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14) 상한 갈대 – 無

[범용기 제4권] (14) 상한 갈대 – 無


“무”는 깊고 크다. “무”가 깊다. 크다 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모순일 것이로되, “상대”로 밖에 나타내지 못하는 “말”의 결함과 모순을 넘어 뛰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종교성”이 이런 표현을 불가피하게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무”에서 출발했고 “노자”도 “무”가 만유의 근원이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수(數)의 계산을 넘은 “절대”기 때문에 Define할 수 없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무”를 하나님으로 대체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객관화 할 수 없고 Define할 수 없다.

“나는 나나.” 내게 이름을 붙여서 나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는 의미에서의 상대화를 나는 허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야훼”는 칭호를 거부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칭호를 용납한 칭호다.

“무아”란 것은 “내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연에 걸린 “번뢰”에서 해탈한 나를 의미한 “무”로서의 나, “욕”(Desier)없는 나로서의 자비에 사는 나일 것이다.

“마몬”의 끈에 매여 그가 놀리는대로 춤추는 “나”는 그 기능상 꼭두각시지 “나”는 아니다. 권력의 연자 멍에를 목덜미에 메고 10메터 직경의 “원”을 왼종일 맴도는 “나”는 “나”가 아니라 당나귀다. 기능상 그렇단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나”를 확립한다. 그리고 그 “나”를 하나님과 대좌시킨다. 하나님과의 대좌에서 “나”는 죽는다. 하나님과 만난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조건에의 “엔카운팅”이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닌가?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하고 이사야는 그 소명의 순간에 절규했다.

요새 우리가 하나님의 성호를 약장사 거릿바닥 넉두리 같이 불러대는 것은 너무 경망하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그 이름이 “전매특허품”인양 팔린다. 부흥사의 푸념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 하나님과 “엔카운트”했는지는 의심스럽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언어가 달라질 것이다.

바울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산다”고 했다. 이것은 “무아”에서 “신아”(神我)에로의 삶이어서 “나”는 이미 신의 품에 던져져 죽었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산 “나”가 신과 함께 신의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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