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3일 화요일

[1250] 문익환 옥중서신 / 1981년 2월

문익환 옥중서신


“당신에게…”

거의 날마다 만나기는 해도 글로만 만난다는 것은 또 다른 만남인 것 같군요. 더 그윽하고 더 여물린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라 해도 좋겠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 신앙 아닌 인생의 궁극적인 경지는 기쁨이기는 해도, 바우와 보라가 손잡고 다니는 것을 보는 할아버지의 기쁨이기는 해도, 기쁨이라는 게 늘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나의 기쁨은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소. 웃으려다 말고 기쁘려다 마는 것이 인생인 것 같군요. “그러면 그러기를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이 세상에 슬픔이 있는 한”이라는 말이 되겠는데, 이게 정말 마음을 깜껌하게 만드는 이야기죠. 첫 번 감옥 생활에서 기쁨을 인생의 본질, 우주의 낮이라고 깨닫기는 했는데, 나의 마음은 끝내 “기쁨의 신학”을 발전시킬 심정이 되지 않았던 거요. 그러다가 두 번째 감옥에 가면서 나는 “눈물”을 주제로 하는 연작시를 지었거든요. 그러다가 이번에는 “슬픔”의 깊이를 언뜻 들여다 보게 되었구료.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소. 그러나 그 순간은 나를 아주 돌려 세우는 순간이었소.

천길 벼랑 밑에 버티고 서서
절망해선 안된다.
아니 절망해서
차라리 떨어져야 한다.

굳게 닫힌 님의 방문 앞에서
절망해선 안된다.

아니 숨이 막혀
차라리 쓰러져야 한다.
어린 심정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동주”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느냐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은 심정이구려.

눈물겨운 귀절이요, 그의 자화상, 참회록 뿐 아니라, 그의 시에서는 온통 “단풍 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지고 있군요. 그래서 동주가 읽은 “팔복”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였소.

시편을 읽으면 “언제 까지……”라는 울부짖음이 자꾸 들려 오지요. 히부리어로 “아드 마타어”, 그런데 이 “언제까지가” 동주에게 있어선 “영원히”였구료. 나는 이제야 그걸 알 것 같군요. 나는 이 영원한 슬픔이 잠깐 내 방을 찾아왔다 간 다음, 내 방 왼편 벽 앞에 노랑 담요를 접어 슬픔이라는 손님이 언제라도 와서 앉으라고 빈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자리에 마주 앉아도 보고, 그 자리에 내가 앉아도 보곤 해요.

이 나 혼자만의 방,
왼쪽 벽 앞에 담요를 접어
빈 손님 자리 하나 마련해 놓으니,
외롭지 않으이
눈만 감으면 숨소리만으로 앉아
몸을 흔드시는 당신
우리는 말을 주고 받을 필요가 없군요
사랑하는 아내, 아들 딸, 바우도 보라도
눈물겨운 벗들도 못 들어오는
이 방에
당신만은 소리없이 들어오시는구료.
반가운 손님이여
아 당신의 이름 “슬픔”이여
내가 마지막 세상을 하직할 때도
당신만은 나를 떠나지 않으리.

나는 요새 틈틈이 “타골”고 서정주를 읽는데 타골의 시적인 감성에 감탄하기는 하면서도 그리도 “인도”의 슬픔이 그의 시에는 묻어 있지 않을까?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그의 시는 인도인보다는 서구인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는 아침 해의 빛나는 은빛이 풀잎파리들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는데 해의 마음이 풀잎파리들 밑에 슬픔으로 고여 있는 것을 못 보고 있는 것 같군요. 그의 시에 비하면 동주의 시들에서는 민족적, 우주적 슬픔의 울림이 번져 나오는 것 같군요. 서정주의 시에도 자화상, 문둥이,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등 상당히 짙은 슬픔을 읊은 시들이 있긴 한데 동주의 민족적, 우주적 슬픔의 가락에 비해, 私的인 가락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김 목사님, 익환이는 건재합니다. 슬픔과 함께 무척 자란 것 같습니다. 아직 어린애라서 자라는 것이 좋군요. 언제 귀국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 미국에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슬픔을 선물로 보냅니다. 우리 모두 모두 조국의 슬픔 앞에서 목놓아 울면서 모든 것을 쓸어보내고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찾지 않으시렵니까? 사람은 진정으로 슬플 때에만 순수할 수 있고 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민족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다같이 한없는 슬픔, 절망도 그 앞에 가서는 한낱 감상이 되어버리는 슬픔에 부딪혀야 인생을 알고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일까! ……

익환은 김대중 바로 다음가는 중형인 이십년 언도 받고 지금 감옥에 있다. 나이 칠십고개를 바라보는 오늘에도 한점 흐린 데 없는 시혼을 안고 상록수 같이 젊게 싸운다. 주를 위한 수난의 고비에서 하늘의 기쁨을 읊어 감방에 하늘을 가져오던 그가 이제는 감방 속 더 깊은 밑바닥에서 불우한 겨레, 하나되지 못해 갈라서는 동지, 선배 후배들 보고싶은 그리움 …… 기쁨의 ‘지성소’인 ‘슬픔’을 안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부르짖던 십자가의 예수를, 같은 슬픔으로 손잡아 보려는 하늘 높이 자란 “혼”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은 반드시 온다. 영원한 슬픔은 역시 영원한 기쁨에의 통로가 아닐까?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걸으면서도, 날마다 죽음을 모험하면서도, “믿고 바라며 사랑하자!”고 했겠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하고 예수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1981. 2. 제3일 속간 57호]

댓글 1개:

  1. 제자이자 동지였던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 수감중일때 김재준 목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장공이 캐나다에 머물러 있는 동안 국내의 정치 현실은 상당히 폭압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장공이 한국에 있었어도... 별반 다를 바 없었겠지만... 문익환 목사는 서신의 말미에 은근히 김재준 목사가 귀국하기를 바라는 심정을 전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저 존재감 만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나같은 늙은이가 나서야 한다면 이미 진 것이 아니냐?'
    김재준 목사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했다고 한다. 그런데 범용기의 곳곳에 당장이라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적어놓은 것을 발견하면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는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인해서 여호수아는 과감하게 가나안 정복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장한 사람들 중에서 모세가 보여준 뒷모습은 가장 아름답고 안타까운 장면이라 생각된다.

    나중에 장공의 글을 살펴보면... 귀국한 이후에... 제자들이 장공을 모시는 가운데 장공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절제하고 조심했다고 한다. 그것은 행여나 자신의 행동 때문에 후배들과 제자들이 활동하는 것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새 시대는 새 의무를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새 시대는 새 인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역사 속에서 뛰어난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싶거나...
    영웅이 되고 싶었다면... 귀국을 서둘러서 강한 존재감과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을 것이다.

    평생 교육을 통해서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고 싶었던 장공은 아마도 본인이 나서서 활약하는 것 보다는...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나 후배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서 역사를 변혁시키는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가끔 윗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랫 사람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을 발견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믿어주는 것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생각을 해 보면... 장공 김재준 목사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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