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1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66) 細語錄(세어록) - 이민 도시

[범용기 제4권] (66) 細語錄(세어록) - 이민 도시

1980년 겨울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에서 펴낸 합작 제3시문집이 내게도 보내왔다. 제호는 “이민도시”다.

스물 한 분의 시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거기에 격조높은 예술사진이 곁들었다.

사진에는 작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나의 인상으로서는 우선 ‘책’자체가 미술품이다. 하얗게 맑은 인화지가 거울같이 내 맘을 탐조한다. 그 안에 담긴 시, 산문시, 엣세이 등등이 충분히 넓은 공간을 호흡한다.

우선 놀라운 것은 새벽같이 직장에 나갔다가 저녁 다섯시나 돼야 들어오는 고달픈 이민생활, 또는 오후 세시쯤 직장에 갔다가 밤 열두시 지나서야 들어오는 직장전선에서 ‘시’를 배태한다는 그 자체가 놀랍고 가상스럽다.

우리가 사는 근대사회는 산업사회요 현실주의 사회고 이해타산의 물량사회다. 거기에 컴퓨터는 있어도 시는 없다. 돌작밭에 떨어진 씨앗이 뿌리 내릴 여유가 없다.

그런데 우리 ‘이민도시’에는 ‘시’가 있다. 있어도 화련한 ‘화단’같이 있다.

본국의 민주동지들도 ‘시인’이다. 김지하는 물론이지만, 양성우, 고은, 문익환 등이 모두 시인이다. 구태여 ‘시인’으로 자처하지 않는 분들도 그 심장에는 ‘시’가 있다. 소설가, 평론가, 기자, 모두 문학의 ‘눈’을 갖고 있다. 기독교 목사는 시인이거나 시인의 소질을 지닌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목사학’에서의 전통적인 요청이다. 그건 구약의 예언자들이 모두 시인이었고 예언집은 그들의 시집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창업 임군인 다윗은 가장 탁월한 시인이었고 예수도 시인이었다. 우리는 예수를 “만군의 왕”이라고 찬양한다. 임금의 본직은 정치다. ‘시’를 가슴에 품고 찬미할 수 있는 정치가만이 ‘인간정치’를 담당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이조시대의 과거제도를 연상한다. 선뜻 걸머쥘 수 없는 막연한 ‘방’(제목)이 나 붙는다. 법조문도 아니고 계산할 수도 없는 생퉁같이 튕겨나온 문어발 같은 괴물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 그는 그 제목 속에 숨은 창작과 경륜과 비범한 통찰을 마치 해저탐색자 같이 찾아내어 장시를 구상한다. 시관도 예정된 답안 없이 응시자의 창작을 읽어나간다. 그는 명상과 명문에 부딪힐 때마다 감탄하여 무릎을 친다. 거기에 응시자의 사람됨과 잘나고 못난 인물평과 도량의 넓고 좁음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요새 고등고시한다는 제도와는 다르다. 고등고시 준비한다는 사람을 보면 인간적으로 불쌍해진다. 육법전서 조문을 외우노라 밤을 샌다. 대번에 붙는 사람도 혹간 있지만 대체로는 이년 삼년 걸려도 ‘멱국’만 먹는다. 어쩌다 재수좋게 붙으면 그때부터는 ‘자유인간’이라기 보다 관료제도의 한 부분품으로 독재자의 ‘마이크’ 노릇하기 일수다. 법관이나 변호사축에도 ‘시심’ 가진 이들이 간혹 있다. 그러나 그들은 파직 또는 감옥행으로 끝난다. 바른 길은 좁고 험하다. 그것은 예언자의 길, 시인의 길이고 생명에의 길이기 때문에 크리스찬의 길이기도 하다. 수난자 아닌 시인도 맘이 수난시인과 통하는데서 같은 반열에 끼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