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20)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15인 민주선언

[범용기 제3권] (20)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15인 민주선언


나는 집에 있었지만 정수일 군이 간단없이 소식을 전해줬고, 함석헌, 천관우 역시 용케 CIA 감시를 벗어나 우리집에 자주 찾아와 주었다. 장준하는 자가용차가 있어서 더 자주 찾아올 수 있었다. 때로는 내가 청파동 함선생 댁에 가는 일도 잦았고, 천관우 집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결국 “민주회복을 위한 시국선언문”이 천관우 초안으로 작성되었다. 수삼차 우리 집에서 셋이 검토했다. 33인 정도의 서명이라도 받으려고 발표기간을 늦추어 보았으나 모두들 서명을 꺼린다. 결국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주동자들 이름만이었다. 장준하가 모모한 분들 서명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장준하’ 이름은 이 성명서에서 빠졌다. 그것은 장준하가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끼어들면 우리가 어떤 정당 agency같이 도매금으로 오해되기 쉽다는 것 때문이었다. 수고는 기껏하고서 이름이 빠진다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모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준하는 잘 참았고 그 후에도 계속 앞장서서 협력했다.

우리는 비밀리에 발회식을 위한 집회장소를 찾았으나 아무데서도 응해주지 않았다. 물론 ‘동창회’니 ‘계’모임이니 운운하는 구실로 정수일 군이 교섭해 보는 것이었지만 소용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YMCA Bar에 1973년 11월 5일 오전 10시 정각에 모이기로 밀약했다. 지학순 주교와의 연락은 정수일이 맡아서 원주로 오갔던 것이다. 그때에는 김지하도 자유였다.

Bar에 차 마시러 들어가는 손님을 밀어낼 까닭은 없다. 우리 몇사람이 같이 차 마시며 얘기하고 싶으니 “칸막이”를 세워달라고 해서 그대로 되었다.

바로 전날 밤에 신문기자는 천관우가, 선교사와 외국인 기자는 내가 맡아서 그들이 정각에 YMCA ‘빠아’에 오도록 연락하자고 했다. 나는 캐나다 선교사 ‘비챰’ 집에 가서 내일 열시 카메라 갖고 YMCA Bar에 오면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해 두었다. 외국기자는 어디 있는지 몰라서도 비챰도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11월 5일 열시 정각에 다 모였다. YMCA 당국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를 벽에 부치고 국민의례까지 했다. 사회는 천관우, 선언문 낭독은 내가, 취지연설은 함석헌, 그리고 교회대표로 지학순 주교가 연설했다. 성명서를 채택하고 만세삼차까지에 15분도 안 걸렸을 것이다. 한국신문기자들이 수십명 둘러서서 플래쉬를 터뜨린다. 외국기자도 몇 사람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건 김지하가 시간보다 일찍 와서 Y호텔에 유숙하는 외긴기자 몇 사람을 불러 같이 커피 마시면서 얘기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취지설명 연설에서 함석헌도 5분정도 밖에 얘기하지 않았다. 보통 그의 연설은 길어지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요약된 내용이었고 CIA의 살인행위도 실례를 들어가며 얘기하였다.



‘만세삼창’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중무장한 종로경찰서 특공대가 밀어닥쳤다. 우리는 할 일을 다했으니 아쉬울 것 없었다.
“누가 사회자요?”

“내가 사회자요.” 하고 천관우가 나섰다.

“집회 허가 맡았오?”

“안 맡았오.”

“그럼 불법집회요.”

하면서 그들은 성명서 남은 것을 압수하고 벽에 붙인 순서 포스터, 태극기 등등을 뜯는다. 신문기자들은 어느새 벌써 딴데로 뺑소니쳤다. 사진 필름 뺏길까봐서였다고 한다.

“나갑시다”하고 경관들은 말한다.

“그럽시다”하고 우리는 따라나섰다.

