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129) 輓章文記(만장문기) - ‘하용’도 가고

[범용기 제5권] (129) 輓章文記(만장문기) - ‘하용’도 가고

1980년 1월 23일

N.Y.에 있는 증손녀 ‘명희’로부터 밤에 전화가 왔다. ‘신자’가 받고 내게 알리는 것이다.

“하용이 세상을 떠났다”고.

‘명희’는 당장 서울 갈 차비를 하노라 했다.

아직 어찌하여 그렇게 갑작스런 ‘비극’이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여기 네 집 식구들이 이 목사 집에 모여와 울다가 헤어졌다.

후에 두루 채근해 들은 얘기로는 하용은 미희병원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6조 방이 셋이나 된다는 텅하니 빈 방에 단 혼자 지냈다고 한다. 거기는 북해도가 가까운 추운 고장이고 눈 많이 오기로 유명하다.

그날에도 눈이 쏟아져 길이 막혔다. ‘하용’은 집 앞 눈을 쓸어내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집안도 싸늘하게 추웠을 것이다.

혼자 살림이라 음식이며 난장방치며를 알뜰하게 돌보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제 먹을 밥을 제가 끓이고 세잘 이부자리를 제손으로 펴고 거두고 하기란, 사내로서는 못할 짓이다.

그러기에 ‘과부’는 혼자서도 깔끔하게 잘 구려가지만, ‘홀애비’는 집 건사는커녕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못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하용’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외롭고 서글프고 싸늘하고 그리고 후회스러웠을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다가 눈 치노라고 과로도 겹쳤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출근 시간이 다 됐는데도 인기척이 없다. 옆집 동료들이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니 문을 뜯고 들어갔다. 하용은 자는 듯 고요히 단정하게 딴 세계로 옮겨갔더란다.

맏아들 ‘대성’과 맏사위가 와서 그곳 교회에서 정중한 영결식을 마치고 ‘화장’하여 ‘유해’를 서울에 모셨다.

1980년 1월 30일. 밤에 이상철 목사 집에서 토론토 가족들과 연합교회 장로님 몇 분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수유리 ‘관용’에게 전화했다. 관용의 장모가 전화를 받는다. 관용, 정희, 아이들 모두 하용 박사 장례식에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이 장례식 날인줄 알았다.

결국 토론토 식구들도 장례식에 참석한 것 같은 실감이 났다. ‘몸’으로 못가도 ‘영’으로 임재했다고 본다.

이제 하용이 내게 보낸 편지들 중에서 몇 구절씩 인용하련다. 읽어가노라면 저절로 그의 생활 정황이 마음의 은막에 영상되겠기 때문이다.

[제1신]

날짜 전후가 좀 바뀌었지만 그대로 적어 둔다. 인사 얘기는 생략한다.

저의 사는 곳은 해발 580미터 분지여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좋습니다. 서울 금호동 ‘민섭’이 결혼식에 참석못해 섭섭합니다. 대성의 결혼식은 10월에 하려 했었습니다만, 여러 가지로 준비가 덜 되어서 연기했습니다. 새해 들어 하려 합니다. 10월에 했더면 민섭이 결혼식에도 참석했었을걸 하고 후회합니다. 대성엄마(정옥)는 추우면 꼼짝 못하길래 따뜻한 고장으로 옮겼으면 합니다. 옆 高知縣南國市에 있는 신체장애아 병원에서 오라기에 그리로 가 있습니다. 일도 쉽고, 일이 없어도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되고, 식사는 식당에서 하고, 그것도 한달에 20일만 나오면 됩니다. 그래서 서울에도 무시로 왔다갔다 합니다.

서울 살림을 명순에게 맡겼더니 잘 되지 않았습니다. 5월에 나갔을 때, 분업식으로 살림 설계를 다시 짜서, 이애, 저에게 일을 나누어 맡겼었는데 그래도 잘 안됩니다. 그런 사정 때문에 대성(장남)의 결혼을 더 서두르게 됩니다. 결국 제 살림이니 착실하게 하리라 믿고 그리한 것입니다.

숙부님 귀국에 대해서는 저는 반대합니다 ‘基長’(기장)도 저는 안 믿습니다. 눈치보며 세력만 따르는 걸요! 5월에 서울 나갔을 때 ‘인용’이도 만나 밤새가며 얘기 듣고 하고 했습니다만 ‘기장’이고 예장이고 다들꼭 같은 사람들이더군요. 경동교회 ○목사는 학생들 보고 노골적으로 숙부님 비평을 하더랍니다. 인용이는 좋은 목사가 될 것 같았습니다. 바르고 똑똑했습니다.

