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221]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4)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4)


그러니까 성경의 목적은 사람들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그것이란 말이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지질학, 역사학, 문화과학 등을 가르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에게 나아가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성경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한, 성경은 “무오”다. 시계의 목적은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데 있다. 시간만 정확하게 가리키면 그 시계는 틀린 시계가 아니다. 시계가 오늘의 천기를 예보하지 못한다고 그 시계의 “무오”를 부정한다면 될 말이냐? “안될 말은 당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하고 나는 반문한다. “틀렸으나 안틀렸다는 뜻이 여기 있소” 했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다. (예외는 물론 있었지만.)

이런 것은 세계 어느 나라 교회에서도 치룬 “홍역”이어서 우리는 “예방 주사”한 대로 넉넉히 “면역”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기어코 “극”을 달리고 말았다.

그 당시 내가 발표한 경고의 글 한토막 재록한다.

“우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얻는 것이요, 성경 믿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세례자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보라!” 한 것과 같다 … 하느님이 옛날에는 선지 성현들을 통하여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시대 시대마다 단편적으로 계시하셨지만 끝날에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인간이 되어, 역사 안에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구원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시고 그로 구원주가 되게 하셨다(히브리 1:1-4).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고 “성경의 주인”이시다. 성경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심판하려는 사이비적 경건은, 모세의 율법을 빙자하여 하느님 아들을 살해한 바리새인의 후예, “회칠한 무덤”이 아니겠는가?

성경이 그리스도 증언이란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 때문에 “무오”하다면 그건 그런 것으로 하고 “본분”에 대해 무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분”이란 말은 Practice, 일상생활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성경이 무슨 육법전서나 도덕 교과서나 무슨 성명서의 실천요항 같은 것인 줄 알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신앙”과 “실천”을 한 조항에 요약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신앙의 대강령)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실천의 대강령)” 하셨다. 신구약 성경이 이 한 귀절에 다 들어간다고 하셨다.

“이웃”이 누구냐?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이 다 내 이웃이다. “적”도 이웃이다. “적”이 이웃되기를 거부하더라도 너는 그를 이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한다. 이것은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밝히 드러난다.

그런데 “갈다귀는 걸러 먹고 약대는 통채로 삼키는” 것이 그 당시의 한국교회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한국교회와 복음

“복음”이란 말은 너무 흔해 빠져서 귀에 익숙하니 만큼 다 아는 척하면서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전적인 어원 살피기는 고만두기로 하고, 신약성서 기자가 의미한 “복음”의 뜻만을 찾아 본다면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세상이 구원 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고 사전(辭典)에 쓰여 있다.

세상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당시에도 설명이 단순치 않았다.

우선 예수님 자신의 경우부터 살피기로 하자.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란 말을 즐겨 쓰셨다.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서 얻은 재료를 순서대로 정리했노라”(누가 1:1-4)는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요한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악령과 대결하여 이기고 성령의 능력을 가득하게 받아 갈릴리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 선교의 첫 기록이 나사렛에서의 “선포”였다.

“주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였다.”
(공동번역 누가 4: 18-19)

여기서 보면, 인간에게 해방과 지유를 선포하는 것이 “기쁜 소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빈곤, 악정 신체고장, 압제, 무지 등등 비인간화 또는 인간성 위축의 조건들에서 인간을 해방한다는 것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지킴으로”라는 계율 질서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의 해”, 즉 값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은총의 질서”라고 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선포했을 뿐 아니라, 이 일을 위하여 죽었다. 인간 해방의 최후의 불가피적인 운명인 “죽음”과 그 죽음의 씨앗인 죄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그는 감행했다. 그리고 부활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인격, 사업, 삶과 죽음, 다시 삶 - 그의 전존재가 “복음”으로 됐다. 그는 “몸”으로 오신 산 복음이었다. 그는 “은총”의 해를 선포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은혜의 몸”이었다.

이 각도에서의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적어도 살려고 애쓰는 생활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 오신 예수를 본 일도 없고 알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의 영체를 보았고 동시에 제자로 부름받아 이방인의 사도가 됐다. 그러므로 그는 영의 질서에서 복음을 이해하려 했다. (고린도후서 5:16) 그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율법주의자였고 율법교사이기도 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다. 율법주의자의 의무는 “모든” 율법 조문을 “항상” “온전”히 지켜야 구원얻는다는 것이었다. 바울의 노력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조문을 기쓰고 지키다가도 그 중한 조문을 범하면 모든 공적이 통채로 무너진다. 가령 십계명만을 갖고 보더라도 열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범하면 다른 모든 조항을 지켰다 해도 그는 “파계자”로 된다.

