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5일 화요일

[1231] 나의 입장 / 1979년 5월

나의 입장


(1979년 5월)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전호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는 것과 “나는 코리언이다.” 하는 두 가지 입장을 밝히면서 현 단계에서의 나의 태도를 표명한 바 있다. 그것이 어떤 메아리로 되돌아올는지, 또는 아무 메아리도 없이 사라질지 나로서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침 자체를 보시는 것이고, 그 외침을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내 양심에 속삭이는 ‘작고 고요한 소리’를 동굴 속에서 외치고 있다.

이번에도 “나는 자유인이다.” 하고 외쳐볼 생각이다. 내가 나를 “자유인이다.” 하고 규정짓는 것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한국의 재래종교로서는 불교, 유교, 도교, 또는 토산 종교인 동학도 ‘무교’란 토양에 뿌려진 씨이기 때문에 그 흙의 영향에서 온전히 탈피할 수 없었다는 것과 기독교에서도 그 영양소를 건설적으로 섭취하는 것이 선교의 지혜라는 방향에서 많은 시사를 던지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의 어릴 때 종교생활을 돌이켜본다. 불교는 나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 도교적인 자연과 자족 사상은 실제 어른들의 사고방식에 다분히 배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다. 그러나 유교는 그 당시에 국교였고, 선친이 유학자(?)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섯 살 때부터 앵무새처럼 한문을 외웠다. 아홉 살 때까지 그렇게 지냈으니 일생의 성격 구성에 그것이 무관했을 리가 없다.

유교가 윤리적이란 것은 어린 마음에도 강하게 어필됐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효도가 모든 윤리생활의 근본이라고 한다. 『논어』, 『맹자』 등에서도 그러했지만, 거기서는 대범하게 원리적인 것을 말했기 때문에 나 자신의 실제 문제로 파고들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효경』인가 하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도저히 효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나는 ‘불효자’다 하고 스스로 젖혀두었다.

밤에 부모님이 주무시기 전에 내가 자서는 안 된다, 부모님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큰절을 하면서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자리에 누우라고 한다. 아침에 부모님보다 늦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침에 또 절하면 서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인사드리고 이부자리를 거둬드려야 한다. 이것이 소위 ‘혼정신성(昏定晨省)’이다.

부모님 옆에서 잘 때에는 팔, 다리를 쭉 뻗고 자서는 안 된다. 무릎을 꼬부리고 조심성 있게 자야 한다. 부모님이 조금이라도 불편하신 것 같을 경우에는 지체 없이 깨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부모님이 아프실 때에는 며칠이고 옆에 모시고 밤을 새야 한다는 등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맘에 있어도 해지질 않았다. 더군다나 『예기(禮記)』라나 하는 책을 읽어보면 그 관혼상제(冠婚喪祭), 특히 상사와 제사에 있어서의 복잡한 예법은 읽어도 분간할 수 없고 분간이 간대도 그대로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할아버지 상 때, 진공단 수의 일습(一襲)을 입히시는 선친의 익숙한 솜씨에는 어린 마음에도 스스로 감탄했다. 『주례(周禮)』 책을 외따로 외우신 것 같았다.

조부님 생전에 우리 아이들은 무서워서 감히 그 앞에 서지도 못했다. 재롱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서당은 글방이란 이름의 감옥이었다. 밖에 나가 뛰놀다가는 물푸레 채찍이 부러지도록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어린 ‘혼’이 자유분방할 까닭이 없었다. 더군다나 유교 문화는 누구 말마따나 노인 문화였다.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 ‘젊지 않아야’ 사람이란 말이다. 그래서 13세에 장가들어 어른 구실을 하고, 40에 손자 보고 늙은이 행세를 한다.

한국 문화는 유교에서 젊음을 잃었고 민족은 그 생명이 늙었다. 시대와 세대교체라는 갱신법칙이 없었더라면 영세 멸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개화운동과 기독교 선교가 노쇄한 한국 민족에게 생명의 활력소를 심었다.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이 작용했던 것이다.

