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76)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눈 내리던 날

[범용기 제4권] (76)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눈 내리던 날

요새 다른 날들은 강추위로 낮에 어름을 비벼 넣은 것 같았지만, 오늘 눈 내리는 바로 지금은 바람도 없고 그리 춥지도 않다. 나가서 아름들이 가로수 밑을 걷는다. 나무마다 눈꽃이 소복하다. 참새가 깃을 털고 날아가면 내 머리 위에 ‘락키’의 만년을 흰 하늘이 스친다.

계곡을 찾아 거닌다. 아무도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시냇물은 얼지 않았다. 완만하여 물결이 없다. 굴르잖으니 더 추워 보인다. 내 후배들이 본국의 감옥 속에서 살이 얼어터지는 자기 발을 주무르며 ‘시’를 구상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소리없이 몸으로 흐느끼는 그들에게는 의로운 자랑과 외로운 슬픔이 있다.

어쩌다가 흐릿한 구름 틈에서 햇빛이 샌다. 눈도 이제는 몇알씩 휘영청 날릴 뿐이다. 햇살은 밝으면서도 샐쭉해서 웃지를 않는다. 그 야릇한 광파(光波)가 얇은 ‘레이스’를 짠다.

‘크리스마스 츄리’에 매달린 솜 송이처럼 억지로 앉아 있던 눈(雪)망울들이 빛을 타고 날아가버린 다음의 나목(裸木)은 벗은 여인처럼 내 앞에서 부끄러워한다.

사람의 ‘발’이란 뭔가를 밟는 재미로 붙어있는 녀석이 아닐까? 늦은 봄에는 떨어진 꽃잎을 밟는 재미에 홀린다. 늦은 가을에는 낙엽 밟는 재미, 겨울에는 눈 밟는 기분에 좋아한다.

그 중에서 눈 밟는 늙은이의 풍류랄까? 특히 갖 온 눈에 푹푹 빠지며 천천히 시름없이 옮기는 발은 흰 벌에 첫길을 여는 멋이 있다. 그래서 가슴에 수필을 그린다.

하얀 갈매기들이 떼지어 날아온다. 하얀 눈벌(雪原) 위에 흰 갈매기란 한국에서는 그리 흔한 ‘콤비’가 아니다. 인천 갈매기가 서울까지 날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바다’ 같은 ‘호수’를 바로 겨드랑이께 낀 토론토는 행복하다.

갈매기들은 호수에서 ‘배’가 출출해지면 육지에 올라와 고기 창자며 베어버린 생선 대가리 따위를 사냥하는 것이겠지. 오늘도 내게는 ‘풍류’니 ‘멋’이니 하는 ‘감상’에 그려지는 그들이지만 그들 자신으로서는 생존을 위한 ‘선택 없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나 눈 깔린 ‘벌’에 예비된 식탁이 있을리 없다. 그들은 계곡의 하찮은 개천 여울에 앉는다. 어떤 놈은 헤엄친다. 뭐 먹을 걸 던져주고 싶었다.

나는 털로 안을 짜 넣은 좀 투박스런 반장화를 신었기에 발시릴 걱정은 없다. 그러나 이제 앞길이 창창하달 수 없는 나이니 내게는 ‘시간’이 금싸래기다. 도루 걸어 내 방 책상에 마주 앉는다. “내 남은 날들이 주님 영광 더럽히는 기록이 되지 않게 합소서” - 기원을 올리고 붓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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