그런데 “모든”조문을 “언제나” “온전”히 지켜낼 수는 없다. 율법을 범했으니 “죄인”이 된다. 죄인은 죽음의 운명 아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니 천하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죽음의 저주 아래 있다. 율법의 질서 아래서는 하느님 앞에서 “의”를 세울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화목될 수도 없다. 결국 율법은 인간을 죄인으로 정죄 (Condemn)는 할 수 있으나 구원은 못한다. 율법이란, 인간에게 죄를 알게는 하지만 그 죄에서 구원은 못한다. 죄의 값은 죽음이므로 율법은 인간을 향한 “사형 선고자” 밖에 되지 못한다. “아,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자 누구냐?”하고 그는 고민한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계율주의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모든 계율질서 위에 자유하는 은혜의 질서를 선포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포한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를 영접만하면 그가 맡아 구원해 주신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 공작을 진행시키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요 율법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니 얼마나 간단하냐? 이것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의 한국교회에서는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복음”을 교묘하게 “율법”으로 변질시켰다. 그레삼 메첸의 “What is faith”를 대본으로 하여 “믿음”이란 이름의 율법을 부각시켰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바울 시대의 “할례당이 할례를 받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던 것과 같은 계열이었다. 얼론 보면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원칙인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할례에 좌우된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의 한 종파, Liberal Judaism 정도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울은 이방인 상대의 선교자다. 율법은커녕, 구약성경 자체가 무언지도 모르고 유대인의 하느님 “야훼”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구원과는 관계없는 그런 무거운 짐을 지운다는 것은 바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치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복음”의 자유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한다.

그 당시의 한국교회는 “축자영감설”에 의한 “성서 문자무오설”을 절대적인 교리로 삼고 그것을 믿는 것이 곧 “복음적”이라고 주장했다. “제7일 안식일교에서는 제7일인 안식일 즉 토요일을 지키고, 성결법(레위기)을 그대로 지켜 부정한 음식도 먹지 않는다니 우리보다 훨씬 더 성경대로 잘 믿는 것이 아니냐”고 부러워하는 분도 있었다. 그는 율법과 복음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혼선을 일으킨 것이어서 바울 시대의 “할례당”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맘을 열어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의 재창조의 은총을 감사하며 사는 기쁨, 그것이 우리의 “복음”이며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한 예수 자신의 복음 선포도 그것을 예상한 선포였다.

바울은 율법주의자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부득이 “학”으로 “논”(論)을 폈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며 그의 안에서 영원한 삶에 동참하는 소식, 그것이 “복음”이었다.

번쇄한 율법에서 벗어나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에 감추어지는 기쁨, 사나 죽으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보람, 성령의 한없는 감동과 기쁨, 그리고 그 거룩한 삶의 열매-이런 것이 모두 “복음”이었다.

근일에 “복음적”(Evangelical)이라면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선교운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인”,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혼 구원”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 지은 죄 용서 받고, 다시 죄를 범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고, 성령의 감화로 교회 섬기는 일, 가정의 순결, 사회에서의 선한 일 등등을 하게 되고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신임을 얻어 직장의 높은 자리, 관청의 고관, 생활의 부요 사회에서의 명예 등등을 얻게 되고, 죽을 때에는 천당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선전 – 그러니 이런 축복이 어디 있느냐고 약장사와 말재주로 전도하는 것을 “복음적”인 설교라고 한다. 그래서 교인이 늘고 교회 예산이 늘고 전도에 열심하니 목사는 기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에 관련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고 자찬한다. 그들은 세속사회에 관여하지 않고 수도원속의 성자같이 교회 안에서 거룩하다고 자부한다. 전도는 망할 세상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뽑아내서 교회에 옮겼다가 죽을 때 천당 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래, 정교분리 (政敎分離)는 좋다. 그러나 집권여당에는 양같이 순종하면서 정의야당(?)은 정치 행위라는 구실로 “신성모독”같이 기피한다. “야”만이 정치고 “여”는 정치가 아닌 것 같이 생각한다. “여”에는 권력이 있고 “야”는 정의를 주장한다. 교회가 권력에 추종하면 부패하고 정의에 짝하면 소금과 빛이 된다. “정교분리”란 “권력”이 “정의”를 때리는 구실, 또는 정의가 권력을 도피하는 연막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많다. Evangelical이란 것도 이 사이비 신성(神聖)병에 걸려 자기도 모르게 마취제 구실을 하여 악의 권력에 가세한다. 특히 한국교회의 “복음적 교회주의”는 이 그물에 단단히 걸려 있다고 보겠다.

