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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5일 수요일

큰 스승이시여 / 문익환

큰 스승이시여- 장공 김재준 목사님 영전에 -


문익환(목사)

* 이 시는 고 문익환 목사가 스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옥중에서 작시한 것을 장례예식 때 조시로 낭송한 것이다.

스승이시여
큰 스승이시여
하늘 같은 땅 같은 스승이시여
당신이 가실 날이 이렇게 오고야 말았군요
구만리 장공 훨훨 나는 마음으로
이 강산 굽이굽이 안 가는 데 없이 불어예는 슬픈 바람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87년 긴 세월 당신을 떠메고 다니느라 늙어 버린 몸
마침내 벗어 버리고 가셨군요
홀가분히 아주아주 홀가분히

오늘 아침에는
나의 샛별도 숨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셨다는 하늘 무너진 소식을 들으려고
그러나 지금 여기 청주 미평동 148번지
6사 상 10방은 겨울답지 않게 온화하기만 합니다
자그마한 질화롯가에 둘러앉아
밤새우며 정담 나누듯 따뜻하기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
오래 뜸하던 시정에 반짝 불붙이며
저를 잠자리에서 깨워 주신 건
제 아버님만이 아니셨군요
두 분이 소리 없이 성큼 들어서시어
나의 두 어깨에 오른손 왼손 얹으시고
이마를 툭툭 치시며 일으켜 주신 거지요
틀림없지요
저는 이제 여기서 아버님의 마음에 당신의 마음까지 만지며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 그리우면 볼을 비비며 소리 없이
고마운 눈물도 뜨겁게 흘리는 거죠 뭐
뜨거운 눈물로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허영심 같은 걸 지우는 거죠 뭐

스승이시여
우리의 큰 큰 스승이시여
죽어서 사는 길을 몸으로 가르쳐 주신 스승이시여
우리를 죽음을 사는 길로 몰아넣으시고
그 길을 앞장서 가신 지독한 스승이시여
너무 나무라지 마소서
저는 벌써부터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죽일 놈이지요

스승의 부음을 기다리는 후레자식이지요
그래도 저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 무너지는 소식인 줄 알면서도
당신의 몸은 이제 할 일을 유감없이 다 했으니까요
하고도 남을 만큼 해냈으니까요
날개 접힌 수리를 풀어놓아
높푸른 창공 유유히 날게 하고
몸은 조국의 거름이 될 때가 되었으니까요

캐나다에서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사모님
당신이 도착하시는 날로 쓰린 듯이 나아
이 방 저 방 분주히 들락거리시던 사모님이시지만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당신의 날개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요
우리의 마음이요 꿈이요 하늘이요 자유이니까요
우리 조국이요 사랑이니까요

아마 1975년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자리를 비운 이 나라는
마치 기수를 잃은 군대처럼 갈팡질팡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돌아오시라고 띄운 이 못난 제자의 편지에
당신의 회답은 불호령이었습니다
“너희 젊은 것들은 뭐냐?다 늙은 내가 나가야 한다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 아니냐?”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꽁지에 불이 붙은 호랑이처럼
우리는 온통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꼭 미친놈 같았겠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당신에게 배운 게 그것뿐인데

스승이시여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버이 같은 아니 어버이보다 더한 스승이시여
당신은 함경북도 경흥에서도 전형적인 샌님 아니었습니까
머리는 좋아 글공부는 잘하셨다지만
그 보잘것없는 몸매에다가
꾸물거리기는 왜 그리 꾸물거리는지
가는 귀 먹은 사람은 한참 귀를 곤두세워야
겨우 알아들을 소리로 웅얼거리는 못난이
그러나 그 작은 몸 속에서는 두만강 푸른 물 소리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백두 영봉에서 흘러내리며 쩌릉쩌릉 살아 튕기는 물소리였습니다

풀려난 죄수들 면천한 천민들이 땅을 파는 변방이었지만
당신은 거기선 드물게 선비의 끄트머리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덕에 샌님이 되셨지만
당신의 글에선 흙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었습니다
억울한 죄수들의 울분이 아우성치고 있었습니다
천민들의 뚝심이 불끈불끈했습니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하며
손끝만 까닥거리며 백성의 고혈로 살아가는
서울의 벼슬아치들의 좀상스런 모습을 껄껄 웃어 주는
말갈기 휘날리며 대륙을 주름잡던
고구려의 기개가 있어 죽은 역사를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그 흙내음에서
절대로 절대로 정직한 땅의 양심이 고요히 번져 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속이지 않는
남 속이느니 차라리 내가 속아 주는 양심
속아 주면서도 결코 결코 속지는 않는 시퍼런 땅의 양심이
봄바람 타고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모든 간사한 유혹을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양심의 소리 따위 껄껄 웃어 주며 짓눌러 오는 검은 손을
가볍게 튕겨 버릴 수 있는 순발력도 주셨습니다

그 흙내음으로
당신의 학문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학이었습니다
가시덤불 갈아 엎고 씨를 뿌리는 농학이었습니다
감옥이란 감옥을 모두 허물고 그 자리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있고
즐거운 생활이 꽃피는 주택 단지를 세우는 공학이었습니다
온갖 불의와 부정을 때려부수는 군사학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자유와 정의를 기둥으로 평화의 나라를 세우는 정치학이었습니다

그 울분으로 당신은
선친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자유가 좋아서 기독교인이 되셨지만
거기도 툭툭 끊어 버려야 할 사슬이 많았군요
되지 못한 우월감으로 콧대만 높은
서구인들의 전통과 풍습은 더 무거운 사슬이었습니다
공자 왈 맹자 왈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슬은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문자주의였습니다
유교의 사슬을 끊어 버린 당신의 울분은 다시
기독교의 사슬도 끊어 버리고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뼛속까지 길들여진 노예 근성을 못 털어 버리고
뒷걸음치는 우리를 이끌고 당신은 앞장을 서셨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자유의 황무지를 갈아엎는 보습이었습니다

그 뚝심으로 당신은
기라성 같은 예언자들과 지성들이 이천 년 걸려 쌓아 올린
교리의 금자탑들을 허무셨습니다
이 겁쟁이들 세상이 무서워서 숨어드는
도피성을 아무 미련 없이 무너뜨리시고
길바닥으로 내모셨습니다

