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5권] (7)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또 한번 귀국 얘기

[범용기 제5권] (7) 北美留記(북미유기) 第七年(제7년) 1980 – 또 한번 귀국 얘기

1980년 1월 12일 광주 백영흠 목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시라큐스 대학교 교수로 있는 맏아드님을 찾아와 몇 달 유숙하다가 귀국하는 도상, 시카고에서 부친 편지다.

오는 1월 19일에 시카고에서 귀국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도 귀국을 권한다.

그런데 송석중 박사는 귀국하면 안된다고 긴 편지를 보내왔다.

지금은 돼지들이 썩은 죽을 제각기 제가 더 먹겠다고 싸우는 판인데 뭣 때문에 그리로 가느냐는 것이다.

“나가긴 나간다. 그러나 신중해야 한다. 내 나이 80고개에 들었으니 예수보다 50년을 더 산 셈이다.”

염체없지만, 인생기록이라도 정돈해 놓고 가야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 삶의 과정에서 내가 진 ‘살의 빛을 갚지는 못해도 고맙다는 말만은 남겨야 한다 등등…….

1월 13일(일) - 2PM에 시내 연합교회에서 예배하고 예배 후에 이 목사와 장시간 상담했다. 그 결론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귀국은 당분간 단념하고 여기서 좀 더 저작에 주력하자.

(2) 한국의 현 정세는 송석중 박사의 말대로다. 그의 충고를 듣기로 하자.

(3) Social Welfare 관계에서의 interview를 다시 교섭하여 일이 되도록 밀어보자.

(4) 노인 아파트를 얻어 ‘할머니’와 함께 거기 있으면서 서재를 차리고 아무 구애됨 없이 저작에 전념하도록 하자.

(5) 써 놓은 수기며 저술은 여기서 출판하기로 하자.

(6) 일본에는 봄 꽃철에 약 한 달 예정으로 다녀오자.

(7) 캐나다 시민 여권으로 좀더 자유롭게 본국에 왕래하도록 하자.

합리적인 그리고 실현성 있는 제언이다.

결국에는 이 목사 말대로 됐고, 또 되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나대로 80고개에 오르면서 달라지는 심경을 얘기했다. 물론 과거를 정돈하는 것과 얼마 남지 않은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십분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내 신학에 있어서 최근에 특히 맘이 쏠리는 부분을 얘기하고 싶다.

요새 교회 신학이니 화해의 신학이니, 혁명의 신학이니, 민중의 신학이니 하는 형용사 붙은 신학이 말버릇처럼 유행하는데 그보다도 더 깊이 “우리 혈맥에 뿌리 박은 신학”이 모색되야 할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한국 민족과 역사에 ‘토착화’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구상하고 싶다는 말이 되겠다.

동양신학, 한국신학, 생활신학 등등의 이름이 붙어도 좋겠다. 더 나아가서는 유대교가 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겠다.

이것은 ‘국교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을 민족적 사회화한 기독교로 남과 북과 해외이주한인의 공통적인 종교로 우리 민족의 모든 생활의 활력소가 되게 하자는 생각이다.

서구신학은 교권과 정권이란 거목(巨木)에 “겨우살이”(Paras ite Misletoe)처럼 붙어 살며 자랐다.

기독교는 ‘국교’라는 이름의 ‘전매특허품’이 됐다.

그 기득권에 도전하는 ‘종교’나 ‘종교가’산 산채로 장작 불에 타 죽어야 했다.

그 앞에서, 특권 기독교 독재자들은 이 ‘이단자’를 제거한 ‘하느님’께 영광 돌린다고 찬양 예배를 드린다.

적어도 동양신학 또는 한국신학에서는 이런 ‘넌센스’가 연출될 수는 없다.

연출되서는 안 되겠다. 우리는 동양사상이란 토양에 원시기독교, 더 나아가서 “예수”의 기독교, 적어도 사도들의 기독교를 심어야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신앙, 그 ‘우리’의 신앙을 체계화한 신학의 수립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모색 단계에로 발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익한 대담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좀 더 있어보겠다는 얘기로 낙착된 셈이다.

1월 18일(금) - 저녁 쯤에 시라큐스의 백영흠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뉴욕을 떠나 귀국한다는 것이다.

長空도 귀국하여 무등산에도 같이 올라가고 ‘죽장망혜’(竹杖芒鞋)로 관동팔경도 시름없이 다녀보자는 것이었다.

말만 들어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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