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2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70)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개똥벌레

[범용기 제4권] (70)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개똥벌레

내가 열 아홉 살 때였다. 직장의 직무관계로 두만강 하류 일대를 돌고 있었다.

‘서수라’ 어항에서부터 ‘굴포’, 그리고 ‘구룡포’ 늪지대를 헤치고 나가서 ‘조산포’까지 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루 일정으로서는 벅찬 걸음이다. ‘구룡포’ 늪 가에서 벌써 어둠이 내려 씨웠다. 그 늪은 ‘담수호’로 그리 깊지는 않다지만 거의 절벽이랄 수 있는 가파로운 산 자락과 엇물리고 고여 있는 ‘침묵’이어서 어딘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온갖 종류의 바닷새들이 밤 새우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새들이 제각기 저희들 방언으로 주고 받는 ‘언어’가 무던히 시끄러웠는데 차츰 어두워지자 침묵에 잔다. 그 소리까지 잠든 늪지대, 질척거리는 밤길은 더욱 무료했다. 내 걸음은 저절로 빨라진다. 늪지대가 낮은 언덕바지에 막혀 더 퍼지지 못한 고장에는 키큰 갈대가 밀림을 이루고 있다. 뭔가 나올 것 같은 ‘음지’다. 앞이 갑자기 환해진다. 수백만일 것 같은 작은 불꽃들이 어둠 속을 난무한다. “어허! 저게 도깨비 불인갑다!” 몸이 오싹해진다.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고 결사적인 행진이다. 그건 물론 ‘사단’ 레벨의 반딧불부대였다.

“대낮의 암흑”보다는 “암흑 속의 형광”이 높은 점수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빛이 ‘마광’일 수도 있다는데 두려움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선땀에 젖은 몸뚱이를 조산진 여인숙 한 구석에 뉘일 수 있었다. ‘조산진’은 두만강 가까이지만 강가는 아니고 그렇다고 산꼭대기도 아니다. 그 점이 경원의 용당과는 다르다. 안온한 언덕 복판이 평평하게 꺼진데에 몇걸음에 둘 수 있는 돌성이 허물어지다 남았다. 그 성안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가 아담한 비각 속에 서 있다. 그때 조산만호였던 이순신은 강건너 여진족의 침범을 막는 것이 주요 업무였던 것 같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하면 의례 전라도 ‘다도해’와 경상도 ‘강진’, ‘거제도’ 등 남쪽 바다를 생각한다. 마치 그는 거기만 위해 있는 제독인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러나 함경북도 두만강 건너의 거센 민족을 막아내고, 우리 국토의 어느 모새기 한치인들 그들 발바닥에 더럽혀질소냐 싶어, 목숨 걸고 지켜주신 그 자취가 바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한국의 어느 한 귀퉁이도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나라 사랑을 드높여 준다. 오늘날 남한 정부가 울릉도, 죽도, 난도 등등을 일본과의 관계에서 다루는 태도는 괴씸한데가 없지 않다.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귀포, 거제도의 옥포 – 이런 ‘금수강산’에서도 알짜 ‘비단무늬’랄 수 있는 우리의 명승지가 놈팽이 왜족들 ‘소돔’으로 더럽혀진다는 것은 진정 민족얼의 치욕이다. 이순신 장군을 우상으로 모시고 그 그늘에서 잡당들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오늘의 한국을 충무공은 얼마나 노여워 하실까 싶어진다. 거기 사람들 말에 의하면 나라에 무슨 변란이 있으려면 이 비석에서 땀이 난다고 한다. 미신이라지만, 충무공의 우국심정을 상징하는 속담이다. 우리가 모두 반딧불만큼한 빛이라도 몸에 지니고 있다면은 그걸 모아 한꺼번에 어둠의 늪지대를 밝힐 수도 있지 않을까? 개똥벌레는 명함 내놓기에는 점잖지 못한 이름이겠지만 그것은 빛의 벌레다. 빛도 남의 것을 빌어온 빛이 아니라 제 몸에서 만들어낸 빛이다. 혼자서도 반짝이지만, 수십만이 뭉쳐 어둠 속에 불덩이를 날린다. 이순신 장군이 ‘여진’을 몰아낸 것처럼 ‘대낮의 암흑’을 쫓아버리자는 개똥벌레 ‘서민’들이여 용감하라! 회고담에 끈을 달려니까 이런 넉두리가 나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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