박봉랑 박사 서남동 목사가 본회퍼의 비종교적인 기독교 해석을
현영학 교수가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당신은 종교적인 언어가 말끔히 가신 찬송가 가사를 지으셨습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탑 놓아 간다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 가리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지요
하늘과 땅 그리고 세계사에 울리는 그 격조 높은 가사는
두 절로 끝나 있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알아 3절을 붙여 완성해 주기를 바라셨던 거죠
그 메아리를 잡으려고 저는 몇 해 징역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맑은 샘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권모술수로 온몸이 절어 있다는
같이 앉아 차만 마셔도 부정 탄다고 기피당해 오던 정치인들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횐가 뭔가를 만들고
의장이 되어 사회봉을 두드리시는 당신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지만
농담이라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내놓은 말이었습니다
이단이요 분열분자로 파문을 받았습니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정신으로 손수 세우시고
온갖 정성 다 바쳐 키우시던 조선신학교는 풍전등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두려워할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적 기독교라는 기치 아래 동지들이 혁신 교단이라는 걸 만들자
단신으로 이와 결별하고 나오신 ‘당신의’ 담력이
그 정도로 움츠러들 수야 없었지요
남이야 성서 파괴자라고 하든 말든
이단이니 뭐니 하며 칼을 빼들고 달려들든 말든
당신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듯
오던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었습니다

속이 정 언짢으시면 며칠 잠적 정도는 하셨지만
송창근 박사님이 찾아내시어
신앙과 학문을 교회 정치와 얼버무리지 않겠다고 한마디 하면
평온한 모습으로 당신은 다시 나타나시어
우리와 허물없이 섞이셨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당신의 말소리는
마냥 웅얼거림이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당신이 큰 소리 치시는 걸 들은 사람이 있다면
천릿길이라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가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고함 소리 길바닥에 밖으로 나가는 일 없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팔락이는 심지도 끄지 않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었습니다(이사야 42:2-3)
한국 신교 백년사에 당신만큼 많은 글을 쓰신 이가 없지요
많은 그 글을 다 모아 저울에 달아도
당신의 그 고요한 침묵 당신의 그 웅얼거림에는 못 미칩니다
그것은 역사의 증언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고요한 침묵과 웅얼거림으로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역사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위선과 독선으로 독기를 뿜는
살인과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오만불손한 기독교의 역사를 당신은 툭 꺾어
민족사 속으로 겸손하게 끌어들이는 만용을 부리신 겁니다
드디어 두 역사는 소리치며 하나로 어울려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분단의 찌꺼기를 깡그리 쓸어내고 통일의 대해에 이른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만년 청청하게 우리와 함께 서 계실 스승이시여
낙락장송은 정몽주의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도 낙락장송입니다
1987년 이 준열한 역사의 절벽에 온몸으로 버티고 섰는
버티고 서서 역사를 증언하는 낙락장송이십니다
정몽주가 옛 질서를 지키려다가 죽어 간
고풍창연한 솔이라면
스승이시여 당신은 불어오는 바람과 맞서서
내일의 꿈을 휘날리는 낙락장송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영웅은 아니십니다
당신은 우리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샌님이십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당신은 한국 교육의 풍운아 ‘한신’의 정신이요 창설자이십니다
기독교장로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보다 전에 당신은 분명 예수의 제자요
우리의 다시없는 스승이십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전에 당신은 우리의 형제이십니다
종로 네거리에 나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우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분명 우리와 한겨레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조금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겨레입니다
겨레의 양심입니다

아- 당신은
저 두꺼운 역사의 벽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어렵잖이 무너뜨리시고
백지장 뒤집듯 역사의 새 장을 여셨습니다
마치 똥강아지 코끝으로 사립문을 밀고 나서듯이
당신이 하신 일을 우리라고 왜 못하겠습니까
갓 풀려난 죄수들의 울분이 가슴에 살아 있고
갓 면천한 천민들의 뚝심만 있다면
당신이 지난날 해낸 일
우리도 내일 또 모레 해보일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고마운 스승이시여
길이 우리와 함께 계시소서
1987년 1월 28일 자정에
- 청주에서 불초생 익환은 엎드려

장공 김재준 / 고정희

장공 김재준


고정희 (시인, 한신대학교 동문)

학자라면 으레 가난하디가난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뜻 하나, 머리 하나로는 공부하기 수월찮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태어나 그런 시절을 살아온 장공 김재준은 따뜻하기로, 결곡하기로, 사랑스럽기로 짝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살아 생전 덕담 하나를 짝없는 실수로 수유리 오솔길에 떨어뜨렸습니다.

어느 가난한 목사의 첫 아들이 불치의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죽는 날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인지라 생사를 가름하는 수술을 받던 날, 죽어가는 아이에게, 우유배달 해서 공부하는 신학생의 피가 하루 낮 생명을 연장하는 데 보태졌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아이는 죽었고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이 목에 걸린 장공 김재준은 주말마다 꼬박꼬박 그 고학생을 불러내어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을 전전하며 몸보신시키는 데 꼭 삼년을 바쳤습니다.

그 신학생은 장성하여 이제 교수가 되었고 “창조의 모습대로 인간 회복”이라는 장공이 남긴 붓글씨 속에서 뜨겁던 피를 수혈하고 있습니다.

