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9)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조카 하용을 먼저 보내고

[범용기 제5권] (9)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조카 하용을 먼저 보내고

내 조카 하용(金河鏞)이 못 돌아오는 나라로 갔다고 전해 왔다. 아직 환갑 지난지 몇해 안되는 나이로서 그럴 수 있을까 싶어 허탈해진다. 내가 서울 3년, 동경 3년, 미국 4년, 만 10년을 신학공부 한답시고 떠돌이로 지내는 동안 집사람은 큰 집의 대식구 속에 섞여서 어린 하용 조카를 자기 아들같이 귀여워 했다.

한문에서 조카를 유자(猶子)란 말로 적는데, 그건 ‘아들같다’는 뜻이다. 집사람에게는 진짜 아들 같았을지 모른다.

하용은 비상한 지력을 타고 났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한문을 가르치면, 한 장이고 두 장이고 한번 읽고 새기는 것으로 족했고, 한두번 읽으면 책 덮고 강 받치고서는 노는 것이었다.

내가 미국서 돌아온 때, 그는 소학교도 없는 산골에서 귀동냥으로 소학교 3, 4학년 교과서를 외따로 외우고 있었다.

귀국한 지 여섯 달쯤 지나서 나는 평양에 갔다. 하용 조카를 데려다가 숭덕소학교 5학년에 편입시켰다. 소학교를 정식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니 전 과목을 시험한다고 했는데 너끈히 합격했다.

다음 학기 시험에서는 일등을 했다. 일등이면 숭실중학에 무시험 입학이라는 특전이 있어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차지했던 학생이 울고불고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아마도 숭실에의 무시험 특전을 양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대로 시험 치르고도 들어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숭실에 입학하여 우리집에 같이 있으며 5학년까지 지냈다.

일제 말기라 미션스쿨은 다 없애고 모두 공립으로 한다고 해서 제5중학교라나 하는 이름의 숭실중학을 졸업했을 것이다.

나는 식구들 끌고 간도 용정으로 떠나고 그는 혼자 가정교사 하며 전문학교 입학시험 준비도 했었다.

그 무렵에 어느 광산왕이라는 이름의 부자가 광업전문학교를 평양에 설립한다고 해서 서기에 응시해도 좋으냐고 내게 편지로 문의해 왔다.

나는 반대했다. “금을 파내고 거기에 인간을 묻는 것이 광산이다” 하는 얘기를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의전에 응시하여 합격되었다.

말하자면 고학이었고 졸업후 총독부 의사시험, 인턴 등등의 절차를 거쳐, 적십자병원 내과 차장으로 있으면서 토끼, 모르못도 수백마리 길러 시험용으로 희생시키면서 마침내 연세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땄다.

우리 조카 며느리는 내가 서울 전농동 살 때, 바로 길 건너 첫집에 살던 은률송씨네 처녀 ‘송정옥’이다. 그녀도 여자의전에 다녔는데 둘이 자연 가까이 사귀고 마침내 약혼하게 됐다.

그댁에서 약혼식을 해야 한다기에 마침 김천교회 송창근 목사가 다니러 온 것을 청해서 두 집 식구가 송씨댁 응접실에서 간단한 약혼식을 올렸다.

그 후에 정옥 양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조선역사 얘기를 했다는 혐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 아무 증거도 없는데 하여튼, 무작정 미결수로 여섯달 지났다. 들리는 대로는 죄야 있고 없고간에 몇해 동안 그 속에서 고생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뚝섬에 살았는데 하용 조카도 식구에 하나로 자주 내왕했었다.

나는 지나가는 말삼아 물어봤다.

“네 정옥 아가씨에 대한 심경은 어떠니?”

그는 서슴짢고 끊어 말했다.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리지요.”

그런지 몇 달 안되어 정옥이 풀려나왔다. 재판도 아무 것도 없이 “나가라”해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내 큰 조카 이용(利鏞) - 하용은 둘째다 – 은 동경법정대학을 마치고 하르빈 맏아들 집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환갑년을 맞이해서 ‘하용’은 약혼자와 함께 그리로 갔다.

