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40)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은용ㆍ행강 결혼하고 캐나다에

[범용기 제2권] (140)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은용ㆍ행강 결혼하고 캐나다에


1969년 -

그 당시 이상철 목사는 뱅쿠버 교회를 사면하고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에 전임했다. 무대가 넓어진 셈이다.

신자가 은용을 초청했다. 은용은 뱅쿠버 도착 이목사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대륙횡단 토론토로 갔단다. 그 무렵의 캐나다 이민법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은용은 그동안에 신당동 손준조 목사 장녀 손행강 양과 사귀고 있었다. 은용은 일편단심인 모양이었지만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손목사는 다소 생활에 여유가 있는 축이었고 ‘행강’은 첫 따님으로 귀엽게 자란 처녀여서 무일푼의 ‘시집’에서 고생을 감당할지 의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자녀들의 연애관계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온전한 자유분위기랄 수 있겠다.

은용은 상당히 초조해 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손목사의 직장인 어느 예식장 사무실에 손목사를 방문했다.

“은용이가 행강양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인 것 같은데, 그것이 성취될 수 있는 소망인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자녀들의 ‘배우자’ 결정에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치는 채면서도 손목사님께 여쭙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혹시나 그런 내 태도가 실례였다면 사과할 겸 오늘 찾아뵙는 겁니다…” 했다.

손목사는 ‘천만의 말씀’이라면서 “그렇게 과분한 혼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딸애에게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애는 제 방에 누워 울기만 하길래, 나는 영문을 몰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잘못 권했다면 용서해라.’ 그랬더니 그런게 아니라면서 행강은 은용군과의 결혼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아마도 그러고보니 부모의 사랑에서 떠나는 서러움이 북바친 모양입니다…”했다.

그래서 나는 은용에게 교제를 계속하라고 일렀다. 은용은 날마다 나갔다. 교제는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얼마 후에 행강의 허락을 받았노라면서 좋아하며 들어왔다. “사랑을 표시하더냐? 애교로 맞이하더냐?”하고 나는 따졌다. 끝없이 강가를 같이 걸으면서 숨김없이 얘기했고 사랑도 서로 고백했고 애교로 대해주기도 했다고 은용은 대답하는 것이었다.

은용은 매일같이 그 댁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곤 했다. 그래서 하루는 집에서 ‘디너’를 마련하고 행강을 초청했다. 그 자리에는 이우정 선생도 참석했었다.

아무리 말을 시키려해도 시종 침묵이었다. 뭔가 아직도 석연찮은데가 있지 않은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됐다.

은용이 캐다나로 떠날 날짜는 두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을 서둘렀다.

경동교회에서 강원용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신부 모두 의젓했고 하객(賀客)은 초만원이었다. 손님들에 대한 답례로는 포켓 성경 한권씩을 드리기로 했다. 피로의 다과는 경동교회 여신우회에서 대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진 찍고 문간에서 손님들께 인사드리고 신부는 시어머니 팔을 끼고 문밖 계단을 내렸다.

그 길로 신랑 신부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온양온천(?), 어디어디, 제주도까지 돌아다니다가 열흘만엔가 온다고 했다.

수유리 집이 하두 초라해서 여기저기 딴 숙소를 마련해 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안방을 신방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온돌, 장판, 도배 모두 새로 했다. 그러나 ‘스팀온돌’ 생각은 미처 못했다. 그만하면 ‘신방’ 기분도 안나는 것이 아닐 것 같았다.

3선개헌 때 같이 일하던 정객들이 보낸 어마어마한 화분들도 조처하기 힘들 정도였다.

신랑 신부는 신방에 돌아와 행복한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은용은 캐나다로 떠났다.

비행장에서 탑승시간이 다 돼서 승객이 다 들어갔는데도 은용 행강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조마조마하던 최후 순간에 둘이 나타나 들어가기는 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실컷 울었던 모양이다.

은용은 제 돈 만들 기회가 없었기에 혼비, 여비 등을 내가 댔다.

은용이는 캐나다 도착 즉시로 행강을 부양가족으로 초청했다. 수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두 달 동안 행강은 수유리 집에서 시부모 모시고 맏며느리 구실을 착실히 했다.

식모애를 직접 지도하며 아궁이마다의 연탄도 깔축없이 보살폈다. 본가에 가서 얼마 지내라 해도 한사코 가지 않는다. 어쩌다 갔다가도 꼭 그날로 돌아오곤 했다.

언제나 명랑해서 외로운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거의 매일 시내로 나갔는데 현관에 들어설때면 언제나 반가운 미소로 맞이했다.

‘지영’이 두 살때였는데 혜원이 한신대 도서관에 근무하기 때문에 지영이는 우리집에 맡기고 나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봐줬지만, 행강이도 몹시 귀여워했다.

어느 더운날 우리 식구는 지영을 데리고 남산 꼭대기에 소풍을 갔다. 남산 잠두에서 을지로 아스테리아호텔까지 행강은 지영을 안고 걸었다. 을지로에 와서야 내가 대신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무겁다고 느꼈다.

행강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싶어서 미안했다. 그가 티없이 참았던 것은 그때사 알았다.

캐나다 가면 자동차를 운전해야 할거래서 가까이 있는 운전강습소에 다니면서 운전도 배웠다.

결국 수속이 다 돼서 떠나게 됐다.

무슨 책 쓴 고료였던가? 그 때에는 한국돈으로 표를 살 수 있었기에 그만큼한 액수를 나는 국민은행에 저금해 둔 것이 있었다. 그걸 몽땅 찾아 행강의 여비에 충당했다.

얼마 후에 예정대로 행강은 캐나다로 떠났다. 혼자였지만 비행기 안에서 동행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면서 보냈다. 낯선 외국이지만 둘이 서로 도우며, 은용이는 공부도 할수 있을 것 같아서 가는 사람, 보내는 사람의 꿈은 푸르렀었다.

십년 예정으로 터 닦고 세우라고 부탁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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