(高靜熙 시선,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회고 / 김윤옥, 김은희, 나선정, 박계자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회고
- 여제자들의 좌담 -



때 : 1994. 3. 14. 오후 6시
곳 :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 회의실
사회 : 김윤옥(제24회 졸업.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장)
참석 :
김은희 (제16회, 선린교회 장로)
나선정 (제20회, 기장여신도회 회장)
박계자 (제27회, 기장여신도회 총무)

사회자 : 우리가 존경하던 김재준 목사님이 가신지도 벌써 7년째가 됩니다. 우리 모교가 펴내는 「세계와 선교」지가 여 제자들의 회고담을 좌담 형식으로 꾸미기를 원해서 이렇게 우리가 모였지요. 사실 여제자들은 많이 있습니다만 손쉽게 연락이 닿는 사람들을 모으다 보니 우리가 맡게 된 줄 압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도적인 어른이셨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우리가 회담을 펼쳐 본다는 것은 외람된 점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학생시절이나 우리 인생에 크게 영향받았던 소박한 이야기를 회상해 봄으로써 그분의 따뜻했던 사람됨이나 역사를 바꿔 나가시던 기백의 배후 이야기가 되살아날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선 김은희 선배님,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1] 학창시절 기억

김은희 : 저는 부산에서 입학을 했어요. 그 당시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곧 김재준 목사님을 만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김재준 목사님이 어떻게 생긴 분이시고 어떤 말을 했고 등등의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흥분했지요. 입학 면접 시간에 떨면서 목사님을 처음 만났는데 보니까 키도 자그마하고 목소리도 작고, 어쩌다 한번 책상 위를 보시고 뭐 쓰시다가 하면서 사람은 한 번도 안 보셔요. 그래 나를 전혀 안 보신 것 같은데 정확하게 물어보실 것 물어보셨어요. 나중에 강의실에서도 우리는 안 보시고 천장하고 마루만 보시고 강의하셨죠.

사회자 :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목사님 별명을 “천지”라고 했어요(웃음)

박계자 : 그럼 김은희 선배 당시는 목사님이 참 젊으셨겠어요?

김은희 : 그래요. 그래요 아마 40대였을 거예요.

박계자 : 야아, 젊은 목사님이네요…

나선정 : 지금 살아 계신다면 94세지요. 1901년생이시니까.

사회자 : 그러고 보니 아직도 살아 계실 수 있었는데… 참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 김은희 선배 당시는 몇 년도입니까?

김은희 : 52년도입니다. 나의 학창시절은 그분이 53년도 새 교단 출범 이후 온갖 정열을 기울이시던 시절을 본 거지요 50대 초반의 한창때의 목사님이셨지요.
우리는 그 당시 김재준 목사님의 설교를 먹고사는 사람들이었지요.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와 강의를 들으려고 구름같이 모였어요. 그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 서울대 교수, 이대 교수 등 유명한 학자들이 많았지요. 그 분은 그러니까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이었어요.

사회자 : 저의 학창시절의 기억도 그때가 1960년대인데 목사님은 카리스마와 상징적 존재로 유명하셨어요. 그럼 나선정 선배는 어떤 기억이 있으세요?

나선정 : 저는 58년경에 입학했어요. 그때는 동숭동에서 수유리로 막 옮겼을 때인데 목사님이 학장으로 계셨어요. 그래서 강의시간은 우리에게 많이 할당되지 않았죠 그런데 정말 강의시간에는 하늘 쳐다보시고 손에 드신 안경을 내려다보시고 우리는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지금도 “김재준 목사님 강의는 기침까지 받아써야 한다”라고 말하지요. 그렇게도 좋았던 생각이 남아 있어요.
한번은 학장님 댁으로 찾아간 적이 있는데 목사님이 “콩나물 먹어봤니?” 하고 물으셨어요. “예 요즘은 콩나물만 먹어요” 하니까 “너희들 콩나물신학을 해야 해. 콩나물은 물을 주면 빠지지. 그래도 그 콩나물은 자라거든. 너희도 나가서 일하노라면 ‘내가 이런 일 할 것인가’ 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콩나물 생각하고 물은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하시는 거예요. 저는 정말 김재준 목사님의 제자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긍지를 가지게 되는지 몰라요. 생각나세요. 김은희 선배님? 우리가 이우정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만우절 날?

김은희 : 그래 그래 거짓말해서 모두 속았었지….

나선정 : 그때 김분옥을 시켜서 교수님댁을 다 돌게 했는데 내가 있던 기숙사 5동 1호실에서 보니까 교수님들이 올라오시는 모습이 보이는데 우리는 숨어서 킥킥 웃으며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 목사님은 제일 마지막에 오시는 거예요. 안경을 이렇게 내려쓰시고 이렇게 건너다 보면서, 침착하시게 오시는데 글쎄 이우정 선생님이 나와서 마중하셨지요. 우리가 개구쟁이였어. 그뿐인가, 개교기념일에는 목사님에게 여자 옷을 입혀드리고 킷킷 웃어도 목사님은 다 받아주시고 우리와 함께 친교시간을 가져주셨어요. 그저 방긋이 웃으시면서 거부도 안 하시고…

김은희 : 우리는 그래서 가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그런 말을 주고받았어요. 예수님하고 비슷한 분이라는 인상이 참 강했지요.

[2] 인간적인 목사님

사회자 : 그래요 그래서 어떤 중학교 교장은 “나는 예수님을 잘 모르나 김재준 목사님이 믿으시니까 나도 믿는다”고 했대요. 이제 자연스럽게 인간미 넘치시던 목사님의 회고로 넘어가 볼까요?
제 경험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저는 다른 대학을 다녔던 사람인데 한신에 와서야 교수님들을 통해서 지식과 인격이 함께 전달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생일 때, 목사님은 학장을 그만두시고 설교학이나 목회학을 가르쳐 주셨는데 목회학은 지금도 저에게 인간이해와 신학의 관계를 쉽게 파악하게 해 주었던 과목이었어요. 저는 학문보다 사실 한신에서는 인간됨을 배웠다고 생각됩니다.

김은희 : 등산 가지 않았어요? 수유리 뒷산에… 목사님은 등산을 좋아하셔서 늘 학생들을 몇명 데리고 등산 다니셨지요. 나는 직원이었는데 등산 갔던 일이 참 기억에 남아요.

사회자 : 백운대를 참 좋아하셨지요?

나선정 : 그러니까 사색 시간이었을 거예요. 조병옥 박사 묘소나 깔멜 수녀원쪽으로 시간만 나시면 산책 다니셨지요. 말 수도 별로 없으시고, 우리들이 재잘거리고.

박계자 : 저는 선배님들보다 훨씬 뒤에 들어왔어요. 그때 목사님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기독교입문,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기독교와 토착화, 목회학… 그런 거지요. 기독교입문 첫 시간에 들어갔는데 칠판에다 목사님이 “신학=인간학”이라고 쓰시는 거예요. 저는 그때 얼마나 충격 받았는지 몰라요. 목사님은 이어서 성육신을 이야기하시고… 아까 말대로 ‘천지’ 보시면서 말씀도 조그맣게 하시고, 선배들이 무조건 베껴 쓰라고 해서 열심히 베껴 쓰고 했어요.

