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7일 화요일

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를 아십니까?

1)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찍이 민족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민족이라는 단어에 교회교단을 대입하면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와 교단이 든든한 바위 위에 세워졌는지, 모래 위에 세워졌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의 교회와 교단은 무엇에 기초하여 세워져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당연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기에 거론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나아가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그 교단에 속한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 신앙고백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어떤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어떤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교회를 섬겼을까?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회자들을 배출한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 전신)는 어떤 학교였는가? 이런 질문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당연하게 장공 김재준 목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 전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장공 김재준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한국기독교장로회, 한신대학교의 출발과 장공 김재준
 
1953,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기독교계는 내부 분열의 조짐이 있었다. 그 내부 분열의 결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탄생했으며, 그 내부 분열의 중심에 장공 김재준 목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목사직 면직이라는 초강수를 던진 교단의 불법적 조치에 항거하여 반기를 들고 새롭게 출발한 교단(한국기독교장로회)은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나름 장로교의 전통을 올바르게 세우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장공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출발했고, 신학적 바탕으로는 한신대학이 있었기에 우리는 한신대학교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신대학교는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적인 후원과 함께 만우 송창근 목사가 당시 만주에 있던 김재준 목사를 추천해서 불러들였고, 김재준 목사가 실무적인 일을 담당해서 1940년에 세워진 학교이다.

[사진-001] 조선신학교 교직원들과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어느 한 사람의 주도하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목회자들이 합력해서 세운 교단이었으며, 한신대학교 역시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세운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집합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장공 김재준 목사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우 송창근 목사는 일찍이 장공 김재준 목사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를 깨운 선각자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가 송창근 목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후의 장공 김재준은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의 한신과 기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꽤 설득이 있을 정도로 장공에게 있어서 만우의 존재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아쉬운 것은 만우가 남북전쟁 당시에 납북이 되면서 더 이상 송창근 목사의 비전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우가 꿈꿨던 학교에 대한 이상은 이후 장공,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 장공 김재준
 
장공 김재준 목사는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야인이 되어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투쟁이 아니라 옳은 것옳다고 외치는 예언자적 참여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러한 김재준 목사에게 정치적 야심이나 권모술수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재야 세력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사진-002] 민주화 운동 동지(계훈제장준하함석헌이병린)들과 함께

박정희의 권력에 대한 야욕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유신 철권 통치에 접어들면서, 김재준 목사는 캐나다로 자리를 옮겨서 북미주 민주화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수시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재준 목사가 캐나다에 이주한 시점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해외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를 통해서 북미주 민주화 운동은 하나로 뭉칠 수가 있었고, 조직적인 민주화 운동을 추진할 수가 있었다.
 
[사진-003] - 해외 민주화 운동 시절 장공

거의 10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장공은 이미 80이 넘은 노인이었다. 이제는 편안하게 인생의 마무리를 즐길 법도 하지만, 김재준 목사는 귀국한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역사의 해로 기록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국민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함석헌 선생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4) 장공 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凡庸記)
 
김재준 목사는 캐나다 체류 기간(1974~1983) 중에 자신의 자서전인 범용기(凡庸記)를 여섯 권으로 묶어 발간하였다. 귀국한 이후에 발간된 범용기속편 격인 귀국 직후고토를 걷다를 포함하면 총 8권의 자서전을 남긴 것이다.
 
한 개인의 삶이지만 그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혼란기, 이승만과 419, 5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 정권, 518과 전두환 정권을 경험하면서 남긴 범용기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시대의 양심적인 지식인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長空 김재준의 삶과 신학이라는 책에서는 범용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범용기(凡庸記)는 김재준 목사의 자서전이다. 특별한 것은 평범한 것에 있다. 김재준 목사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였다. 그의 글도 담백할 뿐이다. 자기 자랑이나 허식이 없다. 수수한 질그릇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보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다(고후 4:7). 그릇은 크기나 재질로 평가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것으로 평가한다. 김재준은 자신을 범용이란 질그릇으로 보았지만, 역사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큰 그릇으로 평가한다.

범용기는 김재준의 개인 자서전이면서도 한국 교회사와 격동하는 민족사를 담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담고 있다. 짧고 평이한 문장과 글 속에 김재준의 인격과 신앙, 그리고 꿈이 녹아 있다. 그의 글은 살아 있는 글이다. 따뜻한 글이다. 읽는 이의 영혼을 설레게 하는 글이다.
 