서당이 우리 동리에서 없어진 다음에 나는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님은 형님과 함께 밭에 나가시고 나는 아침 일찍 약 반 시간만 한문을 배우고서 해질 때까지 자유였다. 자연 속에서 자유로 뛰며 놀았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쏟아지는 소낙비와 앞 시내의 맑은 물줄기, 거기다가 벼랑 밑 청석벌을 꽉 채운 버들숲, 쨍쨍한 햇빛, 꾀꼬리 노래, 제비들 재재거림, 초가을 귀뚜라미 소리 등 그 속에서 혼자 맘대로 뛰며 걸으며 오르며 내리며 쏘다니는 소년이었다.

내 여덟 살 때쯤부터 개화운동의 간부 중 한 분이신 서울 백부님께서 개화운동에 필요한 서적들을 소포로 보내왔다. 그때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도 보내셨다. 나는 소위 신학문에 접할 수 있었다. 경원 함향동 외사촌 형님 두 분이 나를 각별하게 사랑하셔서 나를 자기들이 만든 향동학교에 넣고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 후 수다한 곡절을 거쳐, 1921년 나는 서울에서 그리스도인이 됐다. 이건 내 부모님을 포함한 내 가문에서도, 신문화의 선봉을 섰다는 내 외갓집에서도, 서울의 내 백부님까지도(그가 반대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원한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으로 보더라도 나의 그리스도 신앙이 나 자신의 결단만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안다. 성령의 역사를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님 부흥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결단했다. 그 순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경험했다. 지금까지 유교적인 윤리와 규례에서 해방했다. “분토같이 버렸노라”고 한 바울의 말이 영락없는 내 말로 되었다.

나는 아버님의 꾸지람도, 가문의 물의도 한 점 두렵지가 않았다. 아버님께 전도의 서장(書狀)을 거의 매일같이 올렸다. 제사의식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불효자란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나는 도도했다. 백부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오히려 나를 감싸주셨다. 돈도 이름도 지위도 나를 얽어매지 못했다.

그러면 내가 경험한 크리스찬 자유란 어떤 것이었는가? 나는 그때 경험을 지금 이렇게 정리해 본다.

(1) 하나님이 옳다 하시거니 누가 나를 정죄하리오(로마 8:33, 34) 하는 해방감이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성령의 내주(內住)와 내주에서 오는 영의 즐거움에서 확실해진다.

(2) 죽음과 심판의 무서움에서 해방된다. 나는 예수 믿은 다음에도 심판이 무서웠다. 죽음보다도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설 것이 무서움의 기다림이었다. 공중에서 나팔소리 들릴 때, “무서워 떨며 바위여, 날 가리우라.” 하지 않을까? 자신 없었다. 따라서 재림 시기가 지연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타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예수 믿음으로 죽어서 천당 간다. 예수 신자라는 ‘교인증’이 천당에의 ‘입장권’이 된다. 나는 임종하는 신자의 갖가지 신앙 미담을 귀담아 듣는다. 기도와 찬송으로 고요히 사선을 넘는 신자의 아름다운 임종을 직접 보기도 했다. 이 세상 것을 누가 바라리요, 영원은 내세에 있다. 이런 신앙에서 나는 번뇌의 고해에서 자유함을 느꼈다. 현실을 멸시하고 발이 구름 위를 걷는다. 신선의 거룩이랄까? 그런 기분도 없지 않았다. 하나님이 옳다 하셨으니 내가 타계주의든 현세주의든 크리스찬 자유에의 열쇠였던 것이다.

동경의 청산 신학교에 갔다. 나는 거기서 신약교수 컬리 박사로부터 묵시록 강해를 들었다. 그때 그 무서운 심판 광경을 속죄의 그리스도와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더블 캐릭터’일 수는 없으니 우리는 묵시록보다는 복음서에서 그리스도 상을 탐구해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묵시록은 핍박시대에 수난 성도들의 ‘소망’을 북돋워주기 위해 쓰인 상징으로 표현한 ‘묵시문학’이라고도 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고정된 교조적인 물상(物相)이 아니라, 변천하는 시대와 세대에 자유로 변모하며 생동하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걸 나는 실감했다.

