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127) 輓章文記(만장문기) - 정자에게

[범용기 제5권] (127) 輓章文記(만장문기) - 정자에게

정자야

네가 78년 11월 14일 오전 8시에 서울 금호동 네 집에서 저쪽 세상으로 이사간지도 벌써 만 4년이 지났구나!

그 동안에 편지 한 장 못 써 보냈으니 네 마음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니! 외롭기도 했을거다.

너는 네 어미 태에 맺힌 첫 생명의 열매였다.

네 아빠는 쓰게 공부도 못하면서 ‘유학’이란 구실로 서울에서 3년 세월을 지냈다. 그동안 네 어미는 큰집에서 어느 장정 못잖게 김 매고, 삼 삼고, 베 짜고 물 긷고, 소먹이고 빨래하고 ‘석마’찌었다. 석마란 것은 큰 바윗돌을 다듬어 만든 연자마다. 이 연자메는 소나 당나귀 아니고서는 돌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 편리가 없을 때에는 아낙네들 만이서 발방아를 찌어야 한다. 돼지도 길러야 한다. 휴식없는 중노동이다. 거기다가 ‘대가족’이다. 시누이 셋은 나이차서 타성 집에 시집갔지만, 그 대신 조카들이 그 자리를 메꾼다. 여전히 열명 가까운 식구다.

아버님이 둘째 아드님이시니, ‘종가’는 아니다. 큰 댁에서는 5대조까지 가묘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그 밖에 어른들 생일, 환갑, 손곤들의 혼사, 유련하는 과객들 때접, 사랑채에는 언제나 연객(宴客)이 호걸스러웠다. 술상과 간단한 안주가 좌석 한 가운데 놓여 있어야 한다. 그래서 큰 댁 안식구들은 더 바쁘게 돌아간다. 관ㆍ혼ㆍ상ㆍ제 때에는 곁집 식구들도 다 모여 ‘큰집’ 잔치를 거들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처럼 ‘기성품’ 음식 사울데는 없으니 돼지 잡는다. 떡 친다. 지지미 붙인다. 모두 Home made다. 온 집안이 난리다. 그래도 아이들은 ‘제세상’이라고 좋아 날뛴다. ‘상사’고 ‘제사’고 없다. 그들에게는 통털어 Festival이다.

너의 어머니는 비교적 갖들어온 새댁 축이지만, 언제나 섞여서 말없이 부지런히 일했다. 집안끼리지만, 아낙네들이 모이면 말이 많다. ‘까십’이 돈다. 남의 흉도 나온다. 크게 악의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다. 얘기꺼리 없으니 언짢은 얘기라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엄마가 구설에 올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부산’하고 바쁘다가도 ‘대사’(大事)가 끝나면 모두 자기들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거기는 남편이 있고 애기가 있고 각기 딴 침실이 있다. 그러나 너희 어머니는 외톨이다. 텅 빈 방에 혼자다. ‘독수공방’(獨守空房)이다. 외롭고 서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런 내색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내게도 일언반구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3년만에 나는 옛 집에 돌아왔다. 개천 건너 10리, 귀낙동에 소학교를 열고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에 몰두해서 ‘가정’이란 것도 염두에 없었다. 학교일은 무료봉사다. 그러다가 2년 후에 ‘신아산 소학교’로 옮겼다. 거기서는 월급도 제대로 준다. 그 당시 신아산 금융조합 서기로 있던, 경원사람, 김낙현 부부와 합작하여 어느 기와집 한 채를 세냈다. ‘창꼴집’ 어른들은 “이제부터는 네 아내 데려다가 네 살림을 해라”하고 아내를 신아산에 밀어 보냈다. 괴나리 봇짐 한 꾸레미 이고 네 엄마는 왔었다. 낙현 부부는 안방 넓은 데 있고 나는 좁디좁은 부엌방에서 네 엄마와 함께 산다. 그래도 가맛목이라 장판은 화끈 달도록 따스했다.

정자야! 너는 거기서 네 어미 ‘배’에 찾아든 것이다. 네 어미는 워낙 몸이 건강하니까 첫 애기 선다해도 ‘임신부’란 티가 없었다.

아홉달쯤 지나 네 어미가 만삭이 될 무렵에 네 아빠는 일본 동경으로 뛰었다. ‘신아산’에서 여비 마련이 됐기 때문에 덮어놓고 가는 것이었다.

