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8)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조카 하용 박사 먼저 갔다

[범용기 제5권] (8)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조카 하용 박사 먼저 갔다

80년 1월 23일(수) - 밤중인데, N.Y.에 있는 증손녀 명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본 있는 ‘하용’ 의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하용 조카를 다시 못 보게 됐으니 일본 간다는 것도 허무하다.

경용 집에 있는 아내에게 알렸더니 그냥 울기만 한다는 전화가 왔다.

1월 30일(수) - 밤에 이 목사 주최로 이 목사 집에 교회 장로님 몇 분과 우리 네 집 가족들이 모여 ‘하용’ 박사의 영서를 애도하는 추도예배를 드렸다.

김익선 목사가 식을 진행시킨다. 아직도 사인(死因)이나 그 밖에 최후 상황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없다.

저녁 때에 현관 앞 눈을 치우고, 텅 빈 집에서 혼자 잤다.

아침에 늦도록 소식이 없기에 이웃에 사는 동역자인 한국인 의사가 들어가 봤다. 고요히 잠들어 저 세상에 갔더라는 것이었다.

큰 아들 ‘대성’과 큰 사위 상국이 와서 일본교회에서 정중한 영결식을 치루고 ‘화장’한 유해를 모셔갔다.

곧장 서울로 날아, 오늘 장례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이다. 이 소식은 우리가 추도예배를 마치고 서울 수유리 관용집에 전화했을 때 관용의 장모가 알려준 얘기다.

관용과 정희(막내며느리) 모두 장례식에 가고 관용의 장모님이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처 몰랐지만 우리가 드린 추도예배와 서울서 장례식과가 같은 시간의 행사였던 것이다.

나는 얼마 후에 “제3일” 속간 제46호에 하용을 보낸 슬픈 넉두리를 써낸 적이 있다. 아래에 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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