바울은 인간 실존이 원죄적으로 타락되어 있다고 보았다. 나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렇게 보았다. 나는 원초적인 창조질서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죄도 죽음도 깃들일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은 자연 질서에 속한 피조물이므로 신진대사의 필연에서 삶이 조절된다. 거기에는 도덕적 가치나 종교적 신앙이나 인격적 책임이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대립되는 자유하는 인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자연 질서의 예속물이 아니라, 자유하는 영의 질서에 속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인격적으로 교류하는 사랑으로 사는 한, 영적인 존재요, 그의 몸은 영적인 몸일 것이다. 낙원의 삶이란 그런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기중심으로 될 때 그의 영은 이미 영의 질서에서 자연 질서에로 타락했다. 그는 자연 질서에서의 신진대사 법칙에 예속된다. 나서 자라서 늙어 죽는 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본래적인 인간 모습이 아니다. 원래의 인간 실존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육의 몸이 영의 몸으로 변화될 성질의 봄이었을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고 한 구절도 있다. 예수의 몸은 다양했다. 탄생설화에서의 예수의 몸은 ‘신일인(神一人)’으로서의 그의 존재를 의미한다. 선교시대의 인간적인 몸, 그러나 물위를 걸으시고, 변화산상에서 빛나신 몸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영적인 몸이었다. 그밖에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의 ‘제물’로서의 몸, 승천하시던 완전 자유의 몸, 다시 오실 그 몸, 몸의 형태는 다양하였으나 그로서의 인격적 정체성은 바뀐 것이 아니었다. 다만 변화와 상승을 보여준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타락 이전의 인간상 회복’이라 하겠다. 타락 이전에는 ‘죄와 죽음’이 인간 실존에 관련되지 않았다. 죽음은 죄의 값으로 인간의 존재 속에 침투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영의 질서에서 자연 질서에로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이 번식만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러기에 우리는 타락 이전의 ‘영의 몸’,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몸, 먹고 마심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하는 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성서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말이다.

부활, 승천, 재림의 예수의 몸은 인간존재의 전형이라 하겠다. 우리도 지금 이 작은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살고 있는 것이다.(골 3:3)

언젠가는 우리도 영의 몸을 입을 것이다. “우리가 흙으로 된 첫 사람(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처럼,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고전 15:48)라고 한 바울의 예언은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너무 ‘나이브’한 신화라고 구석에 밀어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밀어버리고 남는 것은 무언가? 생명이 사망에 삼킨바 되는 인간 황폐만이 아닐까?

“미래를 아노랄 수는 없지만, 과학적인 연구와 창의로 좀 더 낫다고 생각되는 것을 자꾸자꾸 만들어가노라면 무언가 나오겠지.”라고 한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궁극목표 없는 발걸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갈 우려가 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 동양에서의 석가, 공자, 노자, 그밖에 선지 성현들의 길잡이, 방향 지시가 없었더라면 그 문명이 이만큼 인간됨의 빛과 길과 진리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의심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리새적 율법주의의 속박에서 탈출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에서 경험했다. 율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분간해 준다. 그리고 선은 행하고 악은 행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선을 행하면 살고 악을 행하면 죽는다고 심판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성은 원죄적인 이율배반을 품고 있다. 행하려는 선은 행하지 않고 행하지 않으려는 악은 행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사형선고자요, 구원자는 아니다. 사형선고자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형받아야 할 내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죽음에 이르는 범죄성을 탈출할 능력이 없다. “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하고 그는 고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었다. 새로 창조되는 자기를 발견했고 계속 발전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면한다.(갈 5:1) 그는 이제 교권자인 바리새인, 제사장 족속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정권자인 헤롯왕이나 로마 총독도 안중에 없다.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선포하고 그가 시키시는 말씀을 대언한다. 그래서 잡히고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육로 해로에 무수한 행로난(行路難)을 겪어도 노상 자유롭고 즐거웠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고린도후서 6장 1~10절 까지의 역설적인 크리스찬 자유를 과시했다. 그를 헐뜯는 자들에게 그는 “우리 마음은 넓게 열려 있다. 우리를 향한 그대들의 마음이 좁아진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그대들 자신이 좁힌 것이다.”(고후 6:1, 12) 하고 말한다.

