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23)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주홍글씨

[범용기 제4권] (23)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주홍글씨


“주홍같이 붉은 죄, 눈과 같이 희여지다.” 주홍이란 물감은 표백을 거부하는 색깔인 것 같다. 한번 배여들면 씻어도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죄가 죄책 죄벌 등등이 자신의 양심에 파고들 때, 그에게는 “면죄부”가 없다.

나다나엘 호오손의 “주홍글씨”를 연상한다.

그 주홍글씨는 살 속에 파고 든다. 심장의 고동 속에 섞여 돈다. 피부에 그려진 것이라면 목간통에서 해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홍글씨는 그럴 수 없다.

그 실존 전체가 그를 정죄한다. 누가 아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도 그는 탈옥수 같이 불안하다. 그까짓 것 잡혀 죽으면 그만이지! 죽어버리자! 거기에도 해결은 없다. 죽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죽은 다음의 수수께끼가 더 무섭다.

출구가 없다. “잊어버려라” 잊어지지도 않는다. “기억” 역시 신비한 심판자여서 죄과를 들쑤셔서 잠 못자게 한다. “스포츠”다. “스피드”를 낸다. 천리 만리 달린 것 같은데 사실은 챗바퀴 속을 달린 다람쥐였다. 마라톤 거리만큼 뛰었다. 그러나 벽으로 뺑돌려 막힌 감옥의 어느 홀을 돌고 또 돈 것이다.

요새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자연질서 안에서만 하려는 것 같다. 흙에서 났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 – 지극히 당연한 질서다. 그건 신진대사(Metabolism)다. 다음세대에게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생명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물의 차원을 초월한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의 질서”가 인간창조의 원형(Prototype)이다. 인간의 몸이 자연질서 안에 예속된 것은 범죄에 의한 “타락상”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다시 말한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자연”이 아니라 “부자연” 현상이란 것이다. “인간회복”이란 “원형”에로 회복된 인간상을 말한다. 적어도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걸 위해 “몸”을 십자가에 박았다. 그래서 속속들이 배여든 인간 감옥에 출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주홍글씨를 눈빛처럼 희게 씻어낸다. 죄악에서의 해방없는 인간해방이란 “Shame”이다.

[1980.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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