엄마는 또 입던 옷가지랑 싸이고 아빠와 둘이서 걷는 것이다. 할 얘기는 지난 밤에 다 했기에 오늘은 말도 없다. 창꼴집에는 알리지도 않았다. 떠나는 길에 들러 갈 생각도 없었다. 들리면 또 성가실 거니까, 출정군인 같이 가는 것이다. 20리 걸어 ‘아오지’ 읍을 지났다. 눈 앞에 자그마한 벌판이 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가면 꽤 높은 언덕이 엇갈려서 길이 숨는다. 그것이 ‘웅기’가는 길이다. 그 길목에서 회암동 가는 길이 갈라진다. 너희 엄마는 회암동 본가집에 가는 것이다. 한 10리 걸어야 한다. 만삭된 배를 안고 짐이고 혼자 간다.

“우리 서로 뒤 돌아보지 말고 곧장 가기만 합시다”하고 나는 말했었다.

너희 엄마는 울음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잘 참았다.

정자야! 너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별’이 무엇임을 알았을 거다.

너희 아빠는 어쨌든 동경에를 갔더니라. 동경역에 내리고 돈이 5원 몇십전 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야말로 ‘벽’을 ‘문’이라 치고 밀어대서 3년만에 청산학원 신학과 전문부 졸업까지 올라갔으니까. 졸업반 하기방학 때 3년만에 ‘고향’에 찾아갔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편지 한 장 편지답게 써 보낸 일이 없으니 이번에도 온다간다 말없이 지금 오는 것이다.

길의 코오스로 본다면 ‘아오지’읍에서 회암동 너희 외가집에 들리는 것이 순서라 하겠다. ‘창꼴집’은 거기서 또 10리를 가야 한다. 아빠는 너희 외가집에 들렀다. 너희 외조모, 외삼촌들이 모두 반가와했다. 너희 외할머니는 비교적 젊은이다. 내 형수님 나이 또래라 하겠다.

3년전 내가 만삭된 아내에게 짐까지 이워 혼자 본가에 가게 한 박정(薄情)스러움이 가슴에 맺히도록 노여웠던 모양이다. 나를 만나자마자 장모님은 노여움이 폭발점 변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눈치 챈 네 외삼촌들이 어머니를 타이른다. “어머니가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우리 매부님이 그런 것쯤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큰 일을 앞에 두고 그럴 수밖에 없어거 그런 것이 아닙니까? 어머니는 아무 말씀 마시고 매부님 대접이나 기껏 잘 해 드리십시요!”

내 장모님도 잠잠하셨다.

“그래, 내가 무얼 아니!”

너희 엄마는 창꼴집에 가 있어서 여기는 없었다. 너희 외할아버지도 어디론가 외출중이었다.

나는 창꼴집에 갔다. 너희 큰어머니가 부엌에서 달려나와 못 견디게 반가와 하신다. 너희 엄마도 뒤에서 빙그레 미소 띄워 맞이한다. 너희 큰어머니 식구가 부엌방에 거처하고 너희 엄마는 애기 데리고 커다란 안방에서 지내는 것 같았다.

정자야 그때 네가 두 살인가 세 살 밖에 안되었다. 드불게 보는 예쁜 아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에 ‘애비’ 구실을 못했다. 근엄한 유교의 생활풍습은 자연스런 인정의 통로를 경화시킨다. 아이들은 엄하게 굴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른들 앞에서 제 아기를 안고 엉석 받아주는 것은 ‘꼴불견’이라고 정해져 있었다. 네 엄마는 내가 너를 안아주지 않는다고 골이나서 거칠어진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면 몰라도 오랜만에 집에 와서 첫 아이를 처음 보면서 품에 한번 안아도 안보는 아빠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그래도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거기다가 순회전도 한답시고 두만강가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하기방학도 거의 다 지나가 버렸다.

1929년엔가 청산학원을 졸업이라고 했다. 그리고서는 미국에로 뛰었다. 미국서 4년을 지내고 1932년에 돌아왔다. 네 엄마는 여전하게 창꼴집에서 제 힘으로 제 밥먹는 농녀(農女)로 사는 것이었다. 미국 유학 마치고 ‘금의 환향’(?)했다고 동리 청년들이 모여 강연회를 연다고 했다. 강연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미국 여행담이고 속살 넣은 ‘강연’은 아니었다. 진자 강연할 성질의 고향도 아니었다.