본국 있는 친척들도 다 모이기 때문에 선 보일 겸 하용은 정옥을 데리고 그리로 간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조선신학원 일 때문에 은근히 당국의 주목거리가 되 있었기에 일부러 가지 않았다. 여행 중에 기차안 이동 경찰은 그야말로 “천황폐하 전선 대행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잠깐’ 하고 내려가자면 그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 다녀와서 곧 결혼식을 서둘렀다. 그때 나는 식구들 데리고 경기도 양주군 도농에 오막살이 한 채 얻어 거기에 소개(疏開)해 있었기에 거기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김영주 목사 주례로 도농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하르빈에서는 형님 부부가 와서 우리집 안 방에서 새 며느리 큰 절을 받고 신부의 치맛자락에 대추꾸러미를 던져주던 광경이 선하다. 대추가 신부 치맛자락에 그득하면 그만큼 자녀가 많다는 기복행위란다.

학위 받은 후에 하용은 신촌에서 개업했다. 때때로 세브란스 의전에서 임상강의 정도의 봉사를 한다고 들었다.

병이 잘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은 많이 온다지만, 비싼 약을 헐값으로 쓰기 때문에 돈주머니는 언제나 배고프다고 했다.

아들 딸 7남매 치다꺼리를 하노라니 ‘어머니’ 정옥은 돈이 너무 필요했다. 정옥은 그야말로 마음씨가 비단 같아서 어느 누구에게 맺히는 말 한번 하는 일 없었고 억울하게 돈을 떼우고서도 악착같이 되찾을 생각을 못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관지염에서 천식증을 일으켜 몹시 괴로워했다. 잘 낫지 않는 병이란다. 신촌도 공기오염 때문에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 무렵 일본 ‘시고꾸’(四國)에서 공의(公醫)로 와 달라는 초청이 하용에게로 와서 곧 그리로 옮겼다. 거기는 고원지대고 공기도 깨끗해서 ‘정옥’의 천식증도 많이 나았다고 했다.

그 동안에 자녀들도 시집가고 장가들고 해서 독립되고 막내 둘만이 남았다. 이제 정옥도 편할 날이 온다고 생각됐다.

하용은 일본 이와데(岩手縣)에 있는 미희(美希) 병원에 전임하여 할 일도 바쁘지 않았다. 이제부터 부부는 자유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도 좋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옥’은 천식증이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지난 해에 먼저 갔다.

하용은 딴 나라에서 온전히 혼자 외로웠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돈독한 축도 아니었으니까, 그 외로움이란 신앙적 낭만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용은 건강했었고 성격이 열려 있어 누구에게도 답답하지 않았다. ‘유머’가 말 끝마다 튕겨나와 웃겼지만, 정치면에서는 맵짠 농담도 섞이곤 했다. 지난 해 중턱 쯤부터 내가 실없이 ‘회향증’이 생겨, 가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귀국한다고 말해온 일이 있었다. 하용은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작은 아버지 가지 마세요. 여기서 일하시는 게 더 효과적일 거예요” 하곤 했다.

박정희 총살 사건 직후에도 “이젠 귀국 길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전화했더니, “아직 그런 생각 마세요! 새끼들 개판입니다…….”

이제는 그 정도 대화할 길도 끊겼으니 이 기록이 마지막 ‘엘레지’겠지. 일월초에 일본 갔더라면 다시 볼 수 있었을 걸!

유감은 남는다. ‘할머니’는 정옥이 ‘작은엄마’에게 보낸다고 뜨다가 채 못뜨고 간 스웨터를 만지며 “왜 나이 차례대로 되지 않는고!” 하며 수건을 꺼낸다.

1월 28일(월) - 지난 밤에는 까닭 모를 불면증이랄까, 한 잠도 못 잤다.

하용을 영별한 충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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