나선정 : 기침까지 받아써야지….(웃음)

김은희 : 인간적이라고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목사님은 안 보시는 것 같아도 다 보시고 그 사람의 사정을 다 파악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절대로 사람들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신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목사님은 ‘그래도 말이야 그 사람은 이런 저런 점은 참 좋은 점이야’ 하시며 꼭 좋은 능력 있는 점을 이야기하시거든 그뿐 아니지 교수회에서 쫓겨날 뻔한 학생들이 목사님 때문에 구원받은 적이 한 두 번인가? 언제나 목사님은 교육자답게 학생들의 앞날을 열어 주시고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셨어요.

[3] 영향받은 신학, 신앙

사회자 : 그래요. 저도 그 에피소드는 아는데 지금 우리 교단의 유명하신 지도자급 목사님들이 김재준 목사님 덕에 구제된 분들이 많지요(웃음). 그러한 스승에게서 아마도 목회자의 심성을 많이 배우게 되었을 겁니다. 이제는 목사님에게서 영향받게 된 신학이나 신앙문제로 넘어가 볼까요?
제 이야기부터 하려면, 저는 목사님의 삶을 통해서 살아 있는 신학을 터득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몸은 작고 조용한 분이신 데 큰 나무였어요. 세속적인 이야기, 보통사람의 이미지인데 거기에 신학과 신앙의 진수가 있는 것을 감지했어요. 그래서 정말 저는 목사님 덕분에 다이아몬드 같이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3대째 기독교인 집안 출신인데 한신에서 목사님을 졸업 안 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박계자 : 그래요, 저도 향린교회 시절이나 미국에서 지냈을 때, 목사님 주변에서 목사님이 전혀 크게 주장을 안 하셔도 역사를 바꾸어 놓으시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목사님 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셔요?” 하면 “이용당해도 역사만 바로 되면 된다”고 하시면서요.

나선정 :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눈으로 사람을 보시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사람을 보시니까요. 투시하는 것 같아요. 호가 그대로 장공이라, 무한한 하늘이지요.
이것은 내가 전해들은 이야긴 데요. 목사님이 제자들의 목회를 둘러보시러 어느 시골 교회에 가셨는데 그날 따라 그 교회 목사가 김 목사님이 쓰신 설교를 그대로 했대요. 그런데 김 목사님이 앉아서 들으니까 그렇게도 은혜롭더래요. 예배가 끝난 후 담임목사가 ‘하도 좋아서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그랬노라’고 하니까 목사님께서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격려했대요. 제자 목사가 무안하지 않게요.

김은희 : 글쎄, 나는 결혼한다고 보고하러 갔더니 목사님은 “장일조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다”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그때 그저 나를 격려하시는구나 했지만 그말이 나의 평생을 좌우하더군요. 자신감을 주고 말이지요. 언제나 목사님은 당신이 상대하시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를 아시고 그 말을 하시는 거였어요. 정말 진짜 목사님이셨어요.

나선정 : 보통 스승은 대학이 끝나면 끝나는데 목사님은 평생 스승인 것 같아요. 제가 여신도회 총무시절입니다. 참 어려운 시절이고 고민이 많은 때였는데 캐나다에 교환 프로그램으로 다녀왔을 적에 만나 뵈었어요. 돌아와서 잊고 사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쓰신 휘호 우편으로 온 거예요. 보니까 한시인데 그 뜻이 그 당시의 나의 상황에 대한 가르침이셨어요. 어찌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아무리 우겨쌈을 당해도 꿋꿋이 달려가는 뜻인데 그 당시의 고민스럽던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모릅니다.

사회자 :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독일에서 교민묵회를 할 때였어요. 목사님은 해외에 계실 때 독일의 우리 집에 자주 오셨어요. 『범용기』에도 쓰셨지만요. 그런데 우리 교회 10주년 행사로 목사님을 모셨는데 그 행사를 치르시고 캐나다로 돌아가시더니 손규태, 김윤옥이라고 우리 두 사람 앞으로 휘호를 쓰셨는데요. 목회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길을 일러주시는 한시를 멋있게 써 보내셔서 지금도 우리집의 가보예요. 정말 투시력과 제자에 대한 사랑, 자기 몸이 병들었는데도 제자를 사랑하시느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에요. 한번은 우리가 크리스마스 카드에다가 바빠서 이름만 써서 보냈더니 나무래는 긴 편지를 보내셨어요.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이름만 쓰는 인사도 있느냐, 그러면서 3장이나 되는 긴 편지로 섭섭함을 표현하시는 거예요.

박계자 : 그래요, 정말 그 편지… 처음부터 끝까지 젊고 힘찬 필치의 그 편지 말이지요. 우리 부부도 받았어요. 미국에서 『범용기』 출판 위해서 송금해 드리면 꼭 편지를 보내세요. ‘조수경․박계자 부부에게’ 이렇게 이름을 나란히 꼭 쓰시고 말이지요 그 많은 제자들이 편지 보낼 텐데 모두 꼭 회답을 정성어린 필치로 쓰셨어요.

김은희 : 약자다 싶은 제자들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더 관심 하시고 그 편에 서서 발언해 주시고….

사회자 : 그런 생활신앙, 생활신학을 우리가 영향받았지요. 그래서 지금도 목사님은 계시지 않아도 우리가 받은 이런 신학은 평생 버릴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의사집안이라 말하자면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지만 한신에서 목사님의 삶의 신학을 통해서 약한 자와의 연대, 편애신학, 해방신학을 터득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저의 평생을 영향준 것입니다. 목사님을 알게 된 후에 제가 읽던 세계문학 작품들, 『죄와 벌』,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거지요.

