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8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111) 역사물 단장 – 미소 공동위원회

[범용기 제4권] (111) 역사물 단장 – 미소 공동위원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는 무엇을 결정했는가? 다섯가지다.

(1) 삼상회의는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의거한 연합국의 합의 사항이다.
(2) 포츠담 선언은 전승국인 미, 영, 중, 소의 무제한적 권리를 보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로 실행하면 되는 것이요, 그 원칙에 대한 거부는 있을 수 없다.
(3)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도 조선인민에게 있어서는 그 실천만이 허락되는 것이요 결정사항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 비판과 논의는 결정사항 실천을 전제로 한 테두리 안에서만 할 수 있다.
(4) 마아샬 미국무장관은 모로토푸 소련 외상에게 보낸 1947년 5월 2일부 서한에 의하면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협정의 결정사항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민주적 권리인 자유의지 표시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5) 포츠담 선언을 실천에 옮겨서 조선에 자주, 통일, 민주적 조선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는 미, 소 두 나라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현실적 요건을 생각할 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합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 선언이나 포츠담 선언에서는 남ㆍ북 분단이란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8도선은 그어졌다.

요는 미국의 위정자가 직접 소련과 맞서는 것을 꺼릴 뿐 아니라, 소련과의 경쟁에 있어서 남한에 군사기지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전략과 일본을 재건하여 중공을 견제한다는 것, 조선을 미국의 경제권 안에 확보한다는 것 등등 이해타산이 앞섰을 것이다.

소련은 이북에 군사기지를 구축하지 않아도 된다.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면 그대로 ‘조선’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야 한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6년 1월 16일에 서울에서 예비회담을 가졌고 3월 20일 ~ 5월 8일까지 제1차 본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국축 대표는 ‘하지’ 중장이고 소련측 대표는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하지’는 민주적인 자유언론을 원칙으로 하여 모든 정당, 사회단체 등을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스티코프’는 모스크바 삼상회담 내용에 찬성하는 민주적 제정당과 사회단체만을 참여시키자고 했다. 그런 정당은 신탁 통치를 찬성한 소수 좌익정당 뿐이었고 그 밖에 100이상의 우익단체와 정당은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련대표의 불협조로 무기휴회가 됐다.

1947년 12월 24일 – 미국측 대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미소공동위원회에 협조하기를 바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정당, 단체는 지도적 지위에서 물러나기를 바란다고 공표했다. 이승만계, 김구게에서는 지지성명서에 서명한 것을 취소했고 김규식, 여운형은 공동위원회의 재개에 의한 조선임시정부수립을 추진시켰으며, 박헌영, 허헌 등은 반미궐기를 선동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

1947년 5월 14일에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지령했다. 5월 20일에 스티코프가 서울에 왔다. 21일에 재개됐다.

소련대표는 여전히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특히 신탁통치 지지를 주장하여 양보하지 않았다.

그 후에 좌우합작운동이 재연되었고 김규식, 여운형, 허헌 삼두회담에서도 원칙에 합의한 것 뿐이고 구체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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