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8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112) 역사물 단장 – 공산당의 조직 기구화

[범용기 제4권] (112) 역사물 단장 – 공산당의 조직 기구화

1917년 8월 – 신규식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당이 결성되어 ‘스톡홀름’에 있는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 접촉을 시도했다.

1918년 1월 – 이루꿋구 공산당 안에 이루꿋구 공산당 한국지부를 결성했다.

1919년 말 – 하바로프스크 한인사회당은 본부를 블라디보스독(해삼위)에 옮기고 이름을 ‘고려공산당’으로 고쳤다. 이동휘는 ‘레닌’(Lenin)을 만나 그 승인을 얻었다.

1920년 5월 – 고려공산당 본부를 ‘상해’에 옮겼다.

1920년 6월 – 임시정부는 ‘레닌’의 볼쉬비키 정부와의 사이에 아래에 기록한 조항들에 합의를 보았다.

(1) 한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할 것.
(2) 한국독립군은 볼세비키군 사령부의 지휘 아래 둔다.
(3) 볼세비키 정부는 한국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4) 볼세비키 정부는 한국정부에 200만 루불의 원조금을 제공한다.

1920년 – 볼세비키 정부가 한국임시정부에 제공한 200만 루불이 고려공산당 안에서 행방불명이 되자, 이동휘를 반대하는 여운형, 최창식, 조동우, 김단야(金丹冶) 등이 이루꿋구 공산당 한국지부에 연락하여 반고려공산당 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고려공산당은 제3인터내슈낼의 승인을 취소당했다. 그리고 본부를 ‘치타’에 옮겼다.

1920년 – 박중화, 박이규, 고순흠 등이 서울에서 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을 기도했다.

1920년 – 여운형, 김단야 등은 이루꿋구 공산단 한국지부와 연결하여 고려공산당을 ‘치타’에 추방하는 데 성공한 셈인데 그 후에 그들은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얻어 ‘상해’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1921년 6월 – 러시아의 고려공산당은 볼세비키군과 충돌해서 ‘흑룡강’ 사건을 일으키므로 해서 궤멸상태에 빠졌다.

1921년 10월 – 국내에서 조봉암, 김약수 등의 신인연맹과 원종린, 황석우, 임택룡 등의 흑양회(黑洋會)와 박렬, 정우영 등이 합동할 ‘흑조회’(黑潮會)가 발족되었다.

1922년 4월 – 조선청년연합회 안의 ‘좌파’와 이영, 김영국, 조봉암, 김약수 등은 ‘서울청년회’를 조직하고 고려공산당과 접촉했다.

1922년 – 홍명희, 박헌영 등은 ‘화요회’를 조직하고 상해의 조선공산당과 접촉했다.

1922년 김두희 등은 북풍회를 조직하고 김한원, 원무관은 무산자동회를 조직하고 박숭병은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3년 1월 – 박렬, 백무(百武) 등 무정부주의자는 풍운회를 조직하고, 김찬, 김약수 등 사회주의자는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했다. 후에 일월회(一月會)로 고쳤다.

1923년 9월 – 박렬은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진행시켰다는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 무정부주의자들은 분산하여 흑색청년회, 부정(황)사(不遑社), 흑풍회 등을 조직했다.

1923년 – 서울청년회는 노동자, 농민대회의 개최를 준비하고 있었다.

1924년 1월 – 박원문, 허정숙, 정경명 등은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했다.

1924년 4월 – 서울청년회의노동대회준비회와 북성회(北星會)의 노동총연맹준비회가 합동하여 조선노동총연맹을 조직했다.

1924년 – 북성회는 ‘재일본노동자동맹’을 조직했다.

1925년 4월 – 조선노동총연맹은 분열되어 서울청년회계(系)는 적포회(赤雹會), 사회주의자동맹, 경성여자청년회로 되었고 전 북성회(一月會)계는 경성청년회,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5년 4월 17일 – 화요회, 북풍회, 무산청년회, 노동당 등이 통합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다. 주요 참가자는 화요회계의 김재봉, 홍증식, 박헌영, 조봉암, 홍남표, 김찬이었고 북풍회계의 김약수, 고려공산당계의 주종건, 유진희, 노동당계의 윤덕희 등이었다.

1925년 4월 18일 – 박헌영, 김단야, 박원근 등은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당청년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 신의주 사건으로 조봉암 등 조선공산당 간부가 검거되었다.

1926년 – 서울청년회계의 이영, 김사국 등은 소련공산당 상해극동국에 연락하여 춘원공산당(春園)을 조직했다.

1926년 – 김재봉, 홍덕유, 강달영, 이준태 등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26년 12월 – 조선공산당의 김철수, 조선공산당의 상해파인 한위건, 양명, 서울청년회계의 이정윤, 최창익, 정백, 레닌주의동맹계의 고광수, 김강, 이인수, 한빈, 일월회계의 안광천 등은 조선공산당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M.L.당이란 약호로 이름했다.

1928년 2월 – 조선공산당에 대한 제3차 검거가 있었다.

1928년 8월 – 조선공산당에 대한 제4차 검거가 덮쳤다.

1928년 11월 – 만주지방독립군의 좌익이 중심이 되어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었다.

1928년 – 이홍근, 박석홍, 육홍근 등 무정부주의자가 재조직을 시도했다. 일부 무정부주의자는 신간회 운동을 방해했다.