김은희 :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 노선의 제자들은 모두 그렇지요. 시끄럽지 않으나 역사를 바꾸고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면서 개혁해 나가고, 약자 편에 서고 강인하면서도 사랑이 있고…. (웃음) 정말이지 특수한 스타일의 사랑들인 것 같애. 그런데 목사님은 여성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사회자 : 제 경험으로는 제가 비교적 사랑을 받은 기회가 많았던 제자인데요 여자이기 때문에 시집가야 한다거나 여자니까 부엌일을 혼자 나가서 하라거나 그런 경험은 없어요. 제가 한신에 들어가니까 어떤 유명하신 교수님이 저더러 “윤옥이는 시집을 금방 가겠지” 하시는 거예요. 아예 시집갈 사람으로만 보는 거예요. ‘신학생이 아니라 시집가는 과정으로 들어 온 여학생이’ 그런 태도 말이지요. 저는 어머니와 약속해서 캐나다에 유학 가려고 왔는데 말이지요.(웃음) 그런데 김 목사님은 나에게 “복음서에 여자들이 많이 나오니 누가복음의 여성관을 써보지” 그랬어요. 해방적인 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김은희 : 김 목사님은 능력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주의셨으니까. ‘능력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여성도 능력만 있으면 하는 거다’라고 인정하신 거죠 따님 공부시키신 것 보아도 아들 딸 구별 없이 대하셨어요.

나선정 :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윤리를 배웠는데요. 그때의 가르침으로 제가 지금도 살아가는 것 같아요. 아주 세미한 부분까지도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뼈대는 그때 목사님이 가르침이에요. 오늘도 우리의 행복을 이끌어 주시고 콩나물신학으로 꾸준하게 용기를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신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참 인간이란 참 길잡이를 바로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길도 달라지는 구나’ 싶어요.

사회자 : 그렇지요. 목사님은 상대방을 파악하셨으나 그 파악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정 때문이었고 상대방을 살리기 위한 파악이었지요.

나선정 : 바로 목회자상이지요

박계자 : 장공보다 흐르는 물 같으셔서 장해(長海)라고 해도 좋았어요. 다 품으시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시는 바다지요.

[4] 사모님에 대해서

사회자 : 여성문제가 나왔으니 사모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회고를 해야 되겠지요. 제 기억으로는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어요. 수유리에서 가까이 살았을 때는 사모님이 우리 집에 식칼을 드시고 김장을 도와주시러 오셨어요. 어떻게 아셨는지… 아마 전날 밤 놀러갔을 때 김장한다고 했던 것 같아요.

김은희 : 저는 사모님은 김재준 목사님의 강력한 보호자라고 봐요. 돈을 못 벌어 와도 청빈으로 보호했고 밤늦게 제자들, 여자들이 찾아와도 흔쾌히 대하시고 뒷소리 없었고… 목사님이 그랬어요. “우리 집 사람은 생전 달걀도 안 먹고 김치고 생선이 버리는 부분만 먹고 그런데 참 건강해.”

박계자 : 그렇지 달걀 안 잡수시니 얼마나 건강해.(웃음)

김은희 : 얼마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흔 몇 살이 되시도록 병도 없으시고 비만하지도 않고… 그분 이름이 장분녀인데 목사님이 사모님 이름으로 편지를 쓰신 적도 있어요.

나선정 : 사모님은 참 인격자였어요. 아마 사모님 집안이 옛날 상당한 양반 집안이 아니었나 싶어요. 어떤 면으로는 도를 닦으신 분인 것 같고요. 목사님이 돈을 여유 있게 주신 것도 아니고 유학 가신 후에는 또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양식이 없어서 남이 걱정할까 봐서 빈 솥에 물을 부어서 불을 때서 연기를 내셨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요. 우리 같은 어린 제자들에게 꼭 경어를 쓰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지요.

김은희 : 목사님이 사모님의 인격에서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유학에서 돌아오시니까 목사님은 다른 현대적인 여성에게 갈 거다 각오하고 계시드랬잖아요. 사실 세상 적인 남편의 점수에서 보면 목사님은 낙제 점수인데도 사모님의 취향이 고상해서 당신이 거기서 가치를 캐내신 거지요.

[5] 만년의 목사님과 우리

사회자 : 우리가 목사님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자료는 밤을 새도 모자랄 거예요. 이제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만년의 목사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목사님은 만년에 참 고향에 가고 싶어 하셨어요.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경흥이라는 함경북도에 있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독일에 오셨다가 스위스 북한 대사관에 가셔서 문제도 일으키셨는데… 그것은 모두가 통일을 위해서 누구를 이끄시고 북한에 다녀오심으로 터부를 깨보시겠다는 생각, 나중에 문익환 목사님이 실행 하셨지만요. 그런 간절한 생각을 가지셨는데 결국 이루지 못하시고 가신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지난 1992년 9월에 평양에 갔을 때, 목사님 영혼하고 대화하면서 다녔어요. ‘목사님 여기 보세요. 평양이 이렇게 크네요…’ 하면서 말이지요. 제가 통일에 관심 하는 것도 목사님 영향이 커요

나선정 : 그래요 통일에 대한 목사님의 움직임은 사실 세계적인 것이었지요.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하신 것이 다 그런 맥락이 아니겠어요? 나는 목사님이 지으신 찬송가 261장을 부를 때마다 목사님 생각이 나요. “하늘 씨앗이 되어…” 그 구절 말이지요.

김은희 : 씨앗이야. 우리는…

나선정 : “하늘 씨앗이 되어 이 땅에 생명을 이어간다.” 그런 제자의 도를 우리는 다해야겠지요. 스승의 넓은 이해력, 넓은 사랑을 가지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고, 한신도 목사님의 뜻을 이어받는 학교가 되어야겠지요. 현재 한신 교수님들은 김 목사님의 제자들이니 진일보하셔서 우리 한신 전통을 살리는 운동을 일으켜야지요.

사회자 : 옛말에 ‘제자는 스승보다 나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더 나은 인격자가 되어서 한신 교수의 전통을 흐리지 말고 그대로 세우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된 제자들은 약자와 연대하신 스승의 뜻을 받아서 여목사나 여교역자들의 문제에 이해있는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되셨으면 싶습니다.

김은희 : 한 분 갖고 안되면 네 분이 모여 한 분 몫이라도 해야지요.

사회자 : ‘우리 기장 교단에 김 목사님 같은 큰 민족적 지도자가 없어서 야단이다’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요. 그런 말하는 사람들이, 저부터 김 목사님의 한창 활동하시던 나이에요. 이제는 우리 제자들이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데 너무나 부족하다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김은희 : 그래요. 큰 스승을 가진 행복한 여 제자들이지요.