(1976. 10. 25)舍侄 상서

[제2신]

대성엄마(정옥)는 대성 결혼식에 서울 나갔다가 병이 악화되어 억지로 식에 참석하고 곧 일본에 돌아왔습니다. 일본 와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대성 결혼식은 대성황이었습니다. 마포구 의사회원들이 모두 모였고 신부측에서도 많이 참석했었습니다. 신부 부친은 서울분이고 모친은 개성이랍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한 일주일 같이 있다가 왔습니다.

서울은 지하철 공사로 어수선한 것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도 달라진 데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일급 회사 간부급 친구와 점심하며 들은 대로는 모든 일에 방향은 아랑곳 없고 권력유지에만 분망한 것 같았습니다. 말도 함부로 할수 없고 사람들이 예외없이 정보원인 것 같았습니다. 몰고가는 방향에는 아무 전환이나 개선이 없었습니다.

숙부님 귀국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성의 결혼식 사진을 보내 드립니다.

숙부님, 숙모님 뵈러 간다고 초조할 정도로 염원합니다만, 여권 문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외국에서 번 돈으로 집에 다녀가는 것도 일년에 한번밖에 허락되지 않는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농촌이고 산골이어서 반찬거리 살데가 마땅찮습니다. 그래서 작년말에 제가 운전을 배웠습니다. 금년 초에 운전면허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차 타고 장보러 갑니다. 자주 소식 드리렵니다.

(1977. 8. 12. 舍侄 상서)

[제3신]

숙부모님 양위께서 안강하시고 그 밖에 식구들 잘 지내시는지요. 경용의 크리스마스 카아드 받았습니다. 세 번째 애기 출산 했다고요? 다 잘 크는지요. 저는 여전합니다.

대성이 엄마는 좀 더 따스한데로 옮기려 하는데 여의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곳 町長(정장)은 더 있어주기를 원합니다.

5월 12일에 ‘효성’이 결혼합니다. 서울서 명원이랑 이모랑 신랑의 어머니를 만나 서로 합의했고 본인들도 원한다기에 저는 한번 본일도 없는 놈이지만 모르고 반대할 수도 없고 해서 허락했습니다. 4월말에는 귀국해서 식을 치르고 오렵니다.

명희는 신랑이 레지던트 끝날때까지 근처에 있게 되나봐요. 명희 신랑은 너무 공부에 열심이어서 레지던트 최고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금호동 민섭이 2월 19일에 아들 나서 잘 큰다고 합니다.

(1978. 3. 28. 舍侄)

[제4신]

저는 78년 4월 27일에 대판에 가서 자고 28일에 서울 갔습니다. 서울 식구들 다 무사하고 민섭의 엄마도 비교적 건강이 좋아진 편이라 했습니다.

5월 12일에 코레아나 호텔에서 효성의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서울 떠난지가 3년이 됐는데도 하객이 제법 많았습니다.

관용이네 아이들 작년보다 무척 자랐어요. 결혼식장에는 민섭 엄마도 왔었구요. 그만큼 건강이 좋아진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서울은 도로포장, 지하철 공사 등으로 파고 헐고 어수선했습니다. ‘박’은 죽어도 권력은 안 놓을 작정이라고 합니다.

서울은 부산하고 안정감이 없고 물가는 굉장히 올라서 예정보다 비용도 훨씬 더 들었습니다.

‘김성식’ 선생님을 모시고 중학 동창 몇 명이 저녁식사를 나눴습니다. 김성식 선생을 비롯하여 모인 분 모두들 숙부님 귀국은 절대 반대였습니다. 일본에도 오시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리더군요. 조련계 선전재료가 될 수도 있고, 미쳐서 망령 부리는 ‘박’이 무슨 짓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J.P.와 J의 참모들은 각 기관에서 제거됐다고 합니다.

효성의 시아버지는 함흥 출생이며 해운회사 사장이라고 합니다만 돈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신랑은 회사에 다닌답니다.

저희들이 한다니 모두 제 복으로 살겠지 합니다. 여기서는 제가 계속 여기 있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대우도 안좋고 해서 다른 데로 옮길까 합니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6월이나 7월에 가서 담당자와 정식으로 교섭하려 합니다.

(1978. 8. 12. 舍侄 상)

[제5신]

숙부모님 양위께서 건강하시고 이 목사 딸들 다 결혼했는지요. 은용, 경용, 혜원네 식구들도 여전 무고 하시다니 다행한 일입니다.