범용기의 가치는 교단 외부의 민주화 운동 인사들도 인정하고 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범용기는 상당한 영감을 던져준 것이 사실이다. 1세대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한승헌 변호사는 전북일보에 발표한 칼럼(2003)에서 학창 밖의 스승, 김재준 목사님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는 목사님께서 주간(主幹)을 맡아서 내시던 동인잡지 3과 자전적인 범용기(凡庸記)를 나의 빈 머리의 충전용으로 열심히 읽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집필한 자서전 백범일지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1차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장공 김재준의 범용기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과 한신대학교,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범용기는 나름 북미주와 해외에서 활동하던 민주 운동의 기록으로서도 소중한 자료가 된다.


특별히 장공 자신이 제3권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이 북미주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함께 활동했던 민주 운동의 기록으로서도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오늘날 범용기가 장공 김재준 목사의 자서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쉽게도 많지 않다. 알고 있더라도, 범용기를 읽기 위해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물론 범용기1992년에 발간된 장공전집(18)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981~1983년 사이에 캐나다에서 발간된 범용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오탈자가 많이 발견되어서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다.
 
5) 범용기복원(?)을 위하여
 
한신대학교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장공을 연구하지 않으면 그 누가 연구할 것인가? 한신과 기장은 장공과 함께 앞에서 언급한 만우 송창근을 비롯한 많은 신앙적인 어른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교단에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신앙의 스승들을 이렇게 홀대한다면 단재 신채호가 경고했듯이, “우리 교단에게 미래는 없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추후 장공 김재준에 대해 연구하려는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범용기는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장공의 자서전인 범용기는 장공 자신이 발표한 글과 함께 장공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우선적으로 김재준 목사의 자서전인 범용기를 복원시키는 작업을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첫째 우선적으로 처음 출간된 범용기자체에서 발견되는 오탈자와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는 용어의 문제이다. 김재준 목사가 자서전을 집필할 당시에 사용하던 용어와 고유명사가 오늘날에는 많이 변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특히 외래어 표기가 그렇다. 그리고 저자인 김재준 목사가 범용기1권의 편집 후기에서 솔직하게 필자 자신이 한글 철자법에 정확하지 못하고 신문사에서도 일일이 고쳐 쓸 시간과 부서가 없었기 때문에 철자가 시원치 못합니다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이것을 고려하면서 오탈자 및 현대에 공용하는 용어와 비교해야 한다.
 
만일 발간된 책 이전에 수기로 쓴 원본 자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귀중한 1차 자료이기 때문에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활자본으로 발간되는 과정에서 교정을 거치면서 2차 자료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둘째, 그러나 김재준 목사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문장투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것은 함경도 사투리적 표현일 수도 있는데, 김재준 목사 자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은 최대한 살려둬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 편을 의미하는 문장에서 김재준 목사는 누구 켠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김재준 목사는 범용기2권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범용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속어(俗語), ‘민중의 말을 쓰려고 힘썼다. 말하자면 한문음으로 된 우리말 보다도 밑바닥 토백이 말을 골랐다. 내 어휘가 얼마나 빈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의 작가들, 시인들, 그리고 언어학자들의 민속말 발굴과 새 말 지어내기 운동에 기대를 건다.”
 
6) 범용기복간에 대하여
 
오늘날 종이책의 가치가 이전보다 크게 하락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이책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 장공 김재준의 범용기를 종이책으로 복간한다는 것은 재정적인 부담도 있어서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2년에 발간한 장공전집범용기가 포함된 것으로 애써 위안을 삼고 있었다. 장공 김재준의 범용기는 일단 종이책으로서는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로 오늘에 이르렀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는 장공의 범용기가 세상에 빛을 본지 거의 40년이 되어가는 즈음에, 다시금 범용기를 복간하기 위한 시도를 추진하였다. 애초에 종이책으로 다시 제작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비용적인 부분이 발생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터넷 소규모 출판 시스템(POD)을 통해서 범용기를 복간하기로 하였다(인터넷 교보문고를 통해서 주문이 가능하고, 주문 후 일주일 정도 후에 종이책으로 배송된다).
 
[사진-004] 범용기』 복간판 표지 셈플

애초에 범용기를 복원하면서 내용에 대한 주해를 덧붙이려고 계획했지만, 우선적으로 1차 자료를 복원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복간되는 범용기는 기본적으로 캐나다에서 발간된 범용기자료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고유명사 및 현대에 공용된 용어, 그리고 누가보아도 오탈자가 분명한 부분을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현재의 계획으로는 10월 중순까지 범용기(1~6) 복간을 완성하려고 한다. 향후 김재준 목사의 저작에 대해서 보다 면밀한 검토를 통해서 김재준 목사의 글과 저작이 다시금 본래의 활기찬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이 범용기가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의 필독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