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219]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3)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3)


생활신앙

나는 내 믿음을 “생활신앙”이라고 불러봤다. 그것을 정돈한 것이 “신학”이라면 그 신학은 “생활신학”이라고 불리울지 모른다. 요새 W.C.C의 방향도 그런 것인줄 짐작하지만, 나는 W.C.C가 생겨나기 전, 생긴 다음에도 W.C.C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를 동안에도 시종 이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내가 일제시대 1936년 가을, 평양에서 간도 용정에로 옮기자마자 동만노회와 용정주재 캐나다 선교부 연합사업으로 전도사 양성을 위한 동북성경학교가 개강되었는데 나도 강사로 초청되었다. 내게는 신약신학이 맡겨졌다. 장로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현직 전도사들이었다. 1940년 3월, 내가 서울서 지금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원”을 시작했을 때 그들 거의 전부가 서울에 와서 대개 제1회, 또는 2회 한신 졸업생으로 국내 또는 만주에서 목회했다. 이북에서 목회하던 분들은 거의 전부 6ㆍ25 때 순교했다고 들었다.

어쨌든, 그 성경학교 경건회 시간에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는 朝蘇民族(조선민족)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민족적 사명이 주어졌던 것같이 조선민족에게도 민족적 사명이 있을 것이다. 그 사명의 발견과 그 사명에의 자각이 그 민족의 “혼”이 된다. 우리 민족이 경제적으로 전 세계의 경제를 주름잡는 New York wallstreet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전 동양이라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겠는가? 지금 제 나라마저 잃어버린 우리 민족이 그럴 가망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처럼 종교적으로 전 세계에 공헌할 수 있겠는가? 그것만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진정 종교적이 되는 데에는 정치권력이나 경제세력이 필수 전제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가난 속에서 종교적인 진실과 능력이 생성 강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들은 몰라도, 기독교는 선교된지 70여년 밖에 되지 않지만, 조선인 부락치고 교회 없는 데는 거의 없을 만큼 속히 보급되었고 그것이 우리 민족생명과 우리 역사의 활력소가 되어 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우리는 더 자유하는 개신교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신교의 교회 구성체 안에 있어서도 위대한 신학자, 위대한 교회정치가, 고결한 성자, 세계적인 설교자 등등 봉사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교회와 70년 밖에 안되는 조선교회가 경합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돌아 우편 앞으로”의 기적이 아주 없달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가지 강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다. 고난 받는 우리 민족이므로 “수난의 종”이스라엘과 사명을 같이할 수 있으며 특히 고난 받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고난을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강대국의 부요사회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일 것이다. 그러나 5천년 수난의 역사를 이겨온 우리 민족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며, 하는 그날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에도 동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어디서나 천덕꾸러기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는 하느님 아들로서의 품격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내재적인 빛과 존엄이 모든 경멸과 천대를 성화할 것이다…….”

“우리를 일본인들이 Chosen-jin(朝蘇人)” 이라고 한다.

영어로 볼 때에는 Chosen People이 된다 하느님이 우리 고난의 민족을 선택하고 성별하여 그의 나라 백성으로 쓰신다면 “Chosen-Jin”이 “Chosen people”이 될 것이니 얼마나 영광이냐…” 등등.

선교사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신학적으로 정당화 펼 수 없을 뿐 아니라, 너희 말로 Chosun이지 어디 Chosen이냐고도 했다. 나도 어느 정도 궤변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디 고난의 “생활”에서 서로 그것을 대결해 보자. 어느 편 신앙에 감정이 있나?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일 수 없고, 고난 없이 크리스찬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생활”이요 “교리”가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뜻에서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아무도 그 생활의 영예로운 후광을 모독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해 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예언” 비슷한 것이었다. 그때에도 “생활신앙”이란 것이 내 마음 밑바닥에 층(層)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어쨌든, 일제말기에 있어서 나의 “은진” 교목 3년의 “삶”이 내 “자랑”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께 감사한다.

“생활”이란 것은 자유하는 주체로서의 능동적이고 사회적이고 상황적이면서 창조적인 경우에만 건설되고 약진한다. 피동적이고 상황에 적응하고 남을 모방만 하고 자기안전 제일주의에 농성하고 보수(保守)에만 급급하면 구차스러운 “생존”은 가능할지 몰라도 건설적인 “생활”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신앙과 생활관계에 있어서 “신앙생활”이란 용어까지도 “생활신앙”으로 바꿨다. 이런 태도는 야고보 2:14-19에 이미 지적된 것이며 사도 바울도 교리, 신조 등의 신인(信認)이 “신앙”의 전부 또는 그 핵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뿐이라(갈라디아 5:6)고 한 것이다.