교회의 생성

어거스틴(354-430AD, 수세 387AD)은 “교회”를 그 당시의 보편왕국이던 로마제국과 결부시켜 그 구조와 법령(Canon Law)과 계급적 교권제도와 재판권까지 갖게 했다.

어거스틴보다 조금 먼저(295-375AD),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론으로 아리우스와 대결해서 이긴 것을 계기로 교리지상주의자가 되어 “누구든지 구원 얻고자 원하는 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카톨릭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 카톨릭 신앙을 의심 없이, 전부를 순수하게 믿고 지키는 자가 아니면 그는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니라” 했다. 여기서 “카톨릭 신앙”이란 것은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의 명령이요 신자 개인의 인격적 고백은 아니었다. 이것은 “신학 관리자”로서의 신조요 “신앙보육자”로서의 사랑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수한 성도의 피를 흘리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질서는 섰을지 모르나 자유와 평화는 파괴됐다.

루터는 교회를 “신자가 내적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본질로 생각했다고 릿츨은 말한다.

이제 우리는 좀더 근원적인 데를 직접 파 들어가 보자! 언제나 원초적인 것이 간단하고 생명적인 것이다.

1) 예수 자신은 세상에 계실 때에 그 당시의 교회인 “회당” 에서 쫓겨났으며, 그후 자기 나름의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직접 인간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가를치고 병 고치고 사귀를 내쫓고, 책망도 하고 했다. 그러다가 교권자와 정권자들이 조작한 “국가 반역죄”란 명패 아래서 걸형을 당했다. 제지들은 좌절과 낙망의 그늘 속에 숨고 – 옛 직업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엠마오 도상의 “스토리”가 모든 제자들의 실상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 바로 그분인 줄 알았었는데 그만……”(누가 24:21).

그런데 어찌하여 3, 4일 안에 그 제자들이 다시 용기를 얻었는가? 그것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 때문이었다. 여제자들이 먼저 봤다. 다른 제자들도 이엄이엄 보았다. 의심하던 도마도 보고서 “내 주, 내 하느님” 하고 절했다. 바울의 증언대로 본다면 “……다음에 오백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더러는 세상을 떠났으나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고, 그 다음에 야고보에게, 그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 그리고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해서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나타났다…”(고전 15:6-8)는 것이다.

이 살으신 예수가 “영의 몸”으로 다시 나타나 제자들을 찾고 가르치고 사귀고 약속하고 격려하고 영원한 생명의 소망를 일으키고 한 놀라운 경험 때문에 좌절됐던 제자들의 의식은 바로잡혔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들의 몸이 빗물 갇힌 웅덩일지는 몰라도 샘물 솟는 샘터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교회를 탄생시킬 수 있었는가?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해서 심정이 뜨거워지고 이성이 밝아지고 의지가 강철같고 영성이 앙양되어 하느님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불사조”(不死鳥)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겨났다.

예루살렘 교회의 생성

오순절 성령강렴과 베드로의 설교에서 하루에 몇 천 명씩 회개하고 그리스도 신자가 된다. 그들은 사량이 넘쳐서 서로 떠나 살고 싶지 않았다. 재산도 제 것이란 생각없이 서로 나눠쓴다. 한곳에 모여 주를 찬양하고 애찬을 나누곤 했다. 이렇게 매일 수 천 명을 먹인다는 것은 기술과 질서와 경영학적 지식을 요한다. 그래서 집사를 뽑아 그 일을 맡게 하고 사도들은 오직 선교에만 힘썼다. 따라서 교직제도가 생기고 일 장소가 문제되고 교회규칙이 제정되고 생활양식이 토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가 생성된 두가지 요인을 본다.

(1) 예수의 부활에서 제지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야 신앙이 “의식화” 했다.(2)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제자들의 신앙이 “행동화” 했다. 그래서 교회가 탄생했다.

부활도 성령강림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예수님 분부대로 기도하며 받기를 기다린 것 뿐이었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직접적인 행동이요 사건이었다.

