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0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4) 序章 - 자유라는 것

[범용기 제4권] (4) 序章 - 자유라는 것


인간이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인간이 이것 저것 다 갖고 있는데 거기다가 자유까지 곁들어 갖고 싶다는 분수밖에 욕심이 아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기 위한 존재로서의 원초적인 조건이다. 인간이 “자유”를 잃으면 “주체” 노릇을 못한다. 자기가 객체화한다. 그래서 힘센 녀석의 종이 되기도 하고 폭력배에게 전당 잡힌 전당포 물건도 된다. 어떤 깡패두목은 무섭게 독재한다. 그러면서 “나는 선의의 독재자다”, “내가 너희를 잘 살게 해준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차관도 얻어주고 산업도 일으켜서 벼락부자 몇 놈이 생긴다. 가난뱅이가 갑자기 부자되며는, 들떠서 돈 귀한 줄 모른다. 돈 한푼이 인간들 피의 응고체란 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 돈이 살인, 강도, 탕녀, 잡귀들 바지가락 치맛자락에 흘러들거나 아니면 독재자 자신의 “도물시장”에 바쳐진다. 그래도 워낙 긁어 쌓은 노적가리가 크니까 그 정도로서는 바닥이 안 난다. 나라 재산이 온통 자기 사유물인줄 아는 “독재자”는 질투를 느낀다.

“네 놈이 누구덕에 부자 됐는데! 독재하려면 돈이 한없이 든단 말야! 이리좀 가져와!” 몇 억 실어간다. 독재자 버릇은 갈수록 나빠진다. “선의”로써는 “독재”가 안된다. 권력에 중독되고 권력중독은 돈이란 캠풀 주사를 맞아야 한다. 권력중독이나 아편중독이나 마찬가지다. “이놈아 그 주사약, 그 제조공장 할 것 없이 몽땅 갖다 바쳐…”, “안 바치면 뺏는다. 안 뺏기려면 죽는다”, “죽이고서 뺏는다.”

그래서 이병철은 삼십분 안에 문화재단이나 문화방송이니 하는 것들을 고스란히 뺏겼다. 독재자가 어떤 녀석을 살지게 잘 먹여 길렀다면 그건 자기가 필요한 경우에 잡아먹기 위한 “가축”으로서의 사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한번 자기의 자유를 뺏기면 그 하회는 “인간상실”인 것이다.

창세기를 읽어보라.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지어졌다. 하나님은 자유다. 하나님 위에 앉아서 하나님을 이래라 저래라 할 더 “슈퍼”한 존재는 없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라면 인간은 자유다. “자유” 없이 인간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자유는 그 자유를 갖고 하나님을 반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순종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다.선택의 자유가 그 근원에서 부정됐다면 그건 자유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로버트”다. 로버트나 컴퓨터가 아무리 영리해도 인간이 만지작거리는 단추며 “키이”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지 생물은 아니다.

예수가 열두 제자를 택했다. 그 중에는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시골사람이었지만 유다는 도시인으로서의 “스맡”한 인간이어서 “돈”의 값어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은” 30에 팔았다. 그런데 예수는 그걸 눈치챘으면서도 제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배반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유다”의 자유선택을 억제하지 않았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반역하는 유다가 기계로서 순종하는 유다보다 더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가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더 큰 경륜으로 그것을 인간구원의 십자가에 포함시켰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