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2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7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발코니의 하늘과 땅

[범용기 제4권] (71) 자연은 인간의 큰 집 – 발코니의 하늘과 땅

역시 ‘병상’이랄까. 가만히 누워 있으라니 ‘병자’일 것이고 그 누운자리는 ‘병상’일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열흘이 넘고 보면 바깥이 그립게 된다.

볕쪼임도 할겸, 까운만 걸치고 발코니 등의자에 길게 눕는다. 묘한 고장이어서 어느 집, 아무의 눈에도 뜨이지 않는다. ‘가로수’라지만 모두 5, 6십면 자란 아름들이 거목들이어서 ‘숲 속의 주택’이지 ‘주택가의 나무’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끝같이 날카로운 삼(杉)나무, 회(檜)나무들이 제각기 초록 단층을 허리에 두르고 새파란 하늘에 치솟았다. 그 뒷면과 사이사이에는 두리뭉실한 짙은 녹색의 느티나무, 단풍나무 숲이 ‘무등산’을 옮겨 심었다.

그 단층들 틈으로 뒷줄의 느티나무 그늘이 심연같이 검푸르다.

억억만으로 피어나는 새 생명에 빛이 배부르다. 바람이 하느적 건드린다. 녹파(綠波)가 고요히 춤춘다.

하늘의 광파(光波)는 푸르다. 땅의 애숭이 생명도 보드럽게 푸르다. 이 푸름이 내 눈동자에 고여 나도 푸르다. 나도 다시 돌아온 새 생명의 대열인가?

자연은 하나님의 ‘시집’이요 ‘화폭’이다. 숲속의 한줄기 빛, 그리고 그 푸름, 그것 그대로의 하늘에의 ‘턴넬’이다.

나는 해방직후 학교 일, 교회 일, 총회문제 등등 소음의 도가니에서 일시라도 빠져나올 탈출구를 전남 광주에서 찾았었다.

거기에 백영흠 목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Non-Conformist적인 제나름대로의 독립교회를 세우고 보람있게 일하고 있었다. 언젠가도 “내집”이다. 예고없이 불쑥 들이닥쳐도 의례 올 사람이 온 것 같아 준비된 ‘내 방’에 든다. 병풍까지 벽에 둘렀다. “오늘은 무등산에나 갑시다” 한다. 슬슬 걷노라면 삼림지대가 끝나고 무연한 완경사 초장이 하늘까지 트였다. 나는 아기자기 채색진 고산식물 “쥬단” 위에 누워 하늘을 본다. 배가 땅에 닿으면 풀향기, 꽃향기, 뒤쳐 하늘을 보면 햇빛과 미풍, 그리고 바로 옆 외그루 나무에서는 매미 소리, 제각기 자기 의상(衣裳)을 ‘데부’하는 크고 작은 나비들 – 나는 지금 하늘과 땅을 함께 숨쉬고 있다. 옹색한 기(氣)가 풀린다.

내 안에 하늘이 있고 하늘 속에 내가 산다. 초장과 언덕과 나무와 풀, 그리고 새와 나비와 벌레와 시내, 바위와 꽃 모두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들 안에 있다. 한 거대한 우주적인 생명이 내 가슴 속에 폭발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굳어진 유일신론은 대채로운 자연을 사막화했다. 그와 아울러 자기 자신도 경화한다. 동양 시인들에게서 자연의 산 맥박을 몸으로 받아누릴 아름다운 ‘시정’이 아쉽달까?

어쨌든 나는 호연(浩然)에 젖어, 트인 마음으로 하산(下山)한다.

지금 나는 이 발코니에서 그 때의 그 태양, 같은 솔솔바람, 같은 푸름에 잠긴다. 이 눈이 하늘의 푸름, 땅의 초록을 볼 수 있는 동안, 내 삶의 행복은 푸르다.

[1981. 6. 6.]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