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128) 輓章文記(만장문기) - 河鏞(하용)과 貞玉(정옥)

[범용기 제5권] (128) 輓章文記(만장문기) - 河鏞(하용)과 貞玉(정옥)

‘하용’은 내 당조카고 송정옥은 조카 며느리다. 둘 다 의사다. 하용은 세브란스 출신이고 ‘정옥’은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 졸업생이다. 둘 다 의사 면허를 갖고 있다.

일제 말기에 우리 식구들은 청량리 역 뒤 언덕 새로 개척한 주택지인 전농동에 살았다.

바로 길 건너에 정옥 아가씨네 집이 있었기에 하용과 정옥은 자주 만나 친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밀어올리게 된 것이다.

하용 얘기는 ‘범용기’ 3권에서 얼마 언급됐기 때문에 중복되지 않는 정도에서 몇 가지 적어 두련다.

하용은 1917년에 함북 경흥의 창꼴집, 내가 나서 자란 바로 그 집에서 태어났다. 하용은 아마도 1917년 생일 것 같다. 아내 말대로 한다면, 자기가 시집왔을 때 하용은 첫돌이 갖 지나, 아장아장 걸음발 타는 아기였다고 한다. 눈에 넣어도 아리잖을 귀엽고 예쁜 아기였다는 것이다.

내가 1918년 8월에 결혼했고 결혼 하자마자 웅기 금융조합 서기로 취직해 가고 17세 밖에 안되는 신부인 아내는 창꼴집에 있었는데 그때 하용이 첫돌 갖 지난 아기였다면 바로 그 전 해인 1917년에 났을 것이다.

그때에는 ‘산아제한’이란 ‘언어’도 없었으니만큼 내 형수님은 다산(多産)이었다. 잘 길르지도 못하는 아이들 휴식없이 잉태하였다. 내 알기에도 셋인가 넷을 나자마자 잃었다. 그러면 형님이 작은 궤짝에 넣어 등에지고 나가 뒷산 어느 기슭에 묻는다. 아무 표적도 없다.

그런 처지였으니 형수님이 하용을 알뜰살뜰 보살필 여지가 없었을 것은 사실이겠다.

나는 웅기엔가 가 있고, 창꼴집에서 혼자 외로운 신부는 하용을 귀여워하며 모성애의 본능을 애무했다.

내가 웅기 3년, 서울 3년을 지내고 창꼴집에 돌아왔을 때 하용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이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하용을 불러 앉히고 ‘천자문’(千字, 또는 自首文)을 가르치신다.

하늘 천(天) 따지(地) 가물현(玄) 누루황(黃)하고 글짜를 따지며 읽으신다. 하용은 듣는 척 만척 반응이 없다. 그리고서는 밖에 나가 장난을 한다. 이튿날 아침에 할아버지 앞에서 강(講)을 바쳐야 한다. 책 안보고 암송을 하는 것이다.

‘암송’은 청산유수다. 아무리 많이씩 가르쳐도 ‘강’에 막히는 일은 없었다 한다. 할아버지는 통감을 가르치셨다.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줄줄 흐른다.

내가 서울서 돌아왔을 때 하용은 ‘통감’을 읽고 있다. 한 장이고 두 장이고 단번에 외워 버렸다. 나도 둔재는 아닌 것으로 자부했었는데 하용은 내 정도가 아니라고 느꼈다. ‘글’ 읽기를 일종의 Joke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루는 내가 ‘농방’(의복, 책, 도구 등속을 넣는 궤짝 쌓아두는 방)에 들어갔더니 꼬마 하용이 거기서 ‘통감’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꼬마는 느닷없이 묻는다.

“아재씨, 아재씨도 이런 걸 배왔어요? 이 따윗걸 배워서 뭘해요?”

할아버지께서 가르치시니 배우는 척 하는 거지요! 배우면서도 웃음이 나와요!

‘우수개’로 배우는 거지요. 할아버지는 내가 ‘강’을 잘 바친다고 좋아하세요. 그걸 보면 또 우스워져요. 아재씨 나 이런거 싫어요. 아재씨가 서울서 배운 걸 가르쳐 주세요.

