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78)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落照(낙조)

[범용기 제4권] (78)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落照(낙조)

갓 결혼한 젊은이가 신방에서 나오는 아침의 씩씩함같이 해는 하늘 장막을 헤치고 춤추듯 나온다. 그리고 하늘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용사처럼 달린다. 그 밝음, 그 기운참, 그 따스함에서 벗어날 자 없구나. (시 19편 4-5)

달이 여성적이라면 해는 확실히 남성적이다. 마라톤 선수처럼 하늘을 달린다. 빛나는 그 얼굴은 똑바로 못보게 눈부시다. 첩첩 구름이 가려도 그 빛은 은은하게 스며든다. 해 없는 날들을 상상해 보라. 인공태양으로 생물이 견뎌낼 수 있을까. 밤 비행기가 도시 위를 스칠 때 휘황한 전등거리, 하늘의 은하수가 여기를 흐르나 싶어진다.

프랭클린, 에디슨, 포오드 등등 하늘이 낸 발명가들 덕분에 우리 촌부들도 하늘의 은하수 위를 날고 있구나 싶어 자못 감개해 본다.

그러나 해를 보고 “신방에서 나오는 새신랑 같다”는 등,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리는 용사 같다는 등 하는 가슴 울렁이는 ‘경이’를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 현대인은 이익과 물건의 수렁에서 ‘시’를 잃었다. Facts만이 있고 낭만이 없다.

그래도 해는 제 갈 길을 달린다. 하늘 이쪽 코오스를 다 달리고 저쪽 길에 들어선다. 이제 이쪽에서는 해 없는 ‘밤’을 각오한다. 저쪽에로 작별하는 ‘해’의 낯이 이른바 ‘낙조’다.

배 탄 사람이 보는 태평양의 낙조는 장관이었다. 서쪽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불러 이글거린다. 그 불덩어리가 암흑에 가라앉기 전, 남은 정열을 아낌없이 태워버리는 비장한 최후의 ‘작열’을 무심코 지내칠 수는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도 ‘느지막’이 다가오며는 ‘낙조’가 유별나게 눈에 뜨인다. 도시에서는 해가 언제 떠서 언제 지는지, 숫째, 해가 있는지 없는지도 의식하지 않은채, 하루 가고 한달 가고 하지만, 시골 호숫가에도 나가면 햇볕이 그리워 벌거벗고 햇살을 피부로 숨쉬는 인간군상을 본다. 그러나 그 계절은 짧다. 해의 영광은 그대로지만 해의 따사로움은 늙는다. 낙조는 해의 최후를 꾸미는 영광의 확산이다. 인생이 세상에 태어나 청년의 즐거움, 장년의 용맹함을 달려, 노년의 추수를 마치고 마감 정열을 ‘낙조’같이 불태우며 저켠에로 넘어간다면 그 역시 장관이 아닐 수 없겠다.

그래선지, 나는 ‘낙조’를 좋아한다. 독일 갔을 때에도 북독일 고산지대의 수벌랜드 호반에서 낙조를 카메라에 담아 갔고 왔다. 캐나다에서도 어떤 사진 기술자가 찍은 ‘낙조’ 셋을 화점에서 사다 벽에 걸었다.

백두산 ‘천지’에 지는 ‘낙조’를 지켜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겠다.

내 얼마 안 남은 불꽃 꺼진 황혼 그대로 암흑에 삼켜진다고 생각하면 어딘지 결산없는 장사꾼처럼 허전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쇄키나”가 내 남은 날들 속에 머물러 줍시사고 혼자 기도한다. 주님 영광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삶의 마감 순간이 하늘과 땅을 불태우는 ‘영광’(에스겔 10장)의 확산이기를 기원한다. 하늘의 영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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