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245) 北美留記 第六年(1979) - 부산 항쟁과 박정희 총살

[범용기 제3권] (245) 北美留記 第六年(1979) - 부산 항쟁과 박정희 총살


1979년 10월 17일(수) - 부산서 반정항쟁이 일어나 파출소, 신문사 등이 전소됐단다. 부상자 9백명, 죽은자 5명이란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악정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분출한 화산 분화구라는데 중대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하겠다. 정부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한다.

79년 10월 22일(월) - N.Y.에서는 청년중심으로 “대데모”를 계획중이란다. 나의 동참을 요망해 왔다.

부산서 터진 데모는 마른풀밭에 불붙듯 전국에 퍼져 서울에 밀려오르고 있다 한다. “민주”의 격랑이다. 좌익폭동이 아님은 물론이다.

해외민주단체들로부터 전화가 쉴새없이 올려온다.

전국에서 “데모”대가 달려들어 서울을 “수몰지대”같이 데모인의 “홍수” 바닥에 잠그면 박정희의 “헬리콥터”도 물고기 신세가 될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박정희와 이후락과 박종규가 KCIA 어느 비밀실에 모여 대책을 토의하고 있었다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반정부 민중 2백만(?)을 단번에 학살함으로써 정권안보를 유지했다니 우리도 탱크, 기관총, 대포 등을 총동원하여 2백만명쯤 단번에 학살해서 버릇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박정희가 뇌까리자 이후락, 박종규가 동의했다는 것이다.

경호 책임자인 KCIA 부장 “김재규”는 2백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악당괴수 두 세 사람 처치해 버리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세 두목을 쏴 버렸다. 박정희는 머리에 세 군데나 명중되어 참사했고 다른 둘도 즉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는 “민주주의 만세”를 불렀다.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자살하려 했었으나 체포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내력과 경과는 역사가 바로 쓰여지는 후일을 기대할 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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