너희 아빠는 평양에로 갔다. 숭인상업학교에 교사로 취직했다. 얼마 후에 너희 엄마와 네 동생 신자를 평양에 데려왔다. 그때 너는 7살인가였고 ‘신자’는 5살인가 였던 것 같다. 다음 해에 혜원이 났다.

1936년(?) 일본 군벌이 만주 먹고 중국 본토마저 삼키려 들 때였다. 학교에도 교회에도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다. 너희 아빠는 신사참배가 싫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학교일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미국 있을 때 남달리 친하게 지냈던 ‘피쯔벅’의 촬스ㆍ리ㆍ로이 동지가 한달에 16불씩 보내주어서 너희에게 하루 죽 한그릇씩이라도 먹일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감사한다.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신사참배’냐 ‘귀국’이냐 둘 중에 택하라 한다. 선교사들은 귀국을 택했다. 따라서 숭실중ㆍ고등학교, 평양신학교 등에 관계하던 선교사들은 학교 문을 닫고 귀국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물론 행동을 같이 했다.

숭실 전문학교 교장이던 ‘마우리’ 박사는 ‘숭전’과 운명을 같이 한다면서 남아 있었다. 당국에서는 강제로 폐문조치를 취하기 전에 내 손으로 학교 문을 닫을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미국 선교사들 중에서 오직 하나, 나의 Western 신학교 동문이었다. 물론 까마득한 선배지만.

하루는 그가 내 집에 찾아왔다. 취직할 생각이 없느냐? 나는 취직자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만주의 간도 용정에 캐나다 선교부에서 경영하는 ‘은진중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교목 겸 교사로 한 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가겠느냐?”, “간다”, “그럼 떠나라! 여비는 자담이다.” 교섭은 10분도 못되어 끝났다. 그래서 부랴부랴 떠났다. 그때 너희 엄마는 또 만삭이었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갈데가 마땅찮으면 창꼴집에 모이는 것이다. 그때에는 창꼴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너희 큰아버지, 큰어머니, 조카들 모두 한집에서 사는 즐거운 한 식구였다. 너희 엄마는 거기서 네 남동생 은용이를 낳았다. 손녀만 셋이다가 처음으로 손주가 났다고 할머니는 즐거워 하늘에 오를 것 같았단다. 너희 엄마도 자랑스러웠노라고 했다.

얼마 정양하고 용정엘 갔다. 나는 혼자 먼저 가고 거처를 마련하고 살림 준비도 했다. 그리고 창꼴집에 가서 너희 엄마와 너와 신자와 갖난 은용이를 올망졸망 이끌고 ‘호지 땅’인 용정에 간다. 할머니는 아이를 등에 업고, 종종걸음으로 재재거리며 따라서는 혜원이를 손잡고 멀리까지 따라 나오시다가 너희 엄마에게 아이를 내여주고 혜원을 내게 맞기고 말없이 안보일 때까지 서 계셨다. (1862. 12. 1 – 1936. 8. 10. 향년 75세)

너는 용정에서 탈 없이 잘 자랐다. 명신 여자 소학교를 마치고 고등과 2학년까지 거기서 공부했다. 너는 키가 훤칠하고 운동경기에도 선수급이었다. 일본 군벌은 중국에 진출했다. 은진학교 교장인 부르스 선교사를 ‘스파이’로 몬다. 기독교 교육을 금지한다. 체조시간에는 현역 장교가 와서 군사훈련을 한다. 거기에 내응하는 교사가 생긴다.

어느 비오는 날 너희 아빠는 혼자서 서울을 향해 떠났다. 엄마는 너희들 데리고 용정에 남아 있다.

1939년이다. 너희 아빠는 서울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기금을 낸 설립자란 말이 아니다. 당초 설립시무부터 맡아 했다는 말이다.

얼마 후에 너와 신자와 은용과 경용이 올망종람 서울에 왔다. 그래서 너는 정신여고 2학년에 들어가서 졸업까지 했던 것이다. 너는 간도에서부터 ‘축농증’ 때문에 고생했었지만, 네 사촌 오빠 ‘하용’ 의사의 주선으로 세브란스에서 수술하고 완치되었더니라. 너는 정신여고를 졸업했지만 들어갈 대학교는 없었다.

