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3) 1970년대 초기의 다양한 변화(1970~1973) - “제3일” 간행 후원회

[범용기 제3권] (3) 1970년대 초기의 다양한 변화(1970~1973) - “제3일” 간행 후원회


함석헌 옹은 나보다 3개월인가 먼저 “씨ᄋᆞᆯ의 소리”란 월간지를 내고 있었다. 그이도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청빈한사(淸貧寒士)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향(同鄕) 후배인 장준하, 계훈제 등 민완(敏腕)의 젊은 동지들이 있어서 기금 2백만원을 세우고 책이 나오는대로 젊은이들이 동원되어 몇 백부씩 갖고 거리에서 마치 제7일안식일교인들이 ‘시조’(時兆) 잡지 팔 듯이 권매(勸買)해서 다음호 출판비를 너끈히 댄다고 했다.

내게도 신념은 있었다.

이 격동하는 한국 역사의 시점에서 작고 고요한 하느님의 소리가 주어진다. 출판비가 문제겠느냐 하는 믿음의 밑천은 내게도 있었고 내 동지들에게도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무일푼으로 어떻게 “제3일”을 월간으로 내겠느냐고 묻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물을만도 한 일이고 대답할만도 한 간증꺼리라 하겠다.

“한신” 제13회 출신으로, 갑산(甲山)출생 ‘이주식’(李周植)이란 다부진 사람이 있었다. 같은 함남 출신인 조향록 목사와 비슷한 타입의 인물이라고 판정된다. 그는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후배들 중의 하나다.

물정에 빠른 전성천 박사가 언젠가 “한국의 버스 씨스템은 세계제일”이라고 말하던 것이 기억나지만, 이주식은 버스회사를 창립하고 버스 40여대를 운영하는 의젓한 사장(社長)이었다.

그리고 같은 ‘한신’ 졸업생인 노신영 장로는 그 회사 부사장격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회사에서는 의무적인 ‘교양강좌’를 설치하고 십대 소녀들인 버스차장들을 여학교 기숙사 형식의 합숙소에 수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바른말, 고운말 가르치기, 중고등학교 과목 중에서 몇과목 강의, 소녀기의 건강관리, ‘예의’와 ‘도덕’ 등등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 회사 버스는 청결과 친절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일반세평(世評)도 그러했다.

하루는 윤반웅, 전학석, 노신영 등 한신 출신들이 수유리 내 방에 모여왔다.

“우리도 ‘제3일’을 후원합시다.”

“동인들은 글을 쓰고 우리는 출판비를 마련합시다. 함석헌 영감도 하는데 천명 가까운 제자를 두신 김목사님이 못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윤반웅 목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윤반웅, 전학석, 문익환, 문동환(이 둘은 동인(同人)이기도 하다), 노신영 등이 하루는 내 방에 모여 와서 후원회를 발족시켰다.

‘규약’이란 것은 그야말로 ‘약법3장’(約法三章)이어서 몇줄 안 된다.

일만원 낸 사람을 회원으로 하고, 5만원 이상 낸 사람을 특별회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최태섭 장로가 5만원을 냈다. 손순조 목사는 매년 일만원씩 보내왔다.

후원회장으로는 문익환 목사, 서기겸 회계로는 이우정 선생이 선출됐다.

내가 1974년 3월에 캐나다로 이주할 때에 후원회적금은 100만원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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