저는 11월부터 美山病院(미산병원) 分院(분원)인 미희병원(美希病院)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퍽 추울 것 같습니다만, 이곳보다 덜 춥답니다. 평야여서 고산지대 보다 천식에는 좋을 것 같습니다. 미산병원에는 제가 평양 기독병원에 있을 때 내과에 계시던 선배가 계시고, 세브란스 시절에 정형외과에서 교수하시던 저의 3년 선배 되는 분이 원장이고 주택도 세집이 가지런히 있어서 적적하지 않습니다. 지금 법무성에서 허가나오기를 기다리는데 허가는 11월 초에 나온다고 합니다.

대성이 엄마는 서울서 보다는 많이 나은 편이어서 당분간은 일본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방 인사들은 기어코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만 처의 병 때문이라고 하니 더 말을 못합니다.

대성의 처(英淑)가 9월 14일에 여아를 순산했습니다. ‘하련’(河蓮)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관용이는 미국에 이주할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가고 싶어도 정보부에서 여전히 허락하지 않을 방침이라더군요. 저는 아이들에게 좀더 넓은 세상에 가서 살아보고 오고 싶으면 오라고 합니다만, 아이들 반응이 없습니다.

8월 중수에 전근 수속을 시작하렵니다. 주부생 선배님도 岩手(이와더) 근처에 계신다고 합니다. 이사하는 대로 다시 상서하겠습니다. 餘不備上書(여불비상서)

(1978. 10. 하용 드림)

[제6신]

숙부님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1978. 11. 11일에 떠나서 12일에 ‘미희병원’에 도착하여 출근합니다. 160병상입니다. 일도 힘들지 않고 편합니다.

수일전에 $500 송금했습니다. 숙부님 양위께서 겨울 내복이라도 한 벌씩 사 입으시기 바랍니다.

민섭이 엄마는 봄에 갔을 때 건강의 의외로 좋았기에 다음에 또 만날줄로 믿었사옵는데 그 후에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져서 어쩔 수 없다고 신의사에게서 편지 왔습니다.

이곳 병원 안과에 저의 동기생으로 기독병원에서 인턴도 같이 한 친구가 와 있어서 적적하지 않게 됐습니다.

성탄과 새해에 만복 하옵소서.

(1978. 12. 18. 하용 드림)

[제7신]

숙부님 편지 반갑게 읽었습니다. 수유리 식구들 다 잘 있다고 합니다.

전번 서울 갔을 때 관용이 바쁘기만 하고 형제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안 돼서 위로하느라고 양복 한 벌 해 주고 왔습니다.

대성이는 5월부터 세브란스 외과에서 인턴 근무중입니다.

대성모는 4월부터 더 나빠져서 5월 들어서는 출근 안하고 집에서 쉽니다. 병세가 전보다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저의 병원에 동경서 매달 두 번씩 오는 의사가 있는데 한번 특별 검사를 부탁할까 합니다. 조금만 기동하면 발작이 생깁니다. 계절이 바뀌면 좋아질까 하고 희망적 기대를 걸어봅니다.

4월 중순부터는 발작이 잦고, 기침이 심하고 천식도 더해집니다. 병원에서는 의사 일은 내가 맡고 정옥은 직원으로 하여 앉아만 있으라고 합니다. 자기 손으로 주사할 수도 있답니다. 그래서 입원시키자고 해도 자기가 싫다고 합니다. 신경질만 늘어갑니다. 심할 때에는 하루 3-4회 주사할 때도 있습니다. 일본 오시는 것은 형편 보아 다시 결정하기로 하겠습니다.

모처럼 오신다고 하셨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어서 숙부님께서 서운해 하실까 염려됩니다.

(1978. 12. 18. 하용 드림)

[제8신]

숙부님, 숙모님 안녕하시고 캐나다 식구들 모두 잘 계시는지요. 저는 79. 2. 28에 서울 갔다가 3월 14일에 돌아왔습니다.

서울 식구들 모두 잘 지냅니다. 아이들은 너무 커서 잘 몰라볼 정도였습니다. 서울에는 사람도 많고, 공사도 많고, 먼지도 많고 모두 들뜬 것 같았습니다.

