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79)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車窓一日(차창일일)

[범용기 제4권] (79)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車窓一日(차창일일)

뉴욕에서 토론토까지 기차를 타기로 했다. 비행기는 점에서 점으로 뛰기 때문에 그 사이는 ‘허공’이다. 위에는 태양, 아래는 구름, 땅과는 인연이 멀다. 그래서 한시간도 하루인양 진력이 난다. 이번에는 기차를 택했다. 기차는 땅 위를 선으로 간다. 가담가담 정거장이 있으면 그것도 ‘선’의 ‘마디’지 ‘점’이랄 수는 없다.

나는 창가에 자리잡고 왼종일 창밖을 본다. 푸른 언덕이 뒤로 간다. 간혹 철교라도 건널라치면 땅의 심장이 심연에서 통곡한다.

아침 여덟시에 떠나 저녁 여덟시에 내렸으니 꼬박 하루를 창가에서 지낸 셈인데도 내릴 때에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다.

나무 없는 언덕도 간혹 있다. 산불에 타다 남은 마른 나무 몇 그루가 노루풀이 땅에 꽂힌 것처럼 서 있다. 생명에는 버림받았어도 썩지는 않겠다는 지사 타입이랄까!

깎아세운 낭떨어지 밑을 달리기도 한다. 담장넝쿨이 앙장스런 손톱을 벼랑틈에 못박으려 악착같이 기어올라 메마른 암벽을 파란 입사귀로 옷을 입힌다. 어떤데는 머루 넝쿨이 마른 나무를 감싸 안고 껴안아 말라빠진 고목에 파란 가운을 입혔다.

기차는 질퍽한 늪 가장자리를 스친다. 부평초가 빈틈없이 늪 얼굴을 덮었다. 구길구질한 물일텐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기차길 가에는 초가을 들꽃, 들풀이 맘대로 살아 제살림을 꾸몄다.

갈대는 늪가에 집단부락을 마련하고 유난히 싱싱하게 잘 산다. 그러나 이제는 다 자라서 늙었달까, 길고 가는 목덜미가 백발의 면류관을 썼다.

들꽃이 촌색시 같이 잡초 속에서 엿본다. 소담스러운 데는 없어도 꾸민데 없어 청초하다. 담자색, 노란색, 그리고 흰색, 옷빛갈도 원색이 전부다. 가담가담 노랑백합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단오날 그네 뛰러 몰려나온 시골의 미인들 같다.

어쩌다가 달맞이꽃도 무더기로 서 있다. 강원도 월정사 생각이 난다.

풀은 흔히 잡초라 부른다. 곡식이 양반이라면 잡초는 민중이랄까? 농토에서는 천덕꾸러기지만, 자연 속에서는 괄시 못할 주역이다. 기차길 가에서는 아무도 짓밟는 자가 없어서 키가 훤칠하게 크고 윤기가 반짝인다. “나도 살아 있다!” 하며 생명을 과신한다.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신비’하다기 보다 ‘신성’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 동안 기차는 턴넬을 뚫고 나간다. 시라큐스부터는 하늘과 입맞추는 농사벌판이다. 그래도 숲을 도려낸 농토기에 숲과 밭이 잘 어울린다. 차츰 바깥이 안 보인다. 꿈벅 조는 동안에 토론토 도시의 진주바다가 ‘용궁’같이 찬란해진다. 꿈에 산 차창의 하루는 아름다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