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7)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3선개헌된 헌법에 의한 선거

[범용기 제3권] (7)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3선개헌된 헌법에 의한 선거
-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거 감시를 위해(1971. 4. 29.)


1971년 4월 27일에 3선 개헌된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됐다. 어차피 선거를 할바에는 공정선거라도 실시되도록 해보자는 의도에서 1971년 4월 19일에 종로 YMCA꼭대기 층에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이것은 애당초 정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에서 믿을만한 민주인사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들으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서울대 상과대학교수 한 분에게 “한일간의 경제적 제문제”라는 Keynote Speech를 부탁했다.


그는 많은 재료와 통계를 제시하며 한국경제의 “대일예속상”을 파헤쳤다. 귿고나서 회중은 “우리가 그런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뜻있는 분은 딴방으로 옮겨 얘기해 보자”고 했더니 더러는 흩어졌지만 십여명이 딴방에 모였다. 딴 방이래야 YMCA 지붕 밑 너저분한 먼지구뎅이에 망가져 내버린 의자들을 주어다 놓고 앉은 것이었다. 제일 연소자로 김지하도 거기 있었다. 이름을 무어라할까 하자 김지하는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란 원래의 이름 그대로 좋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 이름 자체가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니 규약은 따로 만들 것 없이 모든 것을 대표위원에게 맡기자고들 했다.

대표위원들이 맘대로 하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우리들 누구든 불러 심부름 시키라는 것이다. 대표위원은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셋으로 선정됐다. 그날 결의문 초안은 천관우가 쓰고 이병린과 김재준이 함께 검토했다. 이병린은 변호사협회 회장도 지낸 법조계의 중진이니만큼 그가 앞에 나섰고 광화문 뒷거리 적선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이 우리 ‘집회소’이기도 했다. 다른 책상이나 의자가 마련된 것도 아니었고 접수 ‘데스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의문에서는 ① 민주적 기본질서가 파괴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회복에 국민의 총궐기를 촉구한다. ② 이번 선거는 민주헌정의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므로 이 선거에서 부정불법을 감행하는 자는 역사의 범죄자로 민족적 규탄을 받아야 한다. ③ 국민은 집권층의 탄압과 유혹을 일축하고 신성한 주권을 행사하라. ④ 학생의 평화적 양심적 데모에 잔학한 탄압을 가하는 정부당국의 행위에 강력히 항의한다. 등등이었으나, 그 후에도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결의를 성명했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천관우가 동아일보사에서 아주 파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성명은 동아일보에 그 요지가 기사화되곤 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박정희는 김대중과 대결하게 됐다. 우리는 학생과 젊은 성직자 지방 민주인사 등을 전국 투표장에 배치하여 투표소를 감시하게 했다. 법적으로는 단일야당인 신민당에게 파견하는 투표감시원으로 등록된다. 그것은 목숨건 임전태세였다. 강원도 두메산골에까지도 퍼졌다. KCIA의 압력 때문에 버스 회사가 버스를 태워주지 않으면 도보로 산넘고 물건너 현장에 가기도 했다. 개표결과는 박정희가 643만 2828표, 김대중이 539만 5900표였다고 한다.

지방에서 돌아온 학생들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는 부정투표를 정당화한 것 뿐입니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하로 갑니다”하는 등등의 짧은 절규였다. 사실 부정은 투표 이전에 다 된 것이고 투표장에서는 이미 된 매표가 함에 던져지는 것 뿐이었다 한다. ‘도지사’로부터 면사무소 직원까지 동원되어 돈 몇원, 고무신 한 켤레, 또는 막걸리 몇 잔씩 등등으로 이미 표는 사버린 것이었고 투표장까지는 있는 트럭을 총동원시켜 강제로 날라다 놓는 것이었다. 투표율 79.8%란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선거기간 1개월동안에 ‘박’은 225억원의 통화를 찍어냈다. 그 많은 돈을 갑자기 어디에 썼겠는가는 묻는 것이 쑥스러울 것이다.

소위 부재자 투표란 것은 정부에서 도맡았으니 그 내막을 알 길이 없다. 전라, 경상지방에 다도해 수천의 섬들에서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지도 모르고 지낸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도서지방표 역시 여당에서의 임의에 맡겨진 것이었고 ‘군대표’는 검열투표였다 한다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랬는데도 표차는 백만도 못되는 94만 6천 9백 정도였다는 것은 사실상 ‘박’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민은 아직도 김대중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의 김대중표는 월등하게 우세였다. ‘박’의 마감 유세인 서울 장충공원에서의 연설은 비참할 정도였다 한다. ‘박’은 죽을상이 되어 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제발 내게 4년만 더 심부름시켜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진짜 충복이 돼 보겠습니다.…”

사람은 무지하게 많이 모였다. 나는 그날 장충동 1가 26의 경동교회 교육관 이층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박’이 울며 애걸했다는 얘기는 내 옛 친구 김영환으로부터 들었다. 김영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울면서 호소하는 꼴이 불쌍하다”, “한 4년 더 시켜보자꾸나!”, “누가 한들 별 수 있겠나?”

이것이 아마도 많은 서울 시민의 심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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