밖에는 커다란 트럭 두 대가 서 있었다. 아마도 굉장히 많은 사람을 잡아갈 예산이었던 것 같다.

트럭 한 대에 열댓 사람이 탔으니 엉성하기 짝이 없다.

김지하는 역시 젊은이라, “이거 플래카드라도 들고 네거리를 데모 행진이라도 해야 멋질텐데 트럭에 실려 구경거리밖에 안되니 맥빠진다…”하며 혼자 냉소했다.

종로 경찰서 대강당에 들어갔다. 텅 빈 홀에 열 댓이 앉았으니 흥이 안난다.

평생 소제라곤 해본 것 같지 않았다. 먼지 구덩이에 쓰레기가 너저분하다. 함석헌은 “이거 빗자루만 있었으면 우리가 소제라도 하겠는데!” 하며 진짜 안타까와한다.

아무데도 못 나가게 하고 순사 몇이 지킨다. 오줌은 담배공초 부벼박는 재 담은 드람통에 갈기란다. 나도 한 두 번 실행했다.

열시 쯤 들어갔는데 새로 세 시가 되도 아무 소식이 없다.

“사람 오랬으면 왜 그랬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소!” 하고 여기저기서 불평이다.

“상부에서 지시가 안와서 그럽니다”하고 무슨 주임인가 하는 경관이 들어와 대답한다. 이 영감들 가두느냐 놓느냐의 정책결정이 안났다는 말인 것 같았다.

오후 네시 쯤 돼서야 나가자고 문을 연다. 한 사람이 하나씩 맡아서 조서를 꾸민다. 그들의 조서란 것은 천편일률적인 양식의 것이다. 성명, 생년월일, 원주소, 본적지, 현주소, 경력 등등을 물으며 그것을 일일이 적는다. 그리고서는 집회허가 맡고 모였느냐는 것만 묻고 성명서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조서가 끝나고서는 사진을 찍는단다.

벽에 기대 세워 놓고 명패를 턱 밑에 비끄러매고서 찍는 것이다. 그 밖에도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이모저모로 사진을 찍고 두 손바닥을 시커먼 먹즙을 눌러 지문을 뜬다.

그리고서는 시말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무슨 시말서냐고 물으면 “집회 허가를 안맡고 모인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과 “이제부터는 허가맡고 모이겠다”는 내용의 시말서를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시말서 쓰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섯시 퇴근시간이 됐는데도 승갱이는 풀리지 않았다.

함석헌, 천관우, 나 셋만 고등계 주임실에 두고 다른 사람은 아래층 어느 방에 옮긴다. 개별격파 작전인 것 같았다.

“이건 형식뿐인데 뭘 그러십니까? 그렇게 쓰시구서 나갔다가 내일 또 데모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랫분들은 다 쓰고 나갈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서…”

그래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우리 셋을 따로따로 나눠서 조른다.

나는 지하실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고문실인 모양이다. 가지각색의 고문도구가 벽에 걸려 있다. 실지로 고문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라고 몇자 적으세요! …”

“우리 다같이 행동했는데 나 혼자 하느니 안하느니 하고 딴짓 할 수는 없지 않소?”

별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럼 세분이 같이 의논해 보세요!”하고 전엣 방에 데리고 간다. 셋이 같이 있다.

딴 녀석이 들어와서 이번에는 비교적 젊은 천관우를 조른다.

“글세, 내야 뭐, 어른 두 분께서 쓰신다면 따라가는 것 뿐이지요!”하고 천관우는 시치미를 뗀다.

그럭저럭 일곱시가 됐다.

“이거 뭐 별로 책임질 것도 없는 글짜 몇 마디 적으시면 곧 나가실텐데 왜 그러고 계십니까?”하고 고등계 주임이란 자가 끼어든다.

함석헌은, “허, 우리 뭐 나가려고 들어온 줄 아시우?”