총독부에서는 취직하든지 결혼하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사람은 여자 ‘정신대’로 전쟁터에 나가라고 했다. ‘정신대’란 것은 출정 일본 군인들에게 몸 내주는 여자를 의미한다. 정자, 너는 그때 18세, 한참 예뻐질 때였다. 어느 ‘회사’라는데 취직이라고 했다. 일종의 가내공업 정도였다. 주인이란 자는 젊은 놈팽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주인 눈치가 이상하다면서, 그만두고 왔노라 한다. 이제 남은 길은 결혼 밖에 없다.

내가 ‘은진’에서 가르친 후배로서 머리 좋고 인품 좋고, 신앙 좋고 믿음직한 젊은이가 하나 있었다. 무안출신이다. 은진을 졸업하고 ‘할빈 의과대학’에 응시하여 무난하게 합격했다.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공주령에 공의로 파송됐다. 너희 큰오빠 사촌 “利鏞”이 그때 일본 동경 법정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할빈합작사 본부 간부로 있었기에 의대에 다니는 신영희를 유심히 보았다. 정자 신랑감으로 적격이라 해서 결국 그렇게 진행시켰다. 그때 우리 식구는 도농에 소재해 있었다. 신영희는 도농에 와서 너를 만났다. 둘 다 첫눈에 들었다.

아예 온 김에 결혼식을 올리고 공주령에 데리고 가라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정자야 너는 그때 아직도 Teenager였으니 살림에 무리도 많았을 것이다.

역사의 물결은 외곬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연합군 앞에서 히틀러 독일은 망했다. 일본인은 만주고 중국이고 조선이고 간에 모두 내놓고 알몸으로 자기 본토에 도망쳐야 했다. 중공의 팔로군이 만주에 진주한다. 간데마다 인민재판이다. 신의사는 공주령에서 본토인에게 인심 잃은 일이 없었기에 인민재판에서 중국인들의 증언으로 놓여 나왔다. 너는 맨 첫 송환부대로 신의주를 거쳐 도농의 네 부모집에 찾아왔다. 신의사도 얼마후에 뒤따라 왔다. ‘구사일생’이겠다.

너는 굳센 생활의 건설자였다. 온전히 빈손으로 왔지만 6ㆍ25 동란때까지 너희 살림은 재건되었다. 첫딸 혜림이 낳고 6ㆍ25 때 첫아들 민섭을 낳았다. 그리고 이엄이엄 경섭, 인섭, 요섭, 진섭의 5형제를 났다.

너는 혜림을 먼저 보내고 너 자신도 근육무력증과 루퍼스라는 아직까지 병의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이상한 병에 걸려 10년을 투병하며 지내다가 1978년 11월 14일 마침내 저쪽 언덕에로 건너갔느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74년 3월에 캐나다로 옮겨가서 너를 다시는 못 본대로 오늘에 이르렀다.

너희 엄마가 몇 달 먼저 혼자 떠날 때 너는 엄마가 생전에 귀국할 것 같지 않았던지, 곧 돌아오라고 졸랐단다. 엄마는 그런다고 다짐했단다. “그럼 맹세해요!” 하면서 네 손가락과 엄마 손가락을 걸더라고 했다. 3년만 있고 꼭 오세요 하더란다. 너희 엄마는 그 얘기하며 눈물짓는 걸 나도 여러번 보았다.

그 당시 일본 있던 네 사촌 오빠 하용 박사로부터 네 ‘부음’이 밤중 지급전화로 전해졌을 때, 토론토에 있는 네 어머니, 신자, 혜원, 경용 등은 신자 집에서 울다 흩어졌다.

1978년 11월 21일 저녁에 토론토 연합교회 장로님들과 여신도회 유지들이 이 목사 집에 모여 추도예배를 올렸다. 부의금 얼마를 신의사에게 보냈다. 신의사는 네 무덤 주위에 나무를 심는다고 했다. 이제는 그 나무도 큰 나무로 자랐을 것이다.

정자야!

네게 부의금을 보낸 토론토 연합교회 당회원 명단을 네게 알린다.

