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9)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15인 민주선언 전후의 정황과 치열한 민주학생 궐기

[범용기 제3권] (19)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15인 민주선언 전후의 정황과 치열한 민주학생 궐기


1972년 10월 18일에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 씨가 일본 동경에서 성명을 발표했다지만, 국내에서는 깜깜이었고 그 후 해외에 와서야 듣게 됐다. 그는 “10월 17일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통일을 빙자하여 자기의 독재영구집권을 노리는 놀랄만한 반민주적 조치다”라고 했다.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은 KCIA에 납치됐다.

1973년 10월 2일의 서울대 문리대학생 3백여명 데모와 선언문은 학생 궐기의 대표적인 발언이라고 보였다. 그들은 이제 ‘생존권’ 자체를 들고 나왔다.

“전국민 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잔혹한 현실을 이 이상 더 좌시할 수 없어 각자의 양심이 명하는대로 분연히 궐기한다”라는 전제에서

① 정보파쇼통치의 즉시 중지와 자유민주체제의 확립② 대일예속화의 즉시 중지와 민족자립경제체제의 확립③ 중앙정보부의 해체와 김대중 사건의 진상규명④ 기성정치가, 언론인의 맹성 촉구 등등이었다.

1973년 10월 4일에 서울대 법대학생 3백여명과 서울대 상대생 2백여명도 각기 선언문 발표, 데모에 나섰다.

모든 데모는 교문밖에까지 나갈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1973년 11월 5일의 15인 민주선언이 나온 후, 같은 날에 경북대생 2백여명이 노골적인 반정부데모를 감행했다. 11월 7일에는 서울대 공대학생 5백여명이 교내집회 데모,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11월 8일에는 서울대 교양학부생 1,400여명과 가정대학생 150여명이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1973년 11월 9일 고대생들은 구속학생 석방요구 서명운동을 전개했도 같은 날에 서울대 농과대학, 서울대 치과대학도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1973년 11월 9일 – 같은 날 한국신학대학생들이 반정부 선언을 발표했다.

그후 학생궐기는 매일 계속됐다. 일간신문에서 크게는 못내도 서너줄씩 삼단기사로 학교이름, 데모학생수, 잡힌 학생수, 마무리 등은 빼지 않고 발표할 수 있었다. 방송으로서는 ‘기독교방송국’에서 교묘하게 자세한 진상을 보도하곤 했다. 그래서 기독교 방송이 전국 청취자를 독점하다시피 됐다는 것이었다. 이제 List를 적는다면 1973. 11. 12일에 이화여대생 약 4천명, 13일에 이화여대, 감리교신대, 고려대생의 교정안 집회, 14일에 고대, 연대, 성균관대, 서울신대생의 반정부집회, 15일에 고대생 2천여명 시위, 16일에 연대생 2천여명, 숙대생 3천여명 시위집회, 17일에는 서울대 음대생, 서강대생, 한신대생의 단식투쟁, 19-20일에는 서울대 사범대생 2천여명, 경희대, 한신대의 궐기가 있었다.

그래서 1973년 11월 21일에는 서울대의 여덟 단과대학에 휴강조치령이 내렸으나 학생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12월에 들어서는 부산수대, 경북대, 영남대, 전남대, 광주제일고 등이 반정부투쟁에 합류했다.

1973년 11월 28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여섯 단체 공동주최로 유신체제 비판 구국기도회가 열렸다.

11월 29일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언론자유를 위한 결의문”이 발표됐다. 이튿날인 11월 30일에 중앙일보, ‘동양라디오’ 기자 150명이 “말살된 언론의 기본권을 다시 살리자”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에 나섰다.

12월 3일에 동아일보 기자 약 260명이 집회를 열고 데모관계 보도의 제약에 항거하고 언론자유수호선언문을 발표했다.

1973년 12월 4일에 각계의 치열한 반정부 기운에 압력을 느낀 김종필 국무총리는 종교계, 학계, 언론계와의 ‘대화의 광장’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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