관용이네 수유리집 사정은 숙부님이 꼭 오셔야 해결될 사정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서울 가서 여러분들 만나 이야기 들어보면 숙부님이 귀국하셔도 별일 없을거라고는 하면서도 활동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KCIA 간부와의 언약으로서는 오셔도 좋다고 했었는데 그 사람이 전근되어 중단됐다는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최고위층의 공적인 방침이 아니라 KCIA에 근무하는 어떤 개인과의 언약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속임수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단정은 못하나 그럴 것 같지는 않다’면서, 결국 최후 결정은 숙부님이 하실 수 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으로서는 ‘결과가 좋으면 내덕이고 안좋으면 조상탓’이라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압력을 늦추고 추어주기 때문에 ‘박’이 자신이 생겨서 공포정책을 조금 완화시키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저도 그건 그럴 듯 하다고 인정합니다.

현재도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등이 얼마 자유롭게 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정치활동은 여전히 봉쇄되고 있습니다. 숙부님도 소문없이 갑작스레 오셔서 정치활동에 관여함 없이 집에서 저작에 전념하시면 그들은 오히려 좋아 할거라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서는 숙부님께서 캐나다에 계시든, 귀국하시든 간에 저작에 전념하셔서 좋은 원고 주시면 저희가 출판하도록 노력할까 합니다. 이 생각은 오래전부터 대성 엄마와도 얘기했고 서울 갔을 때 신의사와 그 밖에 제가 만나는 여러분과 얘기했더니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저더러 숙부님께도 권하라고 하더군요. 정치운동은 정치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숙부님은 글을 많이 써 주셨으면 하고 저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미국 대통령이 다녀가면 사정이 좀 달라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때 또 편지 드리겠습니다.

김성식 선생님과도 의논했습니다. 그 선생님 말씀은 숙부님이 귀국하시면 어떤 그룹에서 앞장으로 내세우려고 할지도 모른다면서 저의 생각에 찬성하셨습니다.

(1979. 3. 25. 효성 상서)

[제9신]

이상철 목사 편지 반가웠습니다. 이 목사 학위 취득을 축하합니다.

숙부님 일본 오시면 수개월이라도 제가 숙부님을 모시고 지내고 싶습니다. 집도 6조방 셋이므로 그런대로 지낼 수 있습니다. 다만 대성 어미가 건강이 안 좋아서 감당못할 것 같다고 합니다. 4월 들어서부터 점점 나빠집니다. 숙부님께서 여기 와 계시면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경에는 上野(상야)까지 급행으로 5시간이면 됩니다.

이곳은 소도시여서 조용하고 좋습니다. 또 자주 상서하겠습니다.

(1979. 5. 17. 효성 상서)

[제10신]

숙부님 그간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에서 돌아오는대로 즉시 글월을 드리면서도 어쩐지 펜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대성모는 한때 좋아지기에 조금 안심하고 지냈습니다. 대성모는 3월초에 서울가서도 전보다 잘 돌아다니고 숨도 덜 가빠서 온 식구가 좋아했습니다. 7월 하순에 발작은 있었습니다만, 차로 두시간 가량 가는 온천에도 갔다오고 7월 29일에는 ‘세전’ 선배들 부인들과 점심식사도 같이 하고, 저녁에는 목욕하고 아이들에게 전화도 하고 여전했습니다.

7월 30일 아침에 발작이 생기길래 주사해 주고 병원에 가서 약을 갖고 왔습니다. 점심을 끓여주었더니 한그릇 다 먹고 괜찮다 했습니다. 점심후에 청량음료 사러 나가려니까 무엇무엇 사오라고 Shopping List를 일러주기에 자동차를 달려 급하게 사왔습니다. 15분쯤 걸렸습니다. 돌아와보니 의식이 없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5분가량 지나서 호흡이 완전 정지되었습니다.

병원에서 모두 주선해서 침례교회목사 집전으로 정중하게 장례식을 거행하고 화장하여 유골은 본국에 모셔갔습니다. 8월 4일에 일산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했습니다. 너무 허무하고 너무 아무 것도 못해보고 숨져서 후회랄지 섭섭하기 그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잊을 수 없군요. 집에 가니 대성이 매형들과 의논하여 모든 준비는 깔끔하게 잘 해 놓았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장사치루었습니다.

숙모님 뵌다고 항상 말하다가 못 뵙고 죽었습니다. 저는 귀국해도 다시 개업하기도 어렵고 아이들에도 짐이 될 것 같아서 우선 계약도 지킬 겸 이곳에서 혼자 지내렵니다. 앞 뒷 집에 선배님들이 계셔서 많이 위로가 됩니다. 미국 있는 명희네도 장례에 참석하노라고 애썼습니다. 후일에 다시 글월 올리겠습니다. 이만 난필로 줄입니다.

(1979. 9. 13. 侄 하용 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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