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8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車內風景(차내풍경)

[범용기 제4권] (8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車內風景(차내풍경)

지금 나 있는 곳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로 40분, 어떤 경우에는 거의 한 시간 차 안에 있어야 한다. 정류장마다 얼마 내리면 또 몇 사람이 탄다.

땅 위의 인생이란 모두 탔다가는 내리는 게 아닌가? 내리면 또 그 자리를 메꿀 새 사람이 탄다. 어떤 경우에는 꽤나 붐빈다. 그래도 대개는 앉아서 간다.

출 퇴근하는 한 두시간은 ‘쨈’이 되어 갔지만, 그래도 서울에서의 그 시간에 비하면 호강이다. 나는 서울에서도 얼마 공간을 즐길 수 있는 수유리서 살았고 버스종점이 바로 우리 집 옆이었기에 버스 타는데는 ‘특권’층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출퇴근 시간에는 나처럼 어물어물 하다가는 앉아갈 팔자를 뺏긴다. 그래서 서 가노라면 미아리쯤에서부터는 ‘생지옥’이다. 죽어라고 들이미는 인간돌격대가 사정없이 짓밟는다. 남의 발이 이미 거기 놓여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발이 밟히며는 나는 내 발을 든다. 내 발 놓였던 자리에 그의 발이 뻗혀섰다. 나는 공중에 뜬다. 우악스레 사람들 틈에 끼었기 때문에 뜬대로도 무난하다.

어느 공장이나 사물실 ‘빌딩’의 ‘밀림’ 지점에서 그들은 무대기로 내린다. 그 때쯤에는 나도 내리기 마련이다. 어쨌든, 소위 ‘교통지옥’에 날마다 순례를 해야 했으니까, ‘딴데’ 부럽지 않달까!

한국 서민들에게는 ‘공간’이 필요하다. 참새가 재재거리며 맘대로 하늘을 날고 독수리가 휠적 펴제친 날개로 구만리 창공에 유유히 떠 있는 광경을 보면 “사람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군색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자기 모멸을 뱉아버리게도 된다.

그러나가 캐나다에 옮겨왔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네 가정이 한 지역에 살고 있으니, 늙은이도 저절로 묻어왔달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의 할 일이 있어서 왔다. 나라 일, 민족 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이랄까 그런 무엇들이 나를 밀어내니 나온 것이랄 수도 있겠다.

이 나라에 들어서자 받은 첫 인상은 ‘공간’이 한정없이 넓다는 것이다. 공간이 휘적 트였으니 사람의 가슴팍도 오그러들지 않는다. 자유로 뛰고 자유로 숨쉬고 자유로 달리고 자유로 일한다.

둘째로, 그 넓은 공간을 질서 정연하게 잡되지 않게 아름답게 건사했다는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침략이나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서로 위하고 서로 도와, 받으며 주고, 주면서 받고 한다.

평지에도 숲이 덮혔다. 그 밀림의 얼마만을 두부모 자르듯 네모꼴로 베여내고 밭이나 과수원, 또는 목장을 만든다. 그러나 그 여가리는 여전히 숲이다.

대도시 근방의 농지도 숲을 지니고 있다. 숲 면적은 비교적 좁으나 농토만이 면도질한 중의 머리박처럼 빤빤하지는 않다. 거기에 토끼도 있고, 스컹크도 있고, 때로는 노루, 사슴도 있다. 어쨌든, 여기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아름답게 지키고 자연스레 즐길 수 있는 인간이 있어서 좋다. 자연은 하나님의 미술품이고 인간은 그것을 보살피는 ‘스튜워드’다. 선한 청지기를 가진 나라와 민족은 인간과 자연 모두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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