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10) 상한 갈대 – 難産(난산)

[범용기 제4권] (10) 상한 갈대 – 難産(난산)


☞ 이글은 [범용기 제4권]에서는 부분이 삭제되어있지만, [장공전집 15권]에는 그 내용이 추가로 보전되어 있다.

1945년 8ㆍ15 해방은 우리나라에 새 역사 창조의 계기를 마련했다. 강대국들의 “도마”위에 놓인 “고기덩어리”라는 실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만이라는 민족은 살아 있었다. 이 숱한 인간집단을 산채로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의 도마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마져 모르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자유하는 민족 독립국가가 주어진 것으로만 믿고 열광했다.

군정 3년 지냈고 반토막이나마 독립국가라는 명패가 붙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로서의 역사 창조 작업에 떳떳한 “명분”까지 주어진 셈이다.

나는 이 새 역사 속에서 누룩이 되고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명이 한국 크리스챤에게 주어졌다고 믿었기에, 새로운 크리스챤지도자 양성을 위한 새로운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방향으로 뛰다보니 그게 내게 맡겨진 임무로 되어 버렸다.

* * *

그 때까지의 한국교회는 선교사 시대의 교회였고 신학교도 선교사 경영의 신학교였다. 그러나 지금부터의 교회는 한국교회요, 신학교도 한국신학교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차대전 말기 선교사들이 철거한 2년 후인 1940년 4월에 조선 신학원이 서울에서 개강됐고, 그것이 1945년 8ㆍ15 해방과 함께 대학령에 의한 “한국신학대학”으로 발전했다. 이 신학교는 어떤 정권이나 금전에도 종속될 수 없는 오직 “임마누엘”의 “영광” 머무는 “장막”이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제부터의 우리교회는 우리교회임과 동시에 당당한 세계교회의 일원이어야 하며 우리나라는 어떤 경우에도 물질적 또는 정신적으로 “식민지”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고 맘먹었다.

일제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철거했던 미국 선교사들이 6ㆍ25부산피란과 이북군 후퇴를 계기로 무더기로 입국했다. 백만 단위의 이북 피란 크리스챤들이 돌아온 미국 선교사들을 구세주인양 안고 돌았다.

다소 서먹서먹해 하던 선교사들은 용기 백배, 선교사 시대의 연장에 몰두했다. 박형룡 박사를 둥굴려서 서울 남산 신궁터에 평양신학교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의 일치로 해서 이북 피란 신자들과 미국 선교사단은 한덩어리가 됐다. 거기에 이남교회의 보수세력이 합세했다. 그 “수”로 본다면 우리와 그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었다. 한 소년의 돌팔매가 중무장한 거인의 머리를 부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요는 하느님이 어느 켠에 서 주시느냐가 남은 문제일 것이다. 다윗의 배후에 수많은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하느님이 다윗켠이라는 증거를 볼 때까지는 비겁한 패잔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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