그래서 나는 보통학교(국민학교) 교과서들을 얻어다가 몇 주일 동안에 다 가르쳤다. 하용에게도 그따윗건 식은 죽 먹기였다.

1932년 내가 미국서 돌아왔을 때 하용은 열한살인가 열두살인가 되어 있었다. 내가 평양 숭인상업학교에 취직하고 창꼴집에 있던 내 식구를 평양에 데려올 때 하용도 같이 왔다. 그래서 숭덕소학교 5학년에 편입시험을 쳤다. 최고 득점으로 입학했다. 그래서 숭실중학교 의전에 입학했던 것이다. 세브란스를 마치고 평양 기독병원에서 인턴 코스를 끝내고 세브란스 의대에서 의사면허를 받았다. 총독부 의사시험에도 대번에 합격되었다. 그리고서 서울 서대문안 적십자 병원 내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연구를 계속, 세브란스 의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송정옥 양은 혜화동에 있는 ‘경성여의전’을 마치고 의사면허를 받았다. 그리고 하용과 약혼했지만,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조선 역사를 예화로 얘기했다는 혐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다가 여섯달만에 풀려나왔다. 영장도 재판도 없는 소위 “예비검속”이었다.

하용은 몇해고 몇십년이고 기다리겠노라 했다. 그런데 6개월만에 나왔길래 나는 부랴부랴 결혼식을 서둘렀다.

하용은 신촌서 개업했지만 돈벌이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다. 환자는 늘 붐비는 축이었지만 돈은 벌어지지 않았다. 치료비고 약값이고 거의 실비 정도였기 때문이다. 정옥도 의사지만 아들 다섯, 딸 둘 7남매 치다꺼리에 여념이 없었다. 이엄이엄 자라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간다. 소학교는 의무교육이라지만 말만이고 비용은 들대로 든다.

정옥은 맘성이 비단결같다. 제가 손해 봐도 남에게 맺힐 일은 못한다.

자기가 의사면서도 병원일을 돕지 못하니 늘 남편에게서 돈달라기가 미안해진다. 만성기관지염이 ‘천식’으로 상승한다. 돈이 무척 아수하다.

남편 몰래 ‘계’에 들었다. 계는 주로 ‘유한매담’들이 하는 일이다.

‘유한매담’이란, 남편이 출세하여 돈 잘버는 집 ‘귀부인’들이다. 사치스럽다. 끼리끼리 ‘가정 무도회’를 연다. ‘땐스파티’다. 그러니만큼 인간 관계가 매끄럽고, 순진한 사람이 이용당한다.

그들은 감언이설로 ‘정옥’을 설득한다. 유명한 개업의사님 사모님인데 ‘계주’가 되야 한다고 치켜 올린다. 그리고 그 달 ‘계돈’을 정옥에게 준다. 상당한 목돈이다. 정옥은 그 돈으로 아이들 교육비에 쓴다. 다음달부터는 물어야 할 계돈 액수가 는다. 그래서 또 빚을 낸다. 빚이 100만원 선을 돌파했다. 결국 남편이 알게 됐다. 계꾼 ‘귀부인’들이 하용 의사에게 내라고 졸랐기 때문이다.

하용은 골이 났다. ‘부부 싸움’이라지만 정옥은 무저항이니 신날 것도 없어서 한 시간 안에 ‘종전’된다. 결국 하용은 100만원을 떠메고, 월부로 물어 청산했다.

일본에서 ‘공의’로 초청해 왔다. 도시에는 많은 의사가 몰려 있지만 지방에 가려는 의사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사를 청해가는 것이었다. 의료국영제여서 대우도 좋은 편이었다.

하용은 일본 사국(四國)의 고산지대에 공의로 갔다. 고산지대여서 공기도 좋았다. 하용은 워낙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지방인들에게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정옥’도 의사기 때문에 딴 고장에 ‘공의’로 파송되어 역시 존경과 대접을 받으며 일했다. 고원지대에서 기관지 질환도 많이 나았다고 하용은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도 첫 시작의 기분에 지나지 않았다. 높은 지대라 추워서 안좋았다. 그래도 의사일은 바빴던 모양이다. 딸에 ‘효성’이 나와서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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