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9)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박형규와 그 그룹

[범용기 제2권] (139) 잠시 “런던”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1969) - 박형규와 그 그룹


내가 삼선개헌반대에 나섰을 때, 박형규는 ‘신동아’엔가 “노(老)목사의 비장한 사회참여 결단…”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즉 ‘비장’할 것도 ‘결단’이랄 것도, ‘사회참여’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목사로서 최소한의 증언을 남겼다면 남긴 것 뿐이다.

나는 사실, 한국교회도 “No!”라고 증언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런던 간 동안에 장준하가 나를 대신해서 내 이름으로 여러번 교회에 격문을 보냈었다는데 그야말로 광야에 외치는 소리랄까 메아리가 없었다 한다. 뒤늦게 N.C.C.에서 짧은 성명이 나왔었다고 들었다.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하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거의 일치된 대답이었다.

나는 말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 “정부에서 하는대로 하는 친여적인 행태는 ‘정치’가 아니고 정부의 잘못을 충고하는 것만이 정치관여냐?”고.

“김목사(나를 의미한다)가 이번에 정치인과 관계없이 순 교회 지도자로서 교회에 호소했었다면 우리도 다 따라나섰을 거요”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진짜 그랬더라면 그들은 “목사 내놓고 정치에 나서라”고 대들었을 것이 아닐까?

“‘삼선개헌반대’ 운동은 ‘범국민투쟁위원회’로 발족했고 정치인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그들은 ‘정치인’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참여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이 자기들 주권을 수호할 유일한 근거기 때문에 그걸 양보 또는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주권의 양보 또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운운했다.

이 말은 3선개헌반대위원회 발대식 때 ‘이병린’ 변호사가 연설한 내용의 한 구절인데 나도 목사들에게 같은 말로 설명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투쟁위원회’란 이름에서 ‘투쟁’이란 단어가 기독교인의 성미에 거슬린다고도 했다.

의를 위한 ‘투쟁’을 회피했다면 예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대답했다. 예수님도 세상에 싸움을 일으키러 왔노라 하지 않았는가? 하고 나는 항변했다.

나는 3선개헌반대 발기인 명단에 박형규와 신애균 여사를 기입했다. 박형규는 그 당시 ‘기독교사상’ 편집책임자로 있었는데 기독교서회 김춘배 총무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이름 내기를 꺼려했다. 신애균 여사도 가정사정상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오라, 가라” 하지 않을테니 이름만 빌리라고 했다.

뱃장세기로 이름난 ‘이태준’ 노(老)목사도 처음에는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중도에서 이름을 뺐다.

김대권인가 하는 사위님이 청와대 검찰담당관으로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박형규는 ‘기독교사상’지 8월호였던가를 ‘3선개헌반대 특집호’로 편집, 김춘배 총무의 인허없이 돌격 간행, 비밀 배부에 성공했다. 한 획기적인 Document였다고 본다. 거기에 나와의 인터뷰 기록이 자세하게 게재되있다. 이 책은 곧 발매금지로 압수됐지만 퍼질대로 퍼진후였다.

하루는 박형규가 어느 치벽한 다방에서 자기의 숨은 동지들을 내게 소개했다. 이문영, 서광선, 현영학, 이극찬(?), 홍동근 등등이 아니었던가 싶다.

행정학 박사로 고대 교수인 이문영은 “3선개헌이 통과되면 국민은 할 일을 다 뺏긴다”고 했다. 한 사람이 나라의 대소사를 혼자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할 일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박정희가 독재자로 군림할 것과 민주분권제도가 사멸할 것을 앎시한 말이라 하겠다.

이분들이 후일에 ‘제3일’ 동인이 되어 4년을 하루같이 집필했던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