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1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65) 細語錄(세어록) - 의리와 멋

[범용기 제4권] (65) 細語錄(세어록) - 의리와 멋

“○○가 범용한 인간이지만 ‘의리’는 있어!”

“‘실수’는 있어도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배신행위는 없단 말이야!” - 그러나 그것이 멋지단 말은 아니다.

‘의리’라면 ‘굳은 떡’ 같아서 구미가 동하지 않는다. 맛이 없다. 한국말에 ‘멋’이란 단어는 ‘맛’이란 말과 통하는 데가 있지 않을까. 사람됨됨이의 ‘맛’이 그 사람의 ‘멋’이랄 수 있겠다.

‘멋’이란 그 사람의 몸에 밴 세련된 ‘맛’이다.

한국 사람은 ‘멋’을 무척 좋아한다. ‘멋쟁이’, ‘멋모르고 덤빈다’, ‘멋없이 굴지 말라’, ‘멋적다’ 등등 큰 사전을 보면 그 밖에도 ‘멋들어진’ 말들이 수두룩하게 적혀 있다.

예수의 비유 교훈에 제자들을 상대로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저 사람들 발에 짓밟힐 뿐이다.” 했다. 소금의 ‘맛’은 짜다. 짠게 소금의 ‘멋’이다. 그러나 ‘맛’은 짠 것 만이 아니다. 싱거운 것, 매운 것, 단 것, 신 것, 짜릿한 것, 쓴 것 등이 모두 ‘맛’이다. 이 모든 것이 조화된 맛에 사람의 혀는 행복하다. 그래서 ‘양념’, 즉 ‘조미료’가 반드시 부엌과 식탁에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소금’이 ‘왕’이다. 짠 맛이 없으면 다른 맛들은 제구실을 못한다.

나는 ‘맛’이 ‘멋’이라고 했다. 억지 해석이지만 ‘근사치’는 있다고 용납해 둔다.

맛은 어느 하나만이 극성을 부려서는 ‘진미’(珍味) 노릇을 못한다. 조화미(調和美)라야 한다. ‘멋’도 그렇다. 그런데 ‘멋’을 말하는 한국민족에게서 ‘조화의 맛’이 고갈됐다. 따라서 ‘멋’의 여백이 만원된 극장 같이 좁아졌다.

내 나라를 남들이 갈라놓고 남과 북에 자기들의 꼭두각시 왕국을 세우고 북에서 남에, 남에서 북에 증오의 불을 질르게 한다. 옛날 ‘유방’이 진시황의 아방궁을 불지르듯 어느 한 편이 재만 남게 한다. 그리고 신나서 만세를 부른다. 멋도 재가 된다.

진짜 그래야 되는가? 소금이 ‘조미료’ 노릇을 안하고 소금맛 일색으로 ‘독재’해야 한단 말인가?

소위 주체사상만이 사상이고 다른 생각은 못하고 안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인가?

3ㆍ8선이 설정된 것만도 억울하고 밸꼴리는 일이지만 그걸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聖別(성별)하려는 一味主義者(일미주의자)가 더 괴상스럽다.

소금 맛이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이 너무 강하면 물이 죽는다. 死海(사해)가 그것이다. 죽은 바다여서 생물이 없다. 미국 ‘유타주’의 염해(Soltlake)도 그렇다. 소금이 너무 많으면 생명이 김치처럼 저려진다. ‘독재’는 권력의 ‘맛’이다. 그것이 너무 강하면 백성이 전 김치가 된다. 공산독재는 ‘주의’의 ‘맛’이다. 그것이 너무 강하면 ‘사회’가 ‘사해’로 된다. 생명은 없고 염수만 남는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아무리 바람직한 일이라도 그것이 ‘극’으로까지 올라갈 자격은 없다. 본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대립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어느 한편이 폭력으로 상대방을 깔아 뭉갠다. 폭력행위 자체가 더 큰 불의의 뿌리고, 깔아 뭉갠다는 것이 ‘의’로운 열매일 수가 없다.

“이쯤하고 ‘타협’해 봅시다.” - 그래서 국제연합도 생기고 평화회의도 생기고 국제재판소도 열린다. 그 결과가 그리 신통치 않아서 ‘타협’이란 말 자체도 듣기 싫어진다. 부자가 비게 낀 아랫배를 만지면서 가난뱅이들에게 술 한 잔 부어주고 빙그레 웃는 장면이 눈 앞에 돋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협’이란 언어를 ‘조화’란 말로 대체시킨다면 어감만이라도 좀더 근사하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소금이 ‘일미주의’가 아닌 ‘조미료’ 노릇을 하게 하란 말이겠다. 그래야 국제적으로 민주운동이 떳떳해질 것이다.

[1982. 2]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