나는 바울을 흉내낼 만큼 거물급의 인간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주의에서 해방된 것같이 나도 유교와 모든 원시종교적 전통과 습성에서 해방된 것을 인식한다. 교리 신조 등 바리새적인 번뇌에서 속죄 사랑이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그를 영접함으로써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도 경험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존 녹스(John Knox)는 말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사랑 안에서 끝없고 그림자 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는 순교의 사랑이 부러워서 기독교도를 학살한다는 마호메트 군을 찾아갔었지만 학살은커녕, 대접만 받고 실망하며 돌아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사나운 이리도 순한 강아지같이 그를 따랐다는 것이다. 동물에까지도 통하는 사랑의 자유라 하겠다.

나는 권력에서의 자유, 소유(경제적)에서의 자유, 공포와 죽음에서의 자유를 염원하며 아시시의 성자를 사모했다. 사실 내게는 소유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경 청산학원에서 신학을 무일푼의 성자(?)같이 마쳤다. 그러자마자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입학 허가와 장학금 지급 통지가 왔다. 역시 무일푼의 신세로 태평양을 건넜다. 나는 청산학원 시절에 긴 하기방학을 텅 빈 기숙사 독방에서 뒹굴며 지냈다. 지진으로 무너진 청산학원 교사(校舍) 재건공사장에서 8시간 노동하고 남은 시간은 문학작품이며 사상서적을 읽기에 바빴다. 읽으니 쓰고 싶어졌다. 그것이 수필일 수도 있었고, 소설일 수도 있었다. 뭔가 쓰고 싶어서 써놓는 것뿐이요, 작품을 써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하루는 이노우에(井上)라는 일본 친구가 내 방에 찾아와 뒹굴면서 내 원고꾸러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모두 일본말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그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 그는 “야, 김군 대단한데! 이거 교우회보에라도 내자.”고 했다. 나는 “웃기지 말어.” 하고는 가로채서 구석에 팽개쳤다. 그래도 아주 없애버리기는 아까웠던지 오시이레(벽장) 속의 글꾸러미는 부피가 늘어갔다. 졸업하고 그해 늦은 가을에 미국으로 떠났다.

“이건 불쏘시개다.” 하며 내가 머물던 방 학생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아마도 불쏘시개로 식당 주인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 내가 문학을 그냥 밀고 나갔더라면 작가라도 됐을까? 이류작가 비슷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같이 센스가 무딘 인간으로서는 진짜 작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신학의 피안을 향해 대양에 노를 저었을 때, 나는 비상한(?) 각오로 모든 비기독교적 또는 비직접적인 과거를 단절하려 했다. 그것은 크리스찬 자유가 단절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묵은 생활과 습성에서의 단절, 아시시의 성자도, 야스나야 폴리야나의 톨스토이도, 나사렛을 떠난 예수도, 빈민굴에 뛰어든 가가와도, 더 높은 차원이랄지 몰라도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석가모니도 그러했던 것이다. 바울도 내가 전에 소중하게 아끼던 모든 것을 분토같이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아들의 자유에 동참했노라고 했다.

이 크리스찬 자유는 사랑에서 완성되는 자유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덧붙였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소. 그러나 그 자유를 육적인 욕정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 다 들어 있소. 그런데 그대들이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이니 조심하시오.”(갈 5:13~15) 이것은 개인 윤리가 사회 윤리로 발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사랑의 발전 형태다.

크리스찬이 사랑한다면서 사랑의 범위가 자기, 자기 가족, 자기 교회, 또는 자기 국경 등을 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굴 속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동굴은 ‘가스 챔버’로 되어 질식사를 가져올지 모른다. 사랑의 범위를 넓히자. 사랑의 바탕을 알차게 하자. 우리의 자유는 사랑의 범위와 정비례한다. 우리의 인간 바탕은 사랑의 내실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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