이제 이 “생활신앙”을 좀 더 분석하며 풀이해 보기로 한다.

(1) 살아계신 그리스도

나의 “생활신앙”은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와 만나고 그를 따르는 생활기록이 나의 신앙 노정 (路程)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리스도 “이미지”는 어디서 발견하는가? 우선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 “이미지”를 왜곡시킨다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래서 (1) 직접 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 모습을 파악하려 한다.

복음 기자들의 예수 “이미지” 증언과 사도 바울의 “부활승천 후의 예수”와의 해후(Encounting)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그의 그리스도 내주 경험 등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모습을 비교적 근사(近似)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와를 구분하면서도 분리할 수는 없었다. 내 “신학”으로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때에 “그리스도교”가 탄생했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종교는 “예수교”라기 보다도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이 신학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인격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논쟁할 생각은 없었다. 말하자면 “예수”란 이름은 다른 사람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고유명사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어진 직함(Title)이란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2)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상

교회, 특히 그 당시의 한국교회가 예수의 “이미지”를 왜곡시켰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바울 당시의 “할례당” 전철(前輸)을 밟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근본주의 신학체계와 웨스트민스터 신조, 특히 제1조를 신자 심판의 척도로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그들의 교리ㆍ신조에 부합되는 한도 안에서만 그리스도일 수 있는 것같이 오만했던 것이다. 자신들은 그 교리를 시인한다는 것 때문에 “진리옹호자”며 “심판자” 임을 자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참회하는 세리가 아니라,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라새인이었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에는 그 때 그분들이 거의 다 가셨기 때문에 구태여 들출 필요도 느끼지 않지만, 역사는 바로 전승되야 하겠기 때문에 부언하는 것이다. 그것도 지유로운 연구와 토의에서 얻은 스스로의 결론이었다면 몰라도 초대 선교사들이 주입한 “요리문답”을 비판없이 삼키고 소화과정 없이 뱉는 것이었다는 데에 자모(自悔)의 부끄러움이 섞이는 것이었다. “그레삼 매첸”의 신학을 그대로 옮긴 박형룡 박사의 “신학난제”가 유일한 Sound Doctrine으로 추종되는 방식이었다.

“몸”으로 온 “하느님 아들” 예수를 살해한 것이 당시의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또는 교사라는 서기관, 그리고 교권자언 제사장이었던 것과 같아 한국 교회에서도 “정통교리”라는 율법체제 옹호자와 그것을 “학”으로 변증한다는 “정통신학교수”와 교권의 자리에 앉은 총회 임원진과 미국 선교사들이 비슷한 주역을 맡는 것이었다. 그들이 서로 스크램을 짜가지고 심판관으로 나서는 폼이 영락 없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의 연합전선이라고 나는 보았다.

그들 투쟁의 목표는 “복음의 율법화”였다 할까? 몰라서 그랬다면 용서받을 여유도 있을지 모르나(누가 23:14) 그렇기에는 너무 의도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살해자들이 사흘도 채 못 가서 그리스도 부활의 전령에 당황했듯이, 그리스도는 지금도 죽음에서 더 큰 생명을 창조한다. 그는 남들이 죽이니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죽음 속에 체념한 분이 아니었다. 그는 “몸”으로 다시 살아 인간들을 살게하는 생명의 주인으로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몸”이란 것과 영원한 생명이란 것과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이원론이 성서적 주류가 아니라는 점에서 영원한 생명도 “몸”을 가져야 한다. 그런 각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당연히 그래야 할 “몸”이었다. 그것이 “피와 살”의 붐이 아니고 “영의 몸”이었다 하더라도 “몸”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아이 때의 몸과 어른되었을 때의 몸이 다른 것과 같이, 혈과 육의 몸과 영으로 승화한 더 높은 차원의 몸과는 다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몸”이었으며 “그의” 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어서, 제자들이 그것을 신중하게 확인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범죄 이전의 순결한 인간으로서의 몸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과 근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죽음은 하느님을 반역한 “범죄”이후에 주어진 후천적인 “죄벌”이었고 당초부터 창조질서 자체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생물의 죽음은 자연질서에 속한 “신진대사”의 필연일 것이나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죽음은 “영의 질서”여서 인간이 주체적인 자유선택에 의한 결단과 그 책임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창세기 3장 참조)