사회자 : 그래요. ‘큰 스승을 가진 행복한 여 제자들이다’ 이것을 맺는 말로하고 이것으로 우리의 행복했던 목사님 회고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장시간 고맙습니다.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 분 / 전경연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하고 확보하신 분


전경연(한신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1966년 「사상계」잡지 4월호에 난관을 뚫고 이 잡지를 존속하게 하려는 장준하 사장의 청에 의하여 “한국의 석학”이라는 연속 논단에 제1회로 “김재준론”이라는 글을 썼다. 나의 깊지 못한 그분과의 접촉을 근거로 하여 감히 이 같은 글을 썼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의 학생들은 이 글을 인상깊게 읽었던 모양으로 내게 답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 글은 주재용 박사편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1986년 발행)이란 단행본에 수록되어 누구나 찾아 읽으려면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김 박사에 대한 나의 관찰과 사귐과 인상을 쓰라는 부탁을 받고 조금 당황함을 느끼게 된다.

[1] 김재준 박사와의 첫 만남

나는 일본 동경에서 지금의 동경신학대학의 전신인 일본신학교에 재학할 때에(1940년 이래)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의 말을 통하여 조선총독부의 한국 종교단체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평양신학교의 존폐가 요란스럽게 토의되고 있다는 사실과 서울에서 새로 시작한 조선신학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소식에 의하면 새로 생기는 이 학교에는 평양신학교와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고 탄복할 만한 특징들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식량과 일용품이 지독한 결핍과 전쟁의 공포, 생활고, 여의치 못한 수업상태 등을 겪으면서 겨우 8․15 해방을 만나고 이제부터 변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 그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나와 몇 교역자들이 합심하여, 전쟁 중에 폭격과 화재에 의하여 회당을 모두 잃고 각 교회에 신자 몇 가정만 남아서 예배드릴 곳을 찾는 사람들을 모아 동경 중앙 간다구에 있는 한국 YMCA 건물 안에서 한 교회로 합하여 한인경동교회를 발족시켰다.

나는 전쟁 중에도 한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였다. 열한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예배드리게 된 것도 기쁜 일이었으나 일본 전국에 동경교회와 마찬가지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교회들을 한 교단으로 결성하게 한 것도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1947년에 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입학 허락과 장학금 지급 약속을 받은 후, 여권을 받으러 서울에 왔다. 태평양전쟁은 멎었지만 한국은 말할 수 없는 무질서와 불안이 감도는 곳이었다. 일본에 갔던 한국인들의 귀국인파에 끼어 나는 일본 규슈의 하끼다 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상륙했으나, 어디 머물지도 못하고 그 길로 서울행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나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서울에 와서 일본신학교 선배이며 한국복음교회 서울교회에서 시무 하는 지동식 목사님에게로 찾아갔다. 그의 사택은 전에도 한 두 번 간 일이 있어서 쉽게 찾았다. 이분의 신세를 두 달이나 지면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여권수속을 하는 등 애를 썼다. 이때 나는 서울역 앞 조선신학교로 찾아가 송창근 박사도 만났고, 그때 김재준 박사는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경동교회가 모이는 옛 가옥 이층에서 김 박사님을 만나서, 학교와 교회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가지 담화 속에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김 목사님은 자신의 유학생활을 회고하면서 그 유학생활은 쓰리고 험한 길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여러 차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조선신학교가 겪는 풍파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들이 보낸 자료 가운데, 김 목사님이 쓰신 “현대 세계신학의 동향”이란 것과 조선신학교 학우회지 「임마누엘」이 있었다. 당시에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규의 진상을 내 나름대로 적어서 당시에 미국 북장로교회의 총무로 일하시는 존 카벤드리 스미스 박사님에게 보냈더니 그는 매우 격한 필치로 “당신들은 안으로부터 화합하고 의좋게 고난중에 있는 동포들에게 선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진상은 그렇구나’하고 반성을 해보았다.

나는 보스톤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1952년에 박사학위를 마친 후 한 3개월 머무는 동안에 김재준 박사님의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는 한국신학대학 이사회의 교수청빙서가 들어있었다. 내가 나의 학업에 관해서나 학위 받은 것에 대해서 보고를 드리지 않았는데 이같이 청빙서를 받고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했다. 나는 가부를 곧 알려드려야 했겠지만, 김 박사님께 내가 귀국한 후에 작정하겠다고 써보냈다. 그 시기에 나의 「일본신학교」선배이며 서울에서 목회 하시며 연희대학(현재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계신 지동식 목사님이 편지를 통해 귀국하면 연희대학에 와서 가르쳐 달라고 여러 번 청한 일이 있었다.

[2] 50년대의 김재준 박사-약진과 확신의 수행의 시기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맥아더 장군이 사령관에서 해직된 다음에 전선에서는 더 치열한 전쟁이 진행되는 때에 나는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 도착하여 나의 일한 곳을 작정해야 하였다. 귀국하는 도중에 일본 동경에서 이룬 새 가정을 이끌고 처량한 조국의 광야에서 나의 일할 방향을 확립해야 하였다.

김재준 목사님, 정대위 학감, 김종대 이사장 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여러분의 간곡한 권면에 의하여 나는 한신에서 일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부산에 와서 여러 사람에게서 제의를 받았으므로 사실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를 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이같이 한신과 인연을 맺게 되기 며칠 전에 대구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 박사의 제명과 그를 동조하는 현직 목사들을 배제한다는 결의가 있었다고 한다. 강원용 목사는 이 총회 석상에서 이제 ‘십년 후에 보자’고 고별의 연설을 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등교한 한신 교사는 부산 남부민동 언덕에 학생들과 교수님들의 지극한 노고로, 군수 물자를 넣었던 통에서 얻은 널판으로 건축된 넓은 강당인 홀과 작은 다락의 교무실로 되어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천막으로 된 기숙사와 천막 교실들이 소위 캠퍼스라고 하는 것의 전부였다. 신학교의 온 가족들은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출애굽의 민족처럼 단합하고 희망에 넘쳐 있었다. 이미 김정준 교수, 박봉랑 목사 등이 유학으로 떠난 후여서, 가르칠 사람들이 부족하였다. 거기에 서남동 교수와 내가 함께 취임하게 되어 전진하는 표를 나타내었다.

