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일 금요일

[1883] 출애굽

출애굽


나는 출애굽 인간입니다. 특별한 기사 이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내 생활은 평범하여 별스러운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에 생각하면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록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니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들었습니다.

우리 창골집 동네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는 물론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여기저기 한문서당이 있을 뿐입니다. 서당 훈장 중 제일 학자란 분은 선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가 질색이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사교 신자란 것입니다. 전도인이 오면 “나는 공맹지도 하는 사람이오.” 하시며 상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9세쯤 되는 나도 아버님과 동감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나는 웅기항 어느 기관에 취직했습니다. 웅기에는 청년회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미곡 무역상하는 김기련이란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용모도 준수하였지만 민족운동자로서도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 상점은 미곡 무역상들의 물산 객주 같기도 했습니다. 미곡상을 가장한 독립 운동가들이 그곳에 들러 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만주로, 훈춘으로, 연추로 갔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와도 연락이 잦았습니다. 이광수가 주관하는 상해에서 나오는 독립신문도 몰래 들어왔습니다. 재일교포들의 독립운동 기관지도 스며들었습니다. 일본말로 쓴 것이었습니다. 동북 만주에는 독립군이 편성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대한민국 정부도 수립되었습니다.

젊은 피라 치솟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기련 씨는 재산을 정리하고 일인무역상에게서 다액의 돈을 꾸어가지고 하얼빈 방면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소련 공산군이 이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조선 독립군과 조선 공산군을 토벌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 중앙 몽고 지방의 강제 노동소에 수용했다 합니다. 더러는 기차에 실린 채로 바이칼 호에 잠겨버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성재 이동휘 선생님도 북간도를 거쳐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이미 적군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적군과 조선 독립군과 합세하여 일군을 타도할 작전을 꿈꾼 것이었습니다. 출애굽임에는 틀림없으나 마구잡이 출애굽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스크 등지의 우리 독립군들은 토벌되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와의 어색한 합동이 성립되고 극동 독립정부는 해산했습니다.

이런 판국에 식구를 데리고 시베리아 출애굽을 시도한 것이 김기련 씨였습니다. 그는 들어가자 곧 독립군에 가담했습니다. 독립군과 합세하여 적군과 싸우기도 하고 적군과 합세하여 독립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념이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금성상회 그룹들 중에는 소련의 공산권이랄 수 있는 만주와 시베리아에 탈출한 출애굽 인사, 상해 임시정부를 향하여 탈출한 인사도 있었습니다. 나도 웅기에서 출애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에 돈 약 400원 저축한 것이 있었고, 아내는 원래부터 큰댁에 맡겨두었으니 크게 걱정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짜고짜 서울로 직행했습니다. 서울에는 백부님이 계시니 나의 상경이 그리 무모한 모험이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만일 내가 시베리아로 가서 조선 독립군 졸병이라도 되었더라면, 그리고 조선 공산당에나 가입했었더라면 내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몸이 오싹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습니다. 사랑의 섭리를 믿습니다. 바울의 증언과 같이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는 한 고장에 오래 있지 못합니다. 은퇴 전 나의 생활기록을 더듬어 보아도 대략 수긍이 될 것입니다. 외갓집에서 3년, 회령읍에서 3년, 웅기에서 3년, 서울서 3년, 신아산, 용현, 귀락 등에서 소학교 교사로 도합 3년, 일본 동경서 3년, 미국서 4년, 귀국 후 평양서 3년, 용정서 3년…… 이만 하면 일소부주(一所不住)의 행각승임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도 스스로 매임없는 방랑자로 자처합니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삼아 하는 말입니다.

1933년부터 생각하는 바가 있어 1939년에 상경, 1940년부터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에 봉사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시키심에 “아멘” 한 것뿐이고 내 자랑은 없습니다.

나는 일소부주의 방랑인입니다. 3년 혹은 4년밖에 한 고장에 있지 못합니다. 쫓겨난 것이 아니라 내가 나간 것입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더 큰 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들어가는 날부터 탈출을 찾습니다. 선견자에게는 앞을 못 보는 눈이 최대의 비극입니다. 공성신퇴(攻城身退)란 것도 재미있는 말입니다. 비전과 탈출은 한 몸의 눈과 발입니다. 나는 지금 86세의 출상에 누웠습니다. “움직이지 마라, 나가지 마라.”의 엄명 아래 있는 출애굽의 선견자입니다.

댓글 1개:

  1.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아브라함...
    비록 자유는 제한되어 있지만... 먹는 것은 보장되어 있는 애굽을 떠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는 것은...
    부담을 느끼게 합니다...

    떠나라 해서 떠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자신이 처한 역사의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갖고 신앙고백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상황에 충실했기 때문에...
    결국 출애굽의 인간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애굽은 떠났지만... 계속해서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돌아갈 용기도 내지 못하고...
    갈팡질팡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