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22)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범용기 제3권] (22)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1973년 12월 13일 YWCA 알로하홀에서 모인 ‘민주원로회의’도 사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간부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이 모임이 실현되기까지에는 장준하가 무던히 수고했다.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도 나왔다. 신교측에서는 한경직을 나오게 할 작정으로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두어번 찾아갔었고 모이는 당일 오는 길에 들러서 데리고 나왔다. 이분들이 정계의 원로라지만 과거의 경력으로 볼 때에는 정적(適)이던 쓰린 기억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계로 치더라도 가톨릭과 신교, 유교, 천도교, 불교 등등의 다른 충성대상을 갖고 있는 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훈제가 사회하고 천관우가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인사말씀이라고 했다. ‘말씀’이래야 간단한 것이었다. “민주한국이 독재에로 급전직하하는 위기에 있어서 민주정치의 원로되시는 분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라도 마련되기를 바라왔습니다. 그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져서 오늘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되는 순간, 우리 임무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모임입니다. 말씀들 하십시오.” 했다.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느 분인가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모일 기회란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건데 주최하신 분들의 수고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왕 모였으니 우리 서로 기탄없이 얘기해 봅시다” 한다.

그리고 “회의 진행을 위해서 좌장을 한분 모시기로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백낙준 박사가 최연장자신데 백박사님 사회하시지요.”

만장일치였다.

결의된 중요사항은 -

① 자유민주한국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목표는 더 토론할 것도 없는 명제로 채택하고
② 우리 낫살이나 먹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또 성명서나 내고 헤어진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니 박 ‘대통령’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자.
③ 그러나 면담이 허락된 때에도 이쪽에서 말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의 말하려는 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동시에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등등이었다.

제3항의 얘기는 김수환 추기경이 자기 경험에서 하는 말이었다. 김추기경은 세 번 박정희와 만났는데 세 번 다 ‘박’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한 번은 진해에서, 두 번은 청와대에서였는데 세 번 다 식사를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교회로서의 반정부운동이 표면화한 무렵이었는데 진해별장에서 일부러 초청이 왔었다.

식사시간에 식탁에서 만나도록 짜여 있는 ‘프로’였다 한다.

식탁에 앉아마자, 박정희 씨는 자기 얘기를 끄집어 낸다. 시국담에서 시정방침에서 시정방침에서, 얘기는 그칠새 없다. 손님은 말 꺼낼 짬이 없게 군다. 그래서 듣기만하다가 ‘박’의 얘기 끝날 무렵이면 비서장인가가 들어와서 “각하! ○○ 가실 시간입니다” 한다. ‘박’은 “오, 그래?” 하고서 자리를 뜬다. 그 밖에도 두 번 청와대 초청에 응했었는데, “이번에는…” 하고 말할 항목을 외우다시피 해 갖고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하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담’했다는 실속없는 선전재료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서면진술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그때마다 김추기경이 박대통령과 직접 면담했다. 박대통령은 추기경을 만찬에 초청하여 단독회담했다… 등등으로 보도된다. 그래서 가톨릭은 ‘친여’로 번질된 것 같이 보이고, ‘박’은 기독교에 관대하다는 인상을 받고… 이래저래 ‘나’만 손해보고 이용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그럴듯해서 문서기초위원과 면담위원을 선출했다. 기초위원으로서는 천관우, 김재준, 유진오가 선출되고 면담위원으로서는 유진호, 함석헌, 이인, 백낙준, 김수환 등이 선출되었다.

초안은 곧 작성되었다. 천관우가 기초하고 김재준, 유진오가 수삼차 검토하고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최종검토를 했다. 유진오 씨는 법률가니만큼 무척 신중하고 단어선택에 정확을 기하는 것이었다. 수정에 수정을 가했지만, 자구와 용어 문제였고 내용이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검토할 때에는 유진오가 축조낭독하며 검토를 받는 책임을 졌다. 그때에는 주로 ‘이인’씨가 비판을 했다. 그분도 법률전공이라 허술한 데가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우선

① “탄원서”라는 용어가 제거됐고,
② “박대통령 각하에게”라는 구절도 제거되었다. “각하”가 다 뭐냐는 것이다. “건강을 빕니다…”도 빼버렸다. 마감에 붙이는 인사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등도 물론 제거됐다.

글 이름은 진정도 탄원도 아닌 ‘건의서’로 되었고, 우리의 건의내용 이외의 다른 아무 군소리도 섞이지 않았다.

이것을 장지에 활자로 인쇄하여 15인 연서로 청와대에 갖고 가기로 했다.

면담신청은 절차대로 제출됐지만 아무 화답도 없었다. 그래서 1973년 12월 19일에 이미 준비된 건의서를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직접 수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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