김희학, 박재훈, 장철호, 박재선, 오현표, 강태룡, 한기철, 정점수, 김병욱, 정충림, 조성준, 최동호, 전우림, 윤호영, 강원진, 정학필, 김익선, 김계남, 김소봉, 김정희

이상 부의금 전액 $100이었다. 그 밖에 노도윤 장로님이 단독으로 $100을 내셨다.

그리고 토론토의 네 남녀 동생들은 따로 보낸줄 안다. 네 늙은 부모도 따로 네 연전에 분향이라도 하고 싶어 얼마 보낸 것을 알았을 것이다.

정자야 너는 氣勝(기승)한 성격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은 싫었다. 신의사가 세웠달 수 있는 금호동 기장교회를 예장교회로 만들려고 그 교회 목사가 가지가지 음모와 책략을 부릴 때 신의사는 시무장로로서 무던히 고전했었다. 그때 너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겼달까, 지금도 기장교회로 발전하고 있다.

너는 아들 5형제 중에서 미국 유학하는 아들도 있어야 하겠다고 먼저 캐나다에 옮겨사는 네 동기들에게 부탁하기도 했었다. 네가 저쪽 나라에 옮겨간 다음에 네 둘째아들, 며느리 경섭과 원태는 시카고 근처 울바나 대학에서 기상학을 전공하고 있다. 부부 둘 다 수재니까 오래잖아 학위도 받을 것이다. 네 넷째 아들 요셉은 한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있다. 후일에 미국 어느 신학교에 유학할 길도 열릴 것으로 믿는다.

네 ‘근육 무력증’이란 병은 아직도 수수께끼의 병명이다. 의사인 네 남편은 밤낮으로 네 곁에서 밤새가며 간호했다. 그 정성 때문인지, 너는 그러면서도 10년을 견디었다. 그래서 네 남편 환갑까지 살아갔다.

이제 네 늙은 부모는 외지에서 너를 생각하며 네가 보낸 편지들을 읽는다.

[제1신]

“어머님 전상서”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원할 뿐입니다. 이곳은 모두 여전하오니 안심하옵소서. 비록 먼 곳에 계셔도 아버님 어머님 건강히 지내신다는 마음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마음 든든합니다. 양력으로 12월 5일이 어머님 생신날 되오니 몇칠 안 남았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마음만으로만 어머님 생각하며 축하합니다.

건강과 기쁨으로 오래오래 장수 하시옵소서. 돌아오신다는 말이 들려서 몹시 기다려집니다. 어머니 자주 소식 전하지 못하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도 있사오니 그렇게 생각하여 주십시오. 내내 안녕히 계시기를 빕니다. 끝으로 경용이 내외와 은용 식구에게 따로 편지 못하오나 널리 이해하시고 같이 안부를 묻는다고 전해 주십시오. 하령이 얼마나 영리하고 귀여울까 생각해봅니다. 오래지 않아 동생도 보게 되리라는 소식을 듣사오니 기쁩니다. 무사히 순산하기를 기원합니다.

그 전에 보내준 주사약(앰플)은 지금도 잘 간직하여 귀하게 쓰고 있습니다. 하령 엄마의 수고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씁니다.

온 집안의 평강과 번영을 기원하며 이만 씁니다.

(1974. 11. 29. 여식 정자 올림)

[제2신]

어머님 전상서

그간 결고 없으시며 기체 강령 하옵신지요. 잠깐 다녀오신다고 하시며 가셔서는 부지하 세월이십니다. 금년 정초에는 세배 갈 곳도 없고하여 부모님 생각 더욱 납니다. 새해 인사 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며 더욱 강령하셔서 만수무강 하옵소서.

이곳도 모두 여전하오며 불효여식도 몸이 많이 좋아지고 몸무게도 늘어서 겉보기에는 환자같지 않다고들 합니다. 그러하오니 걱정 놓으시고 안심하옵소서.

경섭이는 작년 봄에 입대하여 처음 집에 다녀갔습니다. 진섭이 대학 들어가는 해에 제대한다고 하오며 막내동생하고 같이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심스러워 합니다. 민섭이는 장교가 되어 자주 집에 다녀갑니다. 금년 6월이면 제대하게 됩니다. 캐나다에 무척 가고 싶어합니다만, 이민법 개정으로 배우자가 초청해야 한다고 하니 딱한 일입니다. 그곳에 여러 동생들 살고 있으니 합동작전 써서라도 민섭의 배우자를 물색해 주었으면 얼마나 고마울까 생각합니다. 조건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마음 착하고 남편 위해 주는 여자면 되겠지요.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니 원망은 안할 것입니다.

