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8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市內楓林(시내풍림)

[범용기 제4권] (8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市內楓林(시내풍림)

토론토 근방은 멀리 구릉도 길게 누워 있지만, 평지가 깊숙하게 꺼져 계곡이 되고 거기에 개천이 흐르고 좌우 언덕바지에는 수림이 우거진 계곡 공원이 있다. 뉴욕 중앙공원이나 영국 런던의 ‘하이델 파악’처럼 시가지의 노랑자위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 것도 토론토의 한 천혜(天惠)라 하겠다.

‘와아든’이나 ‘빅토리아 파악’이나 ‘하이파악’의 풍림은 어디 가서도 보기 드문 절경이고 화려한 화폭이다.

계곡 밑바닥에는 물론 ‘보도’가 있다. 차가 거부당한 것만해도 한가지 홍역은 면한 셈이다.

그런데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란 몇 안된다. 은퇴한 노인부부나 두 세 노인 친구가 주춤주춤 걷는다. 풍림에는 아랑곳 없이, 신경은 후줄대는 정강이에 집결되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도 간혹 그 길에 나타나는데 거의 예외없이 ‘런닝’이다. 뛴다. 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가을 빛 불타는 자연에는 그들도 무심하기만 하다.

소년 소녀들도 침입해 온다. 그들은 자전거 타기가 주목적인 것 같다. 타기 연습 정도는 지났다. 가볍게 도는 바퀴에 실려 떠 가는 몸의 쾌감에 잠긴다.

‘스포츠’일지는 몰라도 ‘아름다움’에 통하는 정서는 아직도 움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풍림은 버림 받은 미인의 외로움으로 ‘한’을 깨물고 낙엽의 날을 기다리는 것 가다.

그래서 역시 ‘풍림’은 멀찌감치 온타리오 북쪽 산지대, 늪지대를 고향으로 정한 것이 아닐까?

가을 하늘보다 더 맑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쪽빛 호수들은 고요하다. ‘명경지수’란 이런 경지일 것이다.

‘만산풍림’이 호수를 삥 둘러싼다. 홍옥 벽옥으로 수놓은 황금의 치맛자락이 파란 호수를 스친다. 그리고 껴안는다. 최후의 남은 정열을 아낌없이 불태운 낙엽으로 싸늘한 호면을 덮어 주자는 것일까?

기계문명에 아주 쩔어버린 지금의 여기 사람들이 자연에서 진짜 나 자신에게 흘러들어 맥박치는 생명의 ‘시’를 음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그런 정취가 남아 있는 것일까?

위에서 말한 계곡공원 풍경에서 인화된 여기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시’의 생명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아직도 ‘3S’의 시대가 ‘성숙’에로 ‘지양’된 것 같지도 않고, ‘식물인간’이란 놀림을 면하려니 싫어도 ‘행동인’임을 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도’에 잠수하여 ‘좌상’으로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을 따를 시대도 아니고 – 그러니까 뭔가 ‘동’과 ‘서’ 모든 문화형을 한 ‘몸’에 화신(化身)시킨 종합된 인간형인 ‘진인’(眞人)이 형성될 수는 없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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