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26)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능동과 창조

[범용기 제4권] (26)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능동과 창조


사람들, 특히 아시아 사람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생태로 산다. 그렇다고 예외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말하자면 전제군주 앞에서의 諫爭(간쟁)같은 것은 목숨건 항변이니만큼 “능동적”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러나 근대적인 혁명에까지 밀고 나가지는 못했다. 결과로는 실패작이다. 死六臣(사육신), 생육신 모두 고고학 자기희생의 의로운 자랑만을 남긴 것이 아닐까?

“어명에는 ‘거역’이 없다!”

“대통령 ‘지시’인데 우선 따르고 봐야지! 그가 그 위치를 가진 것이 ‘찬탈’이냐 ‘합법’이냐는 논하기에 너무 늦었다. ‘이기면 군왕이오, 지면 역적’이라잖나!”

결국은 “힘”이 정의다. 힘센 놈에게 칡넝쿨처럼 감겨서 살자 한다.

군인사회는 명령과 복종으로 통솔된다. 때로는 참모회의 같은데서 전략, 전술에 異見(이견)이 불꽃을 튀긴다. 그러나 마감판단은 사령관의 ‘명령’이요 ‘의견’이 아니다. “이건 명령이다” 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다음에는 전투가 있을 뿐이다. “군대화”한 “수동”이다. “군정”에 알맞은 “멘텔리티”다.

이런 현실에서 “군대”가 정부를 군대식 전투로 점령한다. “총력전”이다. 모두모두 군대처럼 되라! “항명하면 군법으로 처단한다.” “하극상”이기 때문이다 한다.

그러나 3천만 국민은 “군인”도 아니고, 군률도 싫어한다. 우리는 “로버트”도 종도, 하인도 아니다. 우리는 “오뚝이”도 “탈바가지도” 아니다. 우리는 종로네거리를 제멋대로 걸으련다. 내가 벌어 내 식구 살리고, 내 집 같고 될 수만 있으면 내 화초도 심고, 내 정원도 가꾸고 싶다. 그런데 어떤 군인이 칼 빼들고 건널목에서 눈을 부라리며 “우로 갓!” “앞으로 갓!”하고 호통을 친다며는 “저녀석 돌았나?” “진짜 웃기네!” 밖에 뱉을 말이 없을 것 같다.

어쨌든, 군사정부란 전체 국민을 수동적으로 평준화하는 것이 “평등”이고 “안보”고 “질서”라고 생각한다. “옳든 궂든 제말이 서잖으면 밸이 뒤틀려 광증이 생기는 모양이다.

다윈은 생물진화의 요인을 외적으로 환경 즉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그 더 강한 힘으로 환경을 지배하는 놈이 좋은 씨를 남겨 “진화” 된다고 했다. 그러나 “샤르뎅”은 생물 자체 안에 있는 스스로의 능동성이 새로운 창조에로 그를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심리적인 Sphere에서, 약 100만년 전에 우리 유성에 가장 운명적인 순간이 오게 됐다. “인간의 출현이다.” 인간은 전 우주의 범위와 모든 과거의 Spheres(界)를 그 존재 안에 간직하면서 그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시킬 수 없는 딴 Sphere 즉 그가 말하는 Nooshere,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지성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주, 자립, 독립된 창조하는 개체로서의 응결된 덩어리다.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를 보는 불가분, 불가압의 신상이다.

수동자는 안전하면서도 비창조적이다. 능동자는 고생과 실패 속에서도 창조한다. 지금 한국의 별같이 불꽃같이 폭발하는 지성들이 저급한 폭력에 눌려 창조와 진화의 행진에서 탈락된다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범죄에 해당된다. 백만년 걸린 하나님의 성업(聖業)을 똥 묻은 군화로 짓밟는 것이 “죄”가 아니겠는가?

[198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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