무슨 복에 아가씨가 있어 초청해 가겠습니까? 가고 싶어 하는데 어거지로 포기하게 되니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달리 수를 써서라도 무슨 수단으로든지 가게 해 달라고 생 떼를 쓰고 싶다가도 항상 바쁜 동생들한테 염치가 없어 말이 안 나옵니다. 무리하게 어려운 부탁하는 것도 못할 노릇같아서 포기상태입니다. 혹시나 희망적인 소식이라도 들릴까 하고 막연하게 기대됩니다.

이곳도 해가 갈수록 불경기입니다. 병원도 아무리 충실하게 하노라 해도 해마다 못해 갑니다.

하령이 많이 크고 정도 들대로 들었을 터이오니 그러시다가는 못 오실 것 아닐까요! 하령이네 성탄카드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전해 주십시오.

아버님, 어머님 내내 안녕하옵소서. 온 집안이 모두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1975. 1. 2. 여식 정자 올림)

[제3신]

부모님 전상서

아버지 편지 반가히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뵈온 듯 반갑고 기뻤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상하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별고 없으시다 하오니 마음 든든합니다. 아버지 너무 바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무리하시지 마시고 존체 자중하옵소서.

그곳 여러 식구들 다 잘 있다 하오니 감사할 뿐입니다. 하령 엄마 순산하기를 바라며 집집마다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지영이 삼촌이 백혈병으로 고생한다 하오니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월세계를 왕래하는 문명시대라 하옵는데도 속수무책인 병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건강이 제일 가는 축복임을 절실히 느낍니다. 근래에는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백혈병이라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 이상하고 딱한 일들입니다.

이곳은 여전하오니 마음 놓으시옵소서. 요새는 ‘안보’가 걱정스럽다고 합니다. 얼마동안 오시지 마셨으면 합니다. 세월이 무사해야 하겠사온데 다시 6ㆍ25와 같은 일이 있으면 어찌 살아 남기를 바라겠습니까?

수유리 집은 모두 잘 있습니다. 묵묵히 직장생활만 하니 달리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가 봅니다….

금호동 교회는 건축 허가가 나와서 철근, 시멘트, 벽돌 등을 준비해 놓고 解冬(해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총 평수는 114평이온데 아래 60평, 2층 60평 도합 120평 지을 예정입니다. 크지는 않아도 워낙 약한 교회이므로 저희들에게는 대사입니다. 오늘은 이만 올리고져 합니다. 내내 만강하옵소서.

(1975. 2. 3. 정자 올림)

[제4신]

부모님 전상서

어저께 아버님 하서를 감사히 받았습니다. 4월 16일에 보내주신 아버님 하서는 신자 편지 받고 이틀 지나서 받았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너무 걱정 끼쳐 죄송하옵니다. 이일 저일에 너무 신경 쓰시면 존체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되옵니다. 무슨 일이든 무리하지 마옵소서. 아버님께서 건강을 회복하셨다 하오니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이곳은 덕택에 여전하오니 안심하옵소서. 수유리집도 신촌집도 여전하오니 안심하옵소서.

5월 7일 명혜 첫 돌이어서 다녀왔습니다. 저녁에 관용이 직장 친구들 대접한다고 외할머니랑 어떤 아줌마랑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식구들 모두 건강하오며 돌잽이가 마구 뛰어다니니 건강은 만점이었습니다.

수유리 집에 가면 부모님 생각, 혜원이네 생각, 동생들 생각이 더 나서 보고싶은 마음이 더해집니다.

교회 건축은 하루 하루 모습이 되어가오니 무척 대견스러워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안녕히 계십소서.

(1975. 5. 17. 정자 올림)

[제5신]

부모님 전상서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래도록 소식 전하지 못하와 죄송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연로하시오니 무리하시지 마옵소서.

