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13) 상한 갈대 – 늙어서

[범용기 제4권] (13) 상한 갈대 – 늙어서


1971년 가을에 후배들이 주최하여 내 희년잔치(稀年)를 차려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희년”이란 것은 “人生 七十古来稀” 즉 인생이 70까지 산다는 것이 옛날부터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하는 옛 어른들 “전승”에서 이어 온 말이다. 말하자면 “장수”했다는 축하의 날이겠다.

이건 뒤집어 본다면 “이만큼 살고 죽어도 그리 한스러울 건 없다”는 말이 되겠고, 그 다음해에 죽는다해도 “단명”했다고 사람들이 애석해 하지는 않으리라는 말도 된다.

그런데 나는 그 다음에도 벌써 7년이나 더 살아서 지금 77세가 됐다. 그 때에도 “노익장” 즉 “늙어서 더욱 건강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축객들이 남긴 메모책에도 그런 구절이 많이 적혀 있었다. 지금도 종종 같은 말을 듣는다. 그러니까 아직도 “죽기까지 늙지는 않았다”는 인상인 것 같고 나 자신도 그런 실감은 없다. 그렇다고 장담은 못한다. “늙은이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는 속담과 같이 갑작스레 어떻게 “급강하”할지는 “예측불허”란 말이다. 그래서 죽었다 하자! 얼마의 사람들이 모여올 것이다.

“금년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상자는 대답한다.

“일흔 일곱이십니다.”

“였줄 말씀 없습니다” 하고 조객은 물러난다. 그리고 자기네끼리 독백처럼 주고 받는다.

“그만하면 장수 하셨어!”

슬프거나 애석하다는 것 보다도 “갈 때 잘 가셨지!”하는 운명에의 체념이거나 “장수”에의 “복”이거나 – 말하자면 그런 따위 복합 감정일 것이다.

예수는 한창 나이의 30대에 죽었다. 죽었다기 보다도 죽임을 당했다. 아무도 예수가 죽을 나이에 죽었달 사람은 없다. 죽잖을 사람, 죽어서는 안될 분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것이 모두의 진실한 판단이었다. 예수는 다시 살아야 한다. 그가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시원할까!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예수는 “장수”(壽)의 복보다 더 높고 넓고 영원한 “죽음의 복”을 택한 것이었다.

나는 종종 상상해 본다. 예수가 70, 80까지 장수했다면 그의 나중 모습이 어떠했을까? 하고.

[1977.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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