우리는 그의 농담쪼의 진담이 그럴듯하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또 한 가지 함석헌은 각서 쓰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집회허가제 자체를 반대하노라고 그러는건데 허가 맡고 집회 하겠다고 각서를 쓴다면 우리는 뭐 되라는 거요? 제 손으로 제 눈 찌르라는 것이오?”

서장이 만나잔다고 서장실에 가자는 것이었다. 다들 갔다. 서장은 “어른들 이렇게 뫼셔서 죄송합니다…”하며 미소와 온유로 대한다. 질문 비슷한 말은 내게와 김지하에게만 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박사님 금후에도 이런 선언서를 계속 발표하시렵니까?”

나는 “선언서는 다시 안 낼랍니다”했다. 모두들 의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어서 “선언서란, 3ㆍ1 독립선언서처럼 한 번만 내면 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 선언서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 있을 것 뿐이오. 우리도 그럴 것으로 믿소.” 했다. 모두들 직성이 풀린 모양이어서 머리를 약간 끄덕였다.

김지하에게는 “금후에도 그런 시를 계속 쓰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마도 “오적” 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김지하는 “시란 것은 영감이 오면 안 쓸래 안 쓸 수 없을 겁니다”하는 뜻의 대답을 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장은 죄송하다면서 “그럼 나가십시오” 한다. 문밖에 나서자 새까만 자동차가 기다린다. 한 차에 하나씩 우리 셋을 태우는 것이었다. 지학순 주교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유로 흩어지라고 한 모양이었다.

깜장 차는 남산으로 간다. 제5국이라나 한데로 들어갔다. 거기서 또 험상스런 사복조사관에게 꼭 같은 따위 조서재료 노릇을 했다. 조서가 끝나자 옆에 있던 오(吳)과장이란 사람이 잡담을 건다.

그는 일제 시대부터 유명한 형사라고 들었다. 함북 청진 경찰서에 있었고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해삼위에도 가서 같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유도심문에는 아주 기술자라는 평이었다.

나는 오과장에게 “이북 얘기나 좀 하시구려!” 했더니 이북의 남침계획과 그 군사배치, 로케트 발사위치 등등을 자세하게 얘기한다. 그러는 동안에 장국밥이 들어와서 저녁이라고 먹었다.

국장이 만나잔다고 한다. 오과장 안내로 국장실에 갔다.

국장이란 사람은 삼십대의 다부지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제가 두시에 어른들을 다 댁으로 모시라고 전화를 했는데 바보같은 놈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참 죄송합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소개를 한다. 평양출신인데 자기 아버지도 장로고 자기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닌 일이 있다고 했다.

“저희들도 ‘애국’ 하노라고 이러는 겁니다. 우리가 이 일을 안한다면 벌써 공산당 천지가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KCIA 업무와 고충, 유신체제 선전, 박정희 대통령 선전 등등을 유창하게 늘어 놓는다.

“우리 대통령 각하는 아주 소박하게 솔직하고 애국적인 분이십니다….”

이런 선전이 끝나자, 함석헌에게 “무슨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한다.

함석헌은 예의 독설로 CIA에서 서울법대 어느 교수를 고문살인한 것부터 온갖 탄압정책을 비난했다. 다음으로 나더러 얘기하라기에 나는 “해외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서 국내사정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해외에서 보는대로는 전의 동백림 납치사건, 이번 김대중 납치사건 등등으로 우리 정부는 ‘정부’라기보다 ‘깡패집단’이라고 혹평받는 경우가 거의 전부고 따라서 국제여론에서 고립되어 갑니다. 해외국민으로서 긍지를 가지기 어려워요. 왜 정부로서 당당하게 소환하지 않고 ‘납치’ 같은 비열한 방법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라도 하려고 나왔는데 이번에도 국민의 기본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정부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이런 민주선언을 낸 것입니다….”

그러노라니 벌써 밤 열한시가 됐다.

또 깜장차에 실려 집에 왔다. 그러는 동안에 N.C.C. 김관석 총무가 우리의 석방을 위해 각처로 애타게 돌아다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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