1929년 3월 – 만주의 ‘국민부’를 중심으로 조선혁명당이 조직되었다.

1929년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당원에 대한 대량검거 때문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해체상태에 빠졌다.

1929년 – 안상훈 등 45명이 고려공산당을 재건했으나 검거로 끝났다.

1930년 –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은 당원검거로 해체상태가 됐다.

- 좌우분열에서 좌우합작에로 -

1946년 8월 – 북조선 공산당과 북조선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 노동당이 결성됐다. 사실인즉, 북조선 신민당은 북조선 공산당의 탄압과 흡수공작 때문에 자연해체 또는 소멸된 것이고, 자유의사에 의한 합당은 아니었다.

1946년 9월 4일 – 남조선 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남한에서는 박헌영 등 ‘교조주의’자, 또는 좌익적 모험주의자로 불리우는 ‘콩구루’가 남조선 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공산당 자체내의 부조화를 가져왔다. 진짜 ‘과격파’여서 전략적으로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청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박헌영 등은 지하에 숨었다.

1946년 9월 4일 – 조선공산당과 인민당과 신민당의 비주류가 합류하여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했다. 창당준비위원회에서의 강령은 (1) 근로인민의 이익을 보장하는 민주,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2) 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하여 인민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한다. (3) 토지개혁을 위하여 봉건적 잔재를 청산한다. (4) 친일분자, 민족반역자의 소유재산과 기업체는 국유화하고 그들의 공민권은 제한한다. (5) 민주적 노동정책, 인민의 기본권, 남녀평등권 위에선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한다. 등등이다.

1946년 11월 23일 – 남로당 결성대회가 열려서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 이기석이 선출됐다. 그 무렵에 광주에서 수인 900명이 폭동을 일으켜 15명이 사망했다. 각처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관련된 폭동과 살인사건이 빈발하고 학생들은 미군정의 국립대학 종합안에 반대하는 데모도 일으켰다. 좌익의 폭력혁명운동에 격분한 우익학생 민중들도 폭력대열로 각오하고 나섰다. 특히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이남에 넘어온 ‘서북청년단’은 이남에서의 공산당과 그 활동에 복수적인 반발을 일으켜 제주도를 점령하다시피한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섬멸했다. 지리산에서도 그런 종류의 ‘토벌’이 치열했다.

‘민전’ 산하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에서는 3월 22일 전국적으로 24시간 ‘제너스트’(총파업)을 지령했다. 남로당원 2,776명이 검거되었다.

1947년 3월 1일 – 3.1절 기념집회를 ‘좌’와 ‘우’가 따로따로 개최했는데 서울, 부산, 영암, 순천, 제주에서 두 편이 충돌하여 경관의 발포로 유혈극이 벌어졌다.

공산폭동이 격심하게 되자, 우익청년단인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광복청년단 등이 일체가 되어 폭력대 폭력으로 대결하였다.

좌익계열의 정당도 난립상태였다.

조선인민당 – 건국동맹세력

사회노동당 – 인민당의 여운형, 신민당의 백남운, 공산당의 강진 등등의 합동

근로인민당 – 공산당계의 후퇴로 여운형이 진출한 것인데,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과 강진이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7월 19일에 여운형이 암살됨에 따라 궤멸됐다.

민주독립당 – 민주통일당 창당준비위의 홍명희, 조헌식, 유석현, 조선국민당의 안재홍, 박용희, 건민회의 이극로, 박기출, 이경석, 재미한족연합회의 김호, 김원용, 전 한국민주당의 김병노, 민족자주연맹산하의 주요 정당과 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민주독립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1947년 10월 20일 – 민주독립당이 결당되어 당대표로 홍명희를 선출하고 정강으로는 (1) 자주, 민주, 통일 조선정부 수립, (2) 사대주의적 매판행위와 반민주적 독재행위 배격, (3) 계획성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조국의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을 극복한다 등등이었다.

민주독립당은 민족자주연맹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홍명희와 이극로가 이북정권에 참가했기 때문에 이 단체의 조직활동은 자연히 쇠퇴되었다.

민족자주연맹 – 은 한국민주당의 친미세력,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 세력, 김구 등의 임시정부 우파, 김규식 등의 임시정부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 홍명희 등 ‘민주통일당 창당준뷔위원회’ 관계자, 안재홍 등 조선국민당 관계자, 이극로 등 건민회 관계자, 장건상 등 근로인민당 관계자, 조봉암 등 민족자주적 사회주의 관계자 등이 총망라되어 김규식을 정점으로 상호유대를 갖고 발족한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자주연맹’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는 14정당, 50개 단체의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결집하였으나 민주독립당, 민중동맹, 신진회, 신한국민당, 건민회가 중심 멤버였다.

1947년 12월 20일에 창당대회가 열렸고, 근로인민당, 조선인민공화당, 천도교청우회, 사회민주당, 농민당, 조선공화당 등 관계인사들도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연맹 총재에 김규식이 취임했다.

채택된 정강은 (1) 사대주의 매판자본세력을 배제하고 자주, 통일, 민주적인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한다. (2)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다양성을 바르게 파악하고 조국과 민족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계획을 추진한다. (3) 계획성 있는 경제정책을 추진하여 생산수단의 현대화를 도모한다. 등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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