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9일 금요일

[범용기 제5권] (115) 동경에서 – 被動(피동)과 神意(신의)

[범용기 제5권] (115) 동경에서 – 被動(피동)과 神意(신의)

“너희 주격을 살려서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일하자.”고 나는 학생들과 후배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80평생을 회고할 때에 나는 거의 전부 피동적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친구의 권면, 환경의 영향, 나 자신의 타고난 성품, 단체의 요구 등등이 ‘운명’ 같이 나를 밀고 당기고 했다. 나는 그대로 움직였다 할까?

내가 신학을 했다지만, 당초부터 신학을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사범이나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길은 문틈만큼도 열리지 않았고 신학에의 길은 꼬불길이나마 고비고비 눈에 뜨이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못하는 것 보다는 났겠지 하고 청강하기 시작했다.

졸업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목사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교회주의나 교회출석 중지 등 단호한 결단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만성적인 “피동적” 행태를 계속한 것 뿐이었다.

내 고향 선배인 ‘만우’ 형이 권하는대로 미국엘 갔다. 프린스톤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목적이었다. 거기까지 끌려왔지만 나 자신의 Life Work은 아직도 안개 속에 감춰진대로다. 장학금 받으며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배운다는 자체에는 충실해야 하겠다”, “내 의리가 나를 강요한다.” 만우형은 나에게 구약을 전공하라고 했다. 그래서 구약부분이 강하다는 피쯔벅의 Western Seminary로 옮겼다. 구약을 전공하면서 조직신학을 Minore로 택했다. 그것도 친구들의 권면에 따른 것이었다. ‘학사’ 논문도 쓰고 석사논문이라고 써 냈더니 둘 다 좋다면서 거기 따르는 칭호도 준다. 박사공부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내킨 김에 딴데 가서 2년쯤 더 있어 볼까 했었지만, 1932년 갑작스런 경제공황 때문에 그런 사치칭호는 엄두에도 떠오를 겨를이 없었다. 거기다가 일본군벌의 만주침략이 터졌다. 나같은 능동성 없는 ‘서생’으로서는 미국에서 살아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귀국했다. 이것은 미국의 환경이 나를 좌우했다는 한 예증이 되겠다. 평양 숭인상업 교사로 들어간 것도 교사로서의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어찌 못해 그리한 것이었고 용정에서의 은진교사 3년도 능동보다는 피동이 더 많았고, 서울에서의 ‘한신’ 설립과 10년내 신학논쟁과 신앙과 학문의 자유쟁취 운동에서도 저쪽편이 교권적으로 너무나 거세게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진리파지로서의 피동을 지속한 것 뿐이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구약의 예언운동에서 싹튼 것이기에 구약전공이란 명분만으로서도 가만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군사독재 정권은 하나님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자기를 좌정시키려는 권력운동이니만큼 기독신자로서 “예”할 수 없는 “신양규정” 문제였다. 그래서 그 환경이 나를 쑤셔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역시 환경에 대한 피동형태였던 것이다.

해외에서의 공동전선을 편다는 의미에서 무작정 북미주에 왔다. 그렇게 속히 오게 된 것도 내가 ‘능동’해서라기보다도 캐나다에 먼저 온 내 가족들의 요청에 의한 나의 ‘피동’이었다. 내가 N.Y.에 갑작스레 나타났을 때 동지들은 영문을 더욱 놀랐다. “자의입니까, 타의입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자의도 아니고 타의도 아니고 神意(신의)일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 전에 김종필이 미국에 나타났을 때 어떻게 국무다망한 이때에 이렇게 왔느냐는 물음에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대답했다는 얘기가 속담같이 되어, 내게도 그런 유형의 물음이 던져졌던 것 같다.

내게는 ‘신의’(神意)가 곁들어 있다. 나 몰래 하는 ‘영’의 세계가 있다. ‘신’의 사랑이 ‘나’의 과오와 ‘범죄’보다 크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마감숨을 거둘 때, 또 한마디 할 말이 있다면, 나는 내 본모습을 훨쩍 열어제치고 “하나님 저는 이런 녀석입니다. 하나님 좋으신 뜻대로 하십시오!” 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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