김재준 목사님은 그 전쟁 가운데서 어떤 경로로 나오는지 모를 잡지「十字軍」을 그 개인의 책임으로 출간하고 계셨다. 그분과의 정다운 사귐은 아직 가지지 못하였으나 이 문필 사업에 협력하려고 작정하고 몇 가지 투고를 하였다. 영국의 맹인 시인 조지 마테슨의 신앙시를 몇 편 번역한 것과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이라는 연속물을 쓰게 되었다. 「십자군」 잡지는 목회하는 분들에게 신학적 소품, 세계 소식과 함께 빗발치는 한신에 대한 비난과 신신학이란 공격들에 대응하는 문필을 실었다. 나의 글들이 그 분투에 큰 응원병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신신학이 칼빈의 신학을 업고 나온다고 보이면 반대자들의 편벽된 인식이 완화될 수도 있고 실제 그런 효과를 내었다고 생각된다. 이 연속 기술은 그 후 2년 이상 계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게 있어서는 이것이 『칼빈의 생애와 신학사상』이라는 단행본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골로새의 이단과 현대교회”라는 성서연구도 여러 번 나눠 게재하였다.

서울로 수복한 후에 나는 학우회를 격려하여 단순한 수필이나 논설이 아니라 신학연구지의 역할을 하는 학우회지를 엮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한국신학대학 학보」라는 표제로 연구지가 나오게 되었다. 김재준 박사는 그후 자주 강조한 구호인 “학에 충실하라”는 창간호 축사를 써주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신학교가 참으로 신 ‘학’을 하는 진리탐구의 전당이라는 것보다도 하나의 직업훈련소와 같이 다루어지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해융 보는 현상이다. 당장 위기에 직면해 있는 조급한 심정으로서는 그런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나, 그래도 그렇게만 나간다는 것은 결코 ‘대계’(大計)를 위한 교육자의 태도가 아니다. 구미제국에서 다년간 학업을 닦고 귀국한 모 일본인이 귀국소감을 말 한데 보면, 구미 특히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정말 ‘학문’을 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현학’(衒學)으로 되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독일에 있을 때 어떤 독일 평교인이 그에게 ‘미국에는 헬라어, 히브리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목사가 있다는데 참말입니까?’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김재준 박사님은 한신이 참으로 ‘학’을 진지하게 닦는 도장이 되기를 원했다. 더욱이 당시의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 신학방식을 거부하고 획득한 자유정신은 학문하는데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의 남용은 사도 바울도 경고했듯이(고전 6:12-10:24)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 하면 도움보다는 폐해를 가져온다. 학의 자유란 것이 세계 신학사조의 어떤 것이든 읽고 소개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신조와 성서안의 진리의 진수들을 버릴 자유는 없다.

김 박사님은 한신이 수유리 캠퍼스에 옮기게 된 것을 한신의 제3의 시대의 시작이라고 일컬었다. 그만큼 한신에 관련된 사람들은 지난 시기에 억압과 비방과 침체 속에서 출구를 모색하던 중 이제 그 역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고 전망하게 되었다. 한국의 교계도 한신을 괄목하고 관망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더 학구적이 되며, 그들의 좁은 진출 지역을 넓히려고 애를 썼다. 그 중에서도 한신의 선배들이 개척해 놓은 군목의 길이 좋은 일터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아울러 다른 선교의 문을 넓히려 애썼다.

「한국신학대학 학보」는 그 동안 다섯 권이나 발행됐고 김 박사에게는 이 시기가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십자군」이 호를 거듭했고 기독교서회를 통하여 논설들은 물론 스팬의 『목사학』, 투루불러드의 『가정생활의 재건』, 하크니스의 『윤리학』등의 단행본 번역이 그분을 통해 출판되었다. 이것들 보다 이전에 그는 문교부 도서 장려 기획에 의한 맥킨토쉬의 『현대신학의 제형』(1953)을 내었었는데, 그는 이 책을 자신의 가장 좋은 번역서라고 추천한다. 이것은 현대 신학자중의 칼 바르트, 부룬너 등 몇 사람의 사상 해설서이다.

1950년대는 김 박사에게 가장 약진과 확신 수행의 시기였는데, 이 시기의 종장에 가서 김 박사는 한국신학대학 학장 취임식을 가졌다. 1959년 9월 22일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왜 새삼스럽게 학장 취임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다. 명실 공히 그는 한신의 정신적 지주요 조선신학원 원장도 맡았었고 부학장의 직위도 가졌었고 한신과 기장의 지도 세력이었는데 사실 학장취임이라는 것은 여분의 일 같았다. 원장 또는 학장으로 김대현 장로, 유인구 목사, 송창근 박사 다음에 함태영 목사 등이 역임하였고 김 박사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만의 거물 학장 밑에서 학교의 재정과 운영이 말로는 이사회의 책임 아래에 있다고 하나 처리되기는 서무과장의 손으로 되고 있었다.

[3] 소용돌이와 탁류

그런데 김 박사가 학장에 취임하고 수유리로 옮겨서부터 학교의 재정 규모가 커지고 학교장, 이사장의 인장을 자유로 사용하던 사람들의 대담하고 불성실한 행위가 점점 노출되어 학교는 큰 소용돌이 가운데 빠져 들어갔다. 밖으로부터 오는 풍파를 받아넘기며 영웅스럽게 이겨 나가시는 김재준 박사님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이 무렵에 학교가 빠져 들어간 내부의 물결은 그야말로 세기말적이고 치욕적인 탁류였다. 우리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의 현황에 대해서 슬픔을 금하지 못했다.

