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77)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구름과 바람

[범용기 제4권] (77)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구름과 바람

그제였던가 나는 특별한 볼일도 없으면서 시내에 나가 얼마 서성거리다가 저녁쯤에 집에 오는 길이었다. 한시간 코오스의 노선이니까 언덕바지도, 거리복판도, 골짝도 있다. 우거진 숲의 계곡공원을 옆에 끼고 달리기도 한다.

좀 놉은 데를 달릴 때, 나는 하늘을 옆으로 볼 수 있었다. 꺼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검은 구름이 산맥을 이루고 낙조 가까이는 산불이 한창인 듯 빨간 불뱀이 몸으로 숲을 핥으며 반월형으로 뫼를 태우는 것 같았다. 오래 보구 싶었지만 이제는 시내라 빌딩이 막아선다.

여섯 살 때, 아버님이 황지책에 아이들 읽을 한시를 써주시면서 외우라던 생각이 난다. 거기에 “하운다기봉”이란 구절이 있었다. “여름 구름에는 신기한 봉우리가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구름을 쳐다봤다. 진짜 구름인지 산맥인지 모름만큼 구름봉우리가 신기했다.

여기 하늘에도 구름은 많다. 풀어진 묵같이 하늘에 퍼져 있다. 이불을 천정에 편 것 같아서 불안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가을 하늘은 맑은 것으로 유명하다. 며칠 전에 “중추절”이라는 ‘추석’이 지났지만 그날밤 고향 하늘을 되새겨 봤다. 맑다 못해 ‘곤색’이다. 억년 묵은 비밀을 안고 말없이 노려보는 철인의 눈동자 같기도 했었다.

나는 아직 백두산 ‘천지’를 본 일이 없지만 그러니만큼 ‘상상’은 아름답다. 여름 구름 같은 신묘한 봉우리 둘러싼 ‘병풍’ 속에 산천이 맨 처음 생길 때부터 하늘을 안고 고요하다. 깊이 삼천자라니 무던히 침착한 정령이 갈피갈피 까라 앉았을 것이다.

‘천지’에 가 본 친구 말을 듣건대는 바람이 거세더라는 것이다. 침묵자의 한숨이랄까 휘파람이랄까 아마도 ‘정기’의 파도일지 모른다.

구름과 바람은 불어 다니는 친구 – 그래서 ‘풍운’이라고 한다. 호걸스런 야심가를 ‘풍운아’라고 부른다. 변화무쌍한 수단꾸러기란 뜻도 품겨 있다. ‘백두산’ 만큼 높고 ‘천지’처럼 깊은데다가 거센 바람이 구름을 헤친다면 ‘풍운아’의 자랑도 제격일 것이다.

그런데 토론토에는 ‘산’이 없다. ‘오렌지 빌’은 ‘언덕’이지 ‘산’은 아니다. 허허벌판도 나쁘달건 없지만 너무 평범해서 흥겹지가 않다. 그래도 여기저기 호수는 지겨울 정도로 많다. ‘온타리오 호수’는 ‘바다’라면 몰라도 ‘호수’로서는 너무 크다. 고기가 맘놓고 자라는 자그마한 호숫가, 숲 언저리에 단칸 초막이라도 꾸리고 좀 넓직한 정원에는 ‘야초원’을 만들어 ‘들꽃’들 나무를 골라 심고 그것들의 꽃 계절을 안배하여 사철 ‘꽃’이 ‘대’를 이어가게 한다면 ‘도연명’이 부럽잖겠다고 늙은 꿈을 그려본다. 혼잣 생각에도 무던히 동양적이고 도교적이다. 나는 언제였던가, 그게 아마 십년이 훨씬 넘은 시간 저켠이었던 것 같다. 도교와 기독교를 배합시켜 아들을 낳는다면 어떤 ‘형’의 합성자가 생길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생각’했다는 것보다도 아이들이 무대 막을 비집고 그 속을 힐끗 엿보는 정도의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뭔가 재미있는 ‘인간형’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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