그 “자유”가 하느님을 반역하는 범죄를 택했을 때, 인간은 영의 질서에서 자연질서에로 떨어졌다. 그래서 자연질서에서의 동불과 같이 “신진대사”의 죽음의 필연에 예속됐다. 원초적인 타락이랄까 “원죄”랄까. 그러나 그런 경우에서도 그 “자유” 만은 하나님도 강제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 일 수 없겠기 때문이다. 타락했어도 “타락한 인간”이요 짐승은 아니다. 어쨌든, 죽음이 범죄 때문에 왔다면 범죄 이전의 인간은 죽지 않을 것이었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한 축복 역시 범죄 이전의 원초적인 축복이었다면 이것이 죽음 없는 인간의 번식과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문제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의 파괴를 거치지 않고 “변화”하는 몸, “영체화”(永替化) 한 몸, 변화산 위에서의 예수의 몸, 부활 후에 예수의 몸, 그리고 종말에서의 신자의 몸(고린도전서 15:15) 등을 연상할 수 있다. 이런 몸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는, 그리고 생리적인 조건에서 자유하는 “영의 몸”인 것이다. 예수의 승천(昇天) 광경이 이에 따른다. 이것이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서 경륜하신, “하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원래의 인간상이며 그 “몸”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인간구원은 타락 후의 비극적인 인간 형상에서 원초의 인간상에로 인간을 회복시키는 일이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관문은 “죄악” 즉 “인간의 범죄와 범죄성 처리라는 관문”일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죄”가 처리되는 대로 죽음도 처리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된다. 그런데 죄 없다는 예수는 왜 죽었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죄와 그 죄벌을 속량하며 그들이 죄없는 인간으로 취급받게 하기 위한 속죄제물로 “몸”을 죽음에 바친 “죽음”이어서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인간애”의 극치였고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역설이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의 운명의 순간 “다 이루었다!”고 절규했다. 이것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 이후에는 “아버지”의 응답만이 남는다. “그렇다!” 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대답이 곧 예수의 “부활”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에서 만민구원의 성취,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와 죄벌에서 속량되고 하나님과 화목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하는 하느님의 자녀로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인간이 할 일은 이 속량의 은혜를 받아들이는(accept) 것뿐이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로 표시했다. “믿음”이란 것은 마음 문을 열고 하느님의 주신 것,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죽은, 또는 죽이는 율법과 의문(儀文)에 예속된 인간이 아니라, “탕자”였으나 감히 “아버지”집에로 돌아오는 자유하는 아들로서의 인간인 것이며, 율법과 의문이 인간족속들 손에 죽었으나 다시 살고 영원히 살아 죽음의 권세에서 인간을 살리고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그리스도, 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인간들이란 말이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취어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하다.(골로새 3: 3)

우리는 “몸”으로 부활하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도들이다.

나는 이 대목으로 끝내기 전에 1952년 7월에 “그리스도교 신앙내용의 규정문제”라는 제목 아래서 (1) 그리스도라는 한 장(章)을 여기에 재록하기로 한다.

“우리의 신앙 대상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시다.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옳게 전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느냐 한다. 그것도 일리 있는 딸이다. 우리는 물론 교리무용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주입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구성된 관념의 틀에 그리스도를 맞추어 그를 이해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보다도 자기 관념 안에 구성된 “초상화(化)”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되며 따라서 “우상적”인 것으로 되어진다. 그러나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심정으로 출발한 믿음은 주격과 주격이 만나는 인격적인 친교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직접 나를 만들어 주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내가 내 관념대로 그리스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만들어 내 안에 그리스도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믿게 된 것이며 그리스도가 승천하셔서 성신을 보내시므로 우리가 성신을 믿게 된 것이다. 역사 안에 들어온, 육신을 이룬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우리 역사 안에서 육신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지극히 높으신, 그리고 영이신 성부와 성신을 인격적으로 믿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 특권은 오직 그리스도 중심에서만 얻어지는 은혜인 것이다……”(전집 제1권 142-3면)

(3) 한국교회와 성서

교회도 “공동체”다. 공동체가 질서 있게 운영되려면, 그 안에서 “권위의 소재”가 분명해야 한다. “가톨릭”은 7억의 신도를 거느린 세계적인 조직체다. 그러나 일사불란(一社不亂)하게 운영된다. 요새 정권자들처럼 폭력과 사찰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군대도 경찰도 군함도 폭격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체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데는 무언가 경영학적인 비결이 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법왕”의 권위 때문이다.

