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1) 몬트리얼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에(1966년) - 몬트리얼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범용기 제2권] (131) 몬트리얼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에(1966년) - 몬트리얼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몬트리얼로 날았다.

밤에 도착했다. 어둠 속의 찬란한 진주의 바다는 은하수 가에 놀러온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같은 회의에 가는 사모아 섬 대표 한 사람을 만나 동무가 됐다.

회의 장소는 맥길 신학교 대강당이었고 숙소는 기숙사였다.

회의 중 출석에는 빠짐이 없었지만 발언한 적은 거의 없었다. 워낙 수줍기도 했지만, 토론내용을 잘 알아듣지도 못했고 영어로 연설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과토의에서는 ‘교회와 교직’ 분과에 속해 있었다. 거기에서는 뜨문뜨문 의견진술도 했다. 어느 날엔가 나는 좀 탈선이랄까 특이(特異)랄까한 내용의 짧은 에세이를 준비해 갖고 갔다.

“이 회의 참석 중 나는 시종 일종의 ‘이방인’적인 소외를 느꼈다. 그 책임이 내게 있는지 회의 자체의 성격에 있는지는 아직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서 다루는 교회와 사회, 신앙과 직제 등등의 과제와 토의 내용은 서구 부요사회, 즉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회와 서구적인 전통과 역사 속에서 수천년 성숙한 ‘교회’를 소재로 그 신앙과 직제를 현시대에 대응시키려는 논의가 거의 전부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부요사회 아닌, 빈곤사회인데다가 교회는 비기독교적 복수종교의 전통과 역사 속에서 자랐다. 나는 한 사건을 예시하겠다. 남대문 밖 한 신자는 소학교 교사로서 애기 다섯 가진 중년부부였다.
그들은 지성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온건한 시민이었다.
그런데 오랜 실직자로서 아무리 애써도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린 애기들이 길가에서 구두닦고 세 살백이는 단풍잎같은 앙증스런 손을 지나가는 손님들께 내민다. 견디다 못해 그 부부는 그 애기들과 함께 온 집이 자살해 버렸다. 이 경우에 목사가 와서 뭐라 하겠는가? 자살은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니 장례식을 치룰 수 없다고 할 것인가?
애기들까지 같이 죽일 권리가 어디 있느냐 하고 나무랄 것인가? 너희 사회가 부조리해서 그런 것이니 네 사회의 책임이다. 자기 사회 건사도 못하는 바보 족속이라고 스스로 경멸할 것인가?
그렇잖으면 신앙도 직제도 윤리도 따지기 전에 ‘인간’과 ‘인정’ 사랑의 격정으로 같이 울며, 몸으로 이 부조리한 현실에 도전하여 고난에 동참할 것인가? 나는 이런 절박한 현실에 몸으로 부딪치지 못하는 한, ‘대회’는 ‘공염불’이 아닐까 우려된다”고 했다.

후에 일본대표 ‘다께나까’ 씨와 리차드 쉘(?)인가 하는 젊은 친구, 그리고 스웨덴 대표 꺼스타프 씨 등이 일부러 찾아와 악수하며 동감과 협력을 다짐했다.

이 모임이 끝나던 날 저녁에 몬트리얼 병원에 근무하는 한인 의사와 그 가족 몇 분이 어느 의사님 댁에 모여 나를 환영하는 만찬을 차렸다. 나는 그들에게 비교적 자세한 본국소식을 전해 주었다.

대체로 언짢은 소식이었지만 모두들 한숨 지으면서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바로 일년 전 그날에 결혼했노라는 어느 의사님 댁에서는 결혼케익을 일년내 냉장고에 간직했다가 오늘사 피로(彼露)한다면서 그 첫 ‘피스’를 내게 주는 눈물겨운 감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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