수유리 교정으로 옮긴 후 학교의 제정규모의 확대에 반비례하여 수입원이 없다는 곤경에 허덕이게 되었다. 변변치 않은 급료지불은 여러 달을 거르기도 했고 학교운영도 원활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무과장인 조선출 목사가 학교 경리부에 기재되지 않은 가불금을 지출한다든지, 이사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은 남의 채무의 인수가 그의 수하의 방재황 씨의 소행이라고 전가시키는 매우 복잡한 경리적 비리를 당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책임소재와 회계 정리가 문제되었다. 그래서 총회와 기장 지도층이 참가하여 진상을 규명하려 애썼다. 경리책임자를 두둔하려니 김재준 학장에게 책임이 물어졌으나 도저히 해결되지 않아서 학장은 세 번이나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수리되지 않았고 학교 관련자들 모두가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 교수단은 그 진상을 밝히는 “학장사임서 제출경위에 관한 해명서”라는 상세한 증빙과 계산을 모아서 의견을 진술한 40페이지의 인쇄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때 김 학장은 친히 창립 당시에 거주하고 고생하던 연고지들과 6.25사변 당시에 피신해 지내던 곳, 또 동자동 언덕의 옛 교사 지역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침울한 마음을 달래었다고 한다. 옆에서 그를 모시고 있는 교수들의 심정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4] 기장 50회 총회에서 부치는 글

이 풍파가 가라앉을 무렵, 제3공화국의 공무원 은퇴연령단축 정책에 의하여 김 박사는 1962년 62세로 정년 퇴임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칸트철학의 대가였고 『순수이성비판』의 번역자였던 한 철학교수는 표창 받는 자리에서 메달을 받고, 자기는 이제다 되었구나 하고 탄식 했다고 한다.

사람은 그 업적이 알려지고 못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 받을 수록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하겠다. 김 박사는 역사의 수레바퀴의 세찬 시련에 거듭 정신을 가다듬어 그 흔적을 몸에 정중히 간직하곤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해에 나의 한신대 근속 10주년 기념으로, 내게 시편 1편을 서예로 써 주었다. 나는 이것을 족자로 만들어 간직하고 있다.

1965년 기장총회는 김 박사에게 총회장이 명예를 안겨드렸다. 그는 기독교장로회의 50회 총회에 부치는 글에서 한 네 가지의 총회에 대한 훈계를 하고 있다. 이것은 본교 연구지「신학연구」의 제9집에 실려있다. 첫째로 기장교회가 다른 여러 교파와 함께 선교하는 가운데 그 특징이 무엇인지 가리지 못하는데 이르렀고 또 현실에 급급하여 소속 목사님들이 제나름으로 선교하고 있을 때, 김 박사가 준 가장 뚜렷한 특징은 ‘고난받는 교회’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로 “우리에게 좋든 나쁘든 하나의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통에 기초하여 성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이 ‘전통’이란 것은 역사적으로 흐르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학문적으로 철저화하고 성서신학의 현대적 조류를 따라 세계적인 공헌을 하는 신학이 될 것과 현대적 문제를 신앙에 맞게 해명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는 총회 본관을 건립하여서 교인들이나 교역자들이 찾아갈 ‘고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넷째로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한 분파로서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지금은 서로 반성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장로교 교파들 사이에 교류를 확대하고 ‘장로연맹’을 결성하려는 조직 단계에 들어갔으니, 교파간의 ‘화해’의 봉사자로서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있다.

[5] 정의의 소리, 비탄의 소리, 그리스도적 훈계

1970년대에 들어가서 그리스도교의 대 정부 마찰이 심해짐에 따라 김 박사의 모든 관심은 기장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와 민주화라는 데 쏠렸던 것 같다. 1970년 9월에 창간한 「제3일」은 매우 넓은 범위의 필진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실리는 글들은 시국에 대해서 한마디씩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실었다.

「제3일」의 신학적 경향을 김 박사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신학적 견해에 엄격성을 보유하려고 애쓴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캐나다로 떠나면서 편집을 내게 맡겨서 한동안 내가 일했지만, 관련된 사람들의 불평을 많이 샀다. 그때에 많이 활용된 신학이 몰트만의 신학이었다. 그때에 굽이친 한국교회의 사상적 물결은 비상한 초급성을 띤 것이었고 「제3일」 잡지 자체도 무슨 항구적인 목표나 경제적 사상적 기반이 튼튼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항간에 떠도는 정의의 소리, 비탄의 소리, 그리스도적인 훈계의 소리 등이 그 안에 수록되고 인쇄되어 정당한 대금도 받지 못한 채 반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언론의 현상이었다. 이 「제3일」 지는 김 박사가 캐나다에 두 번째로 가셔서 다시 돌아올 희망이 적은 1974년쯤 폐간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재준 박사는 목사요, 신학교수요, 교회목회자이며, 또 한국교단의 정신적 지도자요, 신학대학 학장이며 그리스도교 문필의 개척자였다. 그분의 따뜻한 목회자적인 심정과 많은 교계의 인사들과의 친분이 편지해 주듯이 남의 일을 잘 돌봐주시고 언제나 와서 강연과 예배를 인도해 달라며 사양치 않고 응해주시는 분이었다. 더욱이 학생들의 소그룹이 청하더라도 사양치 않고 가서 강연을 해주셨다. 어떤 때에는 결혼식에 오시기로 약속되었는데 가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날 아침에 아무 연락이 없어서 아마 연기되었나 싶어 못 가셨다고 들었다. 우리가 그분을 회상하는 것은 그가 만능의 지도자라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공로로 기억해야 할 것은 교권시대의 권위와 조직체가 다수라는 힘으로 신학의 표현을 통제하고 신앙고백을 위협할 때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타당성을 증언하여 신앙과 신학의 자유를 실천, 확보한 일이겠다. 그 다음으로 열거할 것은 그는 그리스도교 문필의 개척자요, 그 모범을 보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의 많은 분량의 글은 언제나 분출하는 심령의 샘과 같이, 일생의 전폭에 걸쳐 쉬지 않고 쓰신 것이다. 그는 캐나다에 가서도 「제3일」 지를 속간하고 많은 글을 남겼고 마지막 귀국 후에도 많이 쓰셨다.

우리는 그의 생애와 글들을 이 같은 의미에서 거듭 읽고 음미해야 하겠다. 그러나 신학이 수립되기 위해서는 이런 원심력 외에 구심력과 배타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이치를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김 박사는 성서본문을 사랑하여 성서 개설과 성서 주석을 썼다. 칼빈의 신학을 가르치셨고 칼빈의 전통을 사랑했다. 또 개혁교회의 정신을 배우는데 힘썼으며 바르트 신학을 늘 추천하였다. 또한 기장 교회가 ‘장로교회’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장로연맹’을 결성하기를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