신촌 오빠는 금년 안으로 일본 四國地方(사국지방)에 가게 되리라고 합니다. 민섭이는 이민 가려던 것을 포기한 모양입니다. 현재 영등포 고교에 교사로 나갑니다만, 발전이 없을 것 같아서 대학원에라도 진학해 볼까 생각이 많습니다. 걱정 마옵소서. 저는 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소문나는 것은 싫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병 앞에서 약자 노릇하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은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가닥 소망이 있다면 행여나 빨리 특효약이라도 나와서 살려 주었으면 하는 것 뿐입니다.

팔 힘이 시원치 않아 글씨 쓰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약을 배나 더 써도 힘듭니다. 앞으로 자주 소식 올리지 못하더라도 용서 하옵소서.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옵시기를 비오며 이만 올립니다.

(1975. 9. 23. 정자 올림)

정자야 이것이 너의 마감 편지다. 이것이 1975년 9월 23일에 보낸 네 손으로 쓴 편지니 1978년 11월 14일 네 운명의 날까지는 너는 3년을 더 산 셈이다.

그 3년 동안에 네 맏아들 민섭이 좋은 규수를 맞이하여 너는 네 며느리의 극진한 효성을 받았고 귀여운 맏손주를 네 가슴에 안아도 봤으니 할머니로서의 맛도 남 못잖게 보았을 것이다. 여기있는 네 아빠가 편지는 못 받아도 네 마음은 향기롭게 느끼고 있다.


정자야

위에서도 잠깐씩 언급했지만, 너는 개성이 뚜렷하고 의지가 굳세고 기가 강한 여성이어서 남에게 지기는 죽기보다 싫다는 성격이었다. 오랜 병고는 그만큼 네게 무거운 부담이었을 것이다.

네 근육무력증은 손발이나 발다리만이 아니라, 혀와 목젖과 숨통과 식도에도 침범했었다. 목젖이 말 안들으면 숨통에도 제동이 안 걸린다. 일이분 동안에 운명의 손이 덮친다. 루퍼스가 낮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위장에도 퍼졌다. 위도 장도 파업이다. 그러니 밤 낮 옆에서 지켜보며 신경자극제를 먹이고 주사하고 해야 한다. 발작후 3분만 지나도 손들게 된다.

네 남편 신의사는 밤에도 네 옆에서 1초, 1분의 순간을 다투며 약을 네 입에 넣는다. 네가 그약도 삼킬 수 없게 되자, 주사로 대신했다. 마감에는 주사약도 통로가 막혀 너는 소리없이 갔다고 들었다.

네 아빠와 엄마는 너를 생각할 때 네 남편 신의사를 고마워한다.

너는 독립성이 강해서 어느 누구의 신세 지기를 싫어했다. 금호동교회당도 작아도 예배당답게 존엄한 모습이기를 원했었다. 자녀들도 각기 자기 분야에서 Somebody 되기를 원했다. 세월이 가는 동안 언젠가는 네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어진다.

네 강한 독립성은 네 여러번 편지에도 나타난다. 나는 네 편지를 모두 읽으면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한 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너는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여신우회 간부도 되고 했다. 어떤 사건을 놓고 어떤 누구하고 논쟁할 때 보면 이론이 정연하고 어법이 유창했었다.

네 편지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소박하고 적절한 표현이어서 부풀거나 과장된 데가 없다.

정자야 지금도 신영희는 네 남편이다. 동시에 이제는 네 남편이 아니기도 하다. 네 독립성이 이 세상에서 더 높은 세상에로 너를 ‘독립’시켰다. 그러나 ‘분리’된 것은 아니다. 내게는 끌날 같은 다섯 아들이 있다. 그들은 신영희의 아들이지만 네 아들이다. 혈연은 속이지 못한다. 너는 그들 심장 속에서 사랑으로 영원할 것이다.

이제쯤 ‘하나님’이란 단어가 네 ‘혼’에 생명의 샘을 솟구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기를 바란다.

서로 잊고 사는 것이 편할 경우도 있다. “Forget about it”이 심리 건강에 유리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망각’에는 ‘창조’의 활력이 없다. “Lest We Forget”이 높이 뛰는 ‘도약대’ 구실을 한다.

간 사람, 있는 사람, 보이는 사람, 안보이는 사람, 남과 나, 선배와 후배, 모두 모두 “전우주적인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인간과 자연과 모두 얽혀 한 몸 되는 그 날이 오면 이 늙은 부모도 다시 너를 몸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잘 있어라.

정자야 잘 있어라. 그 날이 올때까지!

네 아빠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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