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21)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하늘과 땅과 나

[범용기 제4권] (21) 主人(주인)과 主役(주역) - 하늘과 땅과 나


주역에 하늘과 땅과 내가 서로 같아졌다란 구절이 있다.

내가 거처하는 방은 맨 아래층이어서 여름 더운 줄 모른다. 들창 커텐을 제쳤더니 화끈 햇살이 들이닥친다. 오늘은 진짜 여름인가보다. 계곡의 바위틈을 굴러내리는 수정같이 맑은 물줄기를 오르내리던 소년 시절이 그리워진다. 아내는 옷까지 갈아입고 “쇼핑”도 할겸 나가자고 서두른다. “쇼핑센타”에서 모퉁이를 돌며는 막다른 골목이 깊숙한 계곡에서 끝난다. 사닥다리 계단을 내려가면 꽤 큰 개천이 자갈 밭 위를 어루만지며 간다. 금년들이 여름 볕 첫날이다. 물이 맑길래 발 담글 욕심으로 맨 발이 됐다. 그러나 께름해서 잔디만을 밟기로 한다. 여기저기 하수도 물이 합류하기 때문에 개천은 “맑아도 더러울” 거라는 나의 결백성 때문이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도연명은 “魚父(어부)”의 입을 빌어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흐렸거든 발을 씻어 세상과 흐름을 같이할 것이지 뭐 그리 도도하게 고결하냐”는 나무람을 듣는다. 그때 창량의 물은 흐렸어도 오늘 여기를 흐르는 이 맑은 개울보다 깨끗했을 것이다.

나는 아름들이 느티나무 그늘 잔디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푸름이 숨쉬는 흙향기가 몸에 배인다. 뜨겁던 해도 얇은 구름 속에서 형광등처럼 부드럽다. 언덕을 덮은 숲 위를 흰 갈매기 두 세 마리 날아온다. 잔디, 갈대, 혼자 선 노목, 서로 부축하며 자라는 숲의 억억만 잎사귀들, 흥겨운 생명의 무도장이다.

지금 내게는 하늘과 땅이 한데 어울렸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까 싶어진다.

3시에 나왔는데 6시가 됐다. 일어날까 하는데 어떤 아낙네가 동무하는 큼직한 개가 다짜고짜 뛰어와 내 낯을 핥은다. 혓바닥이 산뜻하게 찼지만 친밀감각이 오히려 고마웠다. 돌아와 목욕하고 시원한 아래층에서 낮잠 잔다. 나 진정 걱정 잊은 은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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