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8) 캐나다에 갔다 오고 – 다시 서울에

[범용기 제3권] (18) 캐나다에 갔다 오고 – 다시 서울에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도 ‘제3일’을 위한 글을 써 보냈다. 이상철 목사는 헌 자동차를 몰고 나와 함께 캐나다 동부지방을 할리팩스까지 역방했다. 그 일기는 1973년 9월호(제36호) ‘제3일’에 “오토방랑 10,700리”라는 제목으로 발표돼 있다.

‘방랑’에서 돌아오자 귀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 1973년 7월 6일에 박형규가 정부전복음모라는 엉터리 죄목으로 구치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왔다. 3월 부활절 때 남산 잠두에서의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학생들이 “민주주의는 부활한다” 등등의 전단을 뿌리다가 잡혔는데, 자금출처가 박형규였다는데서 구속된 것이라 한다.

나는 여기 있을 경우가 아니라고 느껴서 곧 귀국하려 했다. 이민국에 갔더니 이민국 차석이란 분이 진정으로 만류한다. “국내에 있었대도 망명해야 할 처진데 왜 구태여 돌아가려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간다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영주권 신청을 해 놓을테니 일이 생기거든 즉석에서 다시 오라고 한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도 특별취급으로 즉석에서 비자를 주도록 공한을 보낸다고 한다. 스캇 박사도 일부러 오셔서 만류하셨다. ‘신자’ 더러는 “김목사 신발 감춰 놓으라”고 농담하셨다.

바로 얼마 전에 본국 다녀온 토론토의 김희섭 박사 말에 의하면, 서울에서 일본 ‘달각바리’들 설치는 꼴, 일반시민의 무표정한 체념상태, 이대로 간다면 민족자멸이란 결론밖에 없을 것 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래도 민주운동에 앞장섰다는 늙은이들이 가만 있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나는 부랴부랴 떠났다. 그것이 아마도 1973년 9월이었던 것 같다. 이상철 목사는 내가 나가면 구속이라도 될 것 같았었는지 전송한다면서 LA로, 다시 하와이에까지 따라와 하와이 비행장에서 작별했다. 하와이 사는 김봉화 여사와 그의 부군도 비행장까지 나와서 “이제라도 도로 들어가자”고 졸랐다. 나를 아껴주는 그 애뜻한 충정이 너무나 고마웠다.

김포공항에서 민주수호 연락원(?)인 “정수일”군을 만났다. 혼자 나와서 마치 정보원이 끌고 가듯이 나를 끌고 저편으로 걷는다.

“지금 함석헌, 천관우 등 여러분이 김박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거 뭔가 해야지 이렇게 있어서야 되겠나 하고 날마다 걱정이랍니다. 8ㆍ15에 민주성명이라도 내려 했는데 못하고 말았으니 김목사 오면 곧 착수하자고 고대한답니다. 우선 김목사님 의사를 전해야 할텐데 백지 서명이라도 제게 해주세요” 한다. 나는 그를 신임하는 처지였기에 백지서명을 해 줬다.

정세는 폭발적이었다. 김대중은 8월 8일에 동경 ‘프린스 호텔’에서 박정희의 정보원 손에 납치되어 구사일생으로 지금 자택감금을 당하고 있다. 학생들은 데모에 나섰다가는 잡혀 간다. 그러나 일반 시민은 꿀먹은 것도 아닌데 ‘벙어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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