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9) 상한 갈대 – 될 번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범용기 제4권] (9) 상한 갈대 – 될 번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내가 바로 20대를 넘어선 때, 함북 경성도청 서기로 있는 내 이질(姨姪)로부터 나진항 토지구매 교섭이 왔다. 어떤 “만철”(南滿鉄道会社) 이사가 나진개발 설계도를 비밀입수한 것을 계기로 한 몫 보자는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그는 함북도청에 근부하는 내 이질에게 나진 토지매수를 위임했고 내 이질은 웅기있는 내게 부탁했다. 나는 유능한 젊은 나진 친구를 내세워 몇주일 안에 5, 6십만평 해변가 억새밭을 헐값에 샀다. 이동증명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거간료도 톡톡히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뭐냐? 팔자에도 없는 토지거간이나 한 건 해주고 나딩굴어버리느냐? “바보같이!”

그래서 어느날 그 거간 동료 청년과 상의했다. “나진 뒷산, 널평한 완경사 초장이 ‘유휴국유지’로 버려져 있다는데 그걸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임대차 계약을 해두며 어떠냐?” 했다. 수속은 그 청년이 맡아서 동장, 구장, 면장 등 관계관서에 벌찐 돌아다녔다. 그래서 계획대로 다 만들어 왔다. 후일에 “불하”할 경우에는 임대계약자에게 우선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불하료도 싸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미 받은 합법적인 거간료를 밑천으로 급행열차처럼 서울 향해 달렸다. 때가 3.1운동 다음해라, 그 조수가 나를 밀어냈다고도 하겠다.

나는 여름 방학에 돌아왔다. 그 때, 내게는 “돈” 같은 게 문제될 수 없을 정도로 “고매(?)”했다. “돈”은 “금”이 아니고 “똥”이다 하는 식이었다.

나는 귀향하여 경흥읍교회를 예방했다. 위에 언급한 “나진” 청년은 그때 경흥군청에 취직해 있었다. 그 땅 임대차 명의인을 자기 이름 단독으로 하는데 동의해 달라고 한다. 말하자면 Co-Signiner로서의 내 이름을 빼고 자기 혼자 이름만으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임대료도 자기가 단독으로 납입해왔고 그 액수도 적잖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만한 내 몫을 단번에 추불할 능력도 없었다. “에따, 먹어라”하고 도장 찍었다. 그날 밤, 그는 푸짐한 술좌석을 마련하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 무렵 백두산 목재관계로 일약 함북의 재벌 반열에 끼어든 청진의 김기덕이 나진 땅을 매점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이 나진 청년은 그 땅 임대차 권리를 상당한 고가(高価)로 그에게 넘겨줬다. 이 청년은 앉은대로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 결과로는 주색잡기에 패가망신이란 패가 붙고 말았다.

오랜 후일에 나는 미국유학에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할 나이다. 잠시 “창꼴집”에 들렸다. 아버님께서 물으신다.

“너 뭣 하려느냐?”

“교육사업 하렵니다.”

“일본놈 교육 말이냐?”

“내 나름대로의 교육 말입니다.”

“너 그 때, 계약했다던 나진 땅은 어떻게 됐니?”

“그건 자진 포기했습니다.”

“일 하겠다면서 굴러온 돈을 쫓아버렸단 말이냐? 세상 물정을 알아야 일 할 수도 있을게 아니냐?”

그리고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허기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액의 “애카운트”가 무조건 내 이름으로 입금된다! 아버님 말씀대로 “행운아”임에 틀림없겠다. 그러나 그 “행복”이 “축복”일지는 의문이다. 심상팔구는 나를 빠지게 할 “함정”이었을 것이다. “은혜”란 빈 마음에 돌입하는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고생하며 일하는데 “은혜”가 있다.

[198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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