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28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110) 역사물 단장 –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범용기 제4권] (110) 역사물 단장 –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 좌우익 분립과 좌익폭동 -

1945년 10월 20일 – 미국무성 극동부장 빈센트는 미국외교협회석상에서 조선이 신탁통치하에 있게 될지 모른다고 시사했다.

1945년 11월 4일 – 에 이승만은 미, 소, 영, 중 연합국에 보내는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의에서 “조선통치에 암담한 공동신탁제가 제기됐다는 보도에 접하고 경악해 마지 않는다……”고 술회했다.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의는 1945년 12월 28일에 미, 영, 소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그 전날인 27일 그 정보가 들어왔다. 자주독립을 갈망하다가, 이제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환호와 축제에 극도로 흥분됐던 한국 민중은 실망과 함께 분노했다. 서울역 광장은 반탁데모로 매일 붐비었고, 시내도 마찬가지였다.

이 반탁데모에는 좌익계열도 참여하여 같이 열렬했었다. 사흘후에던가 갑작스레 좌익계열은 “신탁찬성”의 플렉카드를 들고 같은 고장에 나선다. 지령을 받은 것이라 짐작했다. 민족진영 데모대는 “저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고 남의 지령에 꼭두각시 노릇하는 사람들이니 문제삼을 것도 없다”고 냉소했다. 그러는 동안에 해외에서는 귀국한 동포들이 동조하여 반탁을 날마다 성황이었다. 이승만으로부터도 신탁반대 담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송진우는 “훈정5년”을 주장했다. 그것이 암살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46년 1월 – 삼상회의 결정지지 데모가 격화되는 가운데 좌익각당파는 통일전선 결성에 착수했다.

1946년 2월 1일 – 남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 준비위원회가 발기됐다. 그 선언문은 아래와 같은 요지로 되어 있다.

“‘민전’은 선거에 의하여 인민대표회의가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장악한다. ‘민전’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원칙에 의하여 조선임시정부가 조직될 때까지 조선민족 유일의 정식대표로서의 발언권을 확보한다. ‘민전’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트, 민족분열주의자 등을 배제했다. 민주주의적 민족 총통일체다. ‘민전’은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모든 부문을 통하여 참된 민주적 과업을 실시한다.”

1946년 2월 15일 – 16일까지의 창립대회를 열고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참가를 거부했다.

의장에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이 선출됐다. 사무국장에 이강국이 임명됐다.

1945년 8월 16일 – 이영, 최익한, 정백동 서울파(長安派)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45년 9월 12일 - ‘콩구루’가 조선공산당 주도권을 장악하고 21일에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재건파)를 조직했다.

‘재건공산당’은 그날 박헌영, 허헌, 이강국, 이주하, 이성렵 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45년 8월 - ‘콩구루’ 파는 ‘건준’ 조직을 장악했다.

1945년 9월 3일 – 허헌을 건준부위장으로,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칭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발표했다.

1946년 1월 19일 – 삼상회의 결정 지지를 발표하고 인민당과 함께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발기, 2월 15일에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박헌영, 허헌이 의장단이다.

1946년 5월 – 한민당계의 경무국장 조병옥과 검사 조재천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적발했다. 그 당시 공산당의 전국적인 빈번한 파업과 ‘사보다쥬’, 기계류와 시설 파괴 등으로 산업은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정판사 위조지폐사건도 그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런 관계로 공산당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땅에 떨어지고 학생들도 완연하게 좌ㆍ우 두파로 갈라섰다. 미군정은 공산당 불법화 방침을 세우고 일제 검거했다. 간부급은 지하에 숨었다가 많이 월북했다.

1946년 10월 1일 – 대구에서 공산당 폭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전라도 일대에 폭동이 일어났다.

1946년 10월 16일 – 조병옥 경무부장이 습격됐다.

1946년 10월 20일 – 경기도 광주, 개성, 연일 등지의 폭동에서 경찰관 2명 살홰됐다.

1946년 10월 31일 – 이후에 光山(광산), 장성, 화순, 보성, 해남, 함평, 나주, 영광, 남양, 장흥, 영암, 무안, 光州(광주), 목포 등지에 폭동이 일어났다. 민간인 사망 약 40명, 부상자 약 50명, 사망경관 7명, 부상경관 5명, 검거된 인원 약 1천 2백명이었다.

1946년 11월 11일 – 전주형무소 수인 400명이 탈옥, 11월 22일에 광주형무소 수인 900명이 탈옥했다. 탈옥 중에 15명이 사망했다.

이런 관계로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은 격화되었다. 조직체로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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