볍왕은 땅 위에서 천국 열쇠를 쥐고 있는, 교회의 최고 권위로서 적어도 교회에 관한 한, 무오(無誤)라고 한다. 그는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 대리자란 권위 때문에 카톨릭 신도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법왕에게 순종한다.

개신교는 이런 제도와 교리에 항거하여 카톨릭과 싸웠다. 그러나 싸우는 동안, 어중이 떠중이 여기 저기서 난립(亂立)하여 난맥상(亂脈狀)을 노출시킨다. 무언가 최고 권위의 소재를 정립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카톨릭 같이 완벽한 조직체를 만들 수도 없고 만들 생각도 없으니 “법왕”같은 임금이 앉을 자리도 없고, 앉을 인물도 없고, 앉힐 생각도 없다. 그런데 개혁교도들에 대한 카톨릭의 반격은 치열, 가혹, 살벌했다. 이에 유효하게 응전하려면 무언가 법왕을 능가할 권위가 이쪽 편에 있어야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개혁운동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이때까지 법왕을 공격한 것은 법왕이 성경 말씀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데 법왕은 왜 그렇게 하느냐?” 하고. 그러니까, 성경의 권위가 법왕의 그것보다 높다는 말이 된다. 카톨릭에서 법왕 무오설을 내세운다면 개혁교에서는 성서 무오설을 내세우자. 그래서 종교개혁가들, 특히 루터는 성경부터 독일어로 번역했고 영국에서도 그랬고 제네바의 칼빈은 성경을 근거로 개혁교의 “대법전”이랄 수 있는 방대한 교리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다. (영어역으로는 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 - 말하자면 조직신학의 금자탑이다. 동시에 그는 “성서 주석”을 썼다. (묵시록은 3장까지 밖에 안 썼지만) 그의 저작에서 하느님, 인간, 그리스도, 교회, 구원, 종말 … 모든 것이 객관화했다. 그러나 그의 “Institute”은 당장에 “Institution”화해서 그 자체가 심판자의 권좌로 됐다.

그래서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 “젤베터스”를 가두는 “죄창살”이 되고 “사형장”이 됐다. 그(셀베터스)가 삼위일체설에서 칼빈의 신학체계와 다소 다르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렇게 성서가 폭군으로 변한다. “절대무오”라는 어새(御璽)와 “축자영감설”이라는 시위대가 그 궁궐을 방위한다.

이 “왕조”는 약 2세기 동안 집권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역사비판학자들의 침임으로 이 금단의 왕총은 무자비하게 파헤쳐졌다.

성서의 편성 과정과 기자(記者), 연대, 문학의 다양성, 내용의 불일치 등등 허다한 문제가 그 권위의 소재를 혼란하게 한다. 그리고 성서는 “책중의 책”이라지만 어쨌든 “책”임에는 틀림 없다. “책”은 물상(物相)이므로 직접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성서를 신화(神化)한다면 또 하나의 우상숭배 행위가 된다. “종이 법왕”은 “인간 법왕” 보다 훨씬 더 “우상적”이다.

그러면 성경의 성질과 역할은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에 “신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호한 유일한 법칙이다” 했다.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이 신조를 문자 그대로 채택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성경 문자무오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성경 자체를 파헤쳐보면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선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설화와 현대 지질학, 천문학의 정설(定說)과는 맞취낼 수가 없다. 그 중 어느 하나는 “무오”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자연 과학과의 대결이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직접 친필로 썼다고 믿고,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역사비판학은 수두룩하게 증거를 댄다. 여기서도 어느 하나만이 “무오”일 것이다. 여기서는 역사와 대결하게 된다.

“성서 문자무오설”이란 것은 자연과학이나 역사과학과 대결할 성질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장로교회는 이것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경이 “법칙”이다 하는 그 자체가 율법주의적이다.

“성경에는 틀린 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고 나는 심사위원들에게 답변했다. “그런 말이 어떻게 성립된단 말이오?” 하고 위원장은 어리둥절해한다.

“성경은 그 목적이 자연과학이나 역사과학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요한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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