도 않으니 이만 하렵니다.

하여간, 우리는 아직 “독립국”도 “자주민”도 아닙니다.

하루 속이 개인자유와 사회정의가 기대되는 자유민주 한국 재건에 대한 정열이 전 국민의 맘 속에 내연(內燃)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독사가 다스리는 한국이 “국민”이 다스리는 나라로 바꾸어져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正氣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ㆍ1정신은 1945년 8ㆍ15 해방에서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4ㆍ19에 민주생명으로 분출됐으며 지금은 반독재, 민주 건설로 전국에 번져갑니다.

그 행동강력에 있어서 3ㆍ1 당시에는 “비폭력” 불타협의 길을 택했었습니다. “방법”이란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그 대응할 전략도 유동합니다.

우리의 반독재 민주운동은 정치운동이기 전에 진리 운동입니다. “깐디” 운동도 진리운동이었습니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하게 한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거짓과 조종술로 일관된 박정권은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 속고 국민을 속임으로 그때 그때를 꿰매 왔습니다. 경제 번영이니, 통일이니, 한국적 민주주의니 하는 속임수들이 이제는 백일하에 폭로되었습니다. 거짓을 더 큰 거짓으로 덮다가 결국 꼬리가 잡히고 패망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구태여 조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호할 것도 없습니다. 진리 자체가 진리를 변호합니다.

진실이 깃들인 인간양심은 자유롭습니다. 하늘에도 인간에게도 부끄러움 없습니다. “참”을 증언하면 맘이 개운합니다.

기쁘고 당당합니다. 그게 자유의 멋입니다.

3ㆍ1 정신 안에는 인간 탄압이 둥우리 틀 고장이 없습니다. 하물며 일본 군벌정치 말기에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서약한 말단 일본 장교가 설 자리는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그런 기대는 너무 심한 시대 착오요 몰염치한 일입니다. 그것이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일시 매몰되어도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싹터 자랍니다.

반독재 민주운동이란 진리운동을 반드시 새 생명으로 한국역사의 토양에 뿌리박고 자랄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말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민주적 민족적 진리운동에서 도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반독재 민주운동”이 정치운동이라는 가설(假說) 때문에 “오불관언”(吾不關焉)으로 방관만 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기미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이 어떤 성분의 인물이었던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분들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계 33인입니다.

종교단체 대표가 민족대표로 돼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때에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설명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회가 역설하는 사회참여 주장은 거의 교회 본질에 속할만큼 책임적입니다.

그것이 “이웃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975년 3.1절
시카고 맥코믹신학교 강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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