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75)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방랑의 꿈

[범용기 제4권] (75)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방랑의 꿈

나보다 나이가 5, 6년 앞선 선배를 이역만리라는 북미주에서 만났다. 그는 얼마전만 해도 백세를 살리라는 ‘신화’가 붙을 정도로 건강했었다. 거대한 체구에 이글이글 타는 정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년 되나마나한 사이에 초절음 김치가 됐다. 눈동자는 짙은 안개 속에 풀어졌다. 귀 속의 북(Drum)은 석고처럼 굳어졌다. 턱이 내려앉고 등이 굽었다. 명저를 써 내던 머리가 초두부처럼 흐들흐들해졌다. 생ㆍ노ㆍ병ㆍ사에서 하염없는 ‘인간고’를 보고 입산수도한 석가모니의 현명을 되새겨본다.

나도 80이니 “길손이여 오라!”하며 같은 운명의 신이 손짓하는 것 같다. 늙은 것은 사실이지만 추하게 늙지는 말자고 다짐해 본다.

저 하늘 깊은 푸름이 내 눈의 스크린에 영상되는 동안, 배부르도록 하늘을 먹자. 담청색과 연록색이 수평선에서 입맞추는 저 바다의 넓은 푸름을 싫도록 빨아들이자. 내 발바닥이 흙향기를 밟을 수 있는 동안, 벗은 발로 백사와 향토를 걷자. 내 다리가 공간을 잴 수 있는 동안, 논뚝의 오솔길, 숲속의 행길을 걷고 걷다가 느티나무 그늘에서 촌로의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는 낭만도 나쁘지 않을 거다. 내 염통이 조심조심 ‘펌핑’을 해주고, 내 위가 먹이를 새겨주고, 내 허파가 풀무지를해 주는 동안, 그리고 내 기억이 바닥나기 전, 내 생각이 어둔밤 반딧불만큼이라도 빛의 선을 그려주는 동안에 내 고국의 눈익은 산천을 만나고 싶다. 천년세월 거듭한 옛 절들을 순례하고도 싶다. 백두산 정수리에 억만년 고여, 그 깊이 지심에 닿은 무시무시한 ‘심연’ 옆에 짜릿 전율하고도 싶다.

우리 국토가 제사람, 남의 사람에게 무지스레 짓밟히고 민족이 군화바닥에 짓이겨지고 인간으로의 생존권마저 짓씹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산과 가람과 바다에서 푸름을 탈색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묵중한 뫼들을 뽑아갈 수는 없다. 그 흐르는 강은 막아도 막아도 어디선가 넘쳐 제 갈길을 갈거다. 우리의 강산과 역사와 문화는 쓴대로 무릉의 도인처럼, 형해밖엣 선인처럼 방랑하고 싶다는 것도 내 강산, 내 역사가 내게 닿은 ‘인연’ 때문일 것이다.

[198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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