세계 교회의 생성

주후 70년, 유대 독립운동을 뿌리채 뽑는다는 로마 정책에 따라 예루살렘은 온전히 빈터가 됐다. 2백만 유대인이 무조건 학살됐다. 그 중에는 많은 기독교인도 포함됐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망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멀리까지 나갔다. 이것은 예수님이 “재빠르게 도망하라”고 미리 분부하신 것(마태 24:15-19, 마가 13:14-23, 누가 21:20-24)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들은 도망하여 시리아의 안디옥에까지 퍼졌다.

이것은 마치 신나게 타오르는 불무더기를 두들기는 것과 같았다. 두들길수록 불은 튕겨나가 딴 데서 불을 붙인다. 그 숱한 불덩이가 유다 지방과 사마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에까지 펴져서 불붙는다. 교권자도 총독도 헤롯왕도 어쩔 수 없는 “불가사리”가 되어 결국에는 로마제국 판도 전반에 불씨를 심었다.

그래서 세계적인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세계적인 교회가 생성됐다.

그 주역은 바울이었다. 바울 밖에는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교에 정통한 율법학자로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율법 준수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는 벤야민 지파로서 유대민족으로서의 소속도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루살렘 원주민이 아니고 헬라문화의 도시인 “다소”에서 나서 자랐기에 헬라문화를 알고 헬라어에 능통한 지성인이었다. 동시에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 소유자여서 로마제국에도 통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 모든 것보다도 먼저 그는 사람됨이 범상치 않았다. 스케일이 크고, 관심이 넓고 지혜가 있고 총명하며 의를 위해 용감한 “지도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나이도 예수와 비슷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만일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있었더라면 그가 예수를 몰라볼 만큼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서 “무식” 할 뿐 아니라, “학”의 바탕이 없고 세계에 어둡고 특히 헬라문화나 로마문명에 조예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하고 순직하긴 해도 세계적인 지도자 노릇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율벌주의적 입장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예수 해석에 따라 예수 교도들과 맞섰던 그 최후결전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는 친히 “영의 몸”으로 나타나 그를 손수 불러 사도를 삼고 그에게 세계 선교의 사명을 맡긴 것이었다. 세계 선교에는 그가 유일한 적격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께서 열 두 사도를 임명했었는데 그 중에서 가룟 유다는 탈락했다. 열한 사람만 남아서 마치 “이 빠진” 것 같았다. 부활 승천하신 후, 성신 강림을 기다리는 제자들도 열한 사람만인 현실이 몹시 서운했다. 그래서 베드로의 제의로, 세례 요한 때부터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 중에서 제비 뽑아 “맛디아”로 유다의 자리를 보충했다. (사도행전 1:21-25) 그러나 이것은 너무 인위적이다. 아직 성령의 내주(內週)도 없을 때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제비”뽑아 결정한다는 것도 위험할 뿐 아니라, 일종의 “마술적”이어서 신학적인 보장을 받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선택을 예수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의 대신으로 “바울”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어쨌든, 바울은 승천하신 예수님께 직접 뽑혀 사도가 되어 세계 선교와 세계적인 교회 생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바울은 “염병 같은 놈”이라고 모두들 무서워했다. 간데마다 복음을 “전염”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가는 곳마다 이교(異敎)의 황무지를 뒤집고 거기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씨는 곧장 싹이 터 교회로 된다. 그 교회를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그리스도의 신부”라 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엠 1:23)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아들”이었던 것과 같이, 교회도 사람들의 공동체임과 동시에 하느님의 공동체라는 것을(Shrine of God, 1Cor.3: 16)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은 교회가 생명체임을 말한다. “산 몸”은 자란다. 자람에 따라 그 폼에 맞도록 의복도 입히고 집도 짓고 환경도 만들고 활동할 무대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조직체로나 생활양식으로나 고정적일 수가 없다. 그것은 신자들이 주님 섬기는 의미에서 창조적으로 슬기롭게 발굴해야 할 영역이다. 인간의 불완전과 범죄성 때문에 교회봉사에 오류도 있었고 고의적인 Deviation도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단히 갱신하여 성장한다. 거기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성령이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있지만 세상에서 난 것은 아니다.” 이것이 교회가 단순한 사회기관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The Church is in the world and for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하느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샘솟는 생명샘이 예루살렘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그 강가에 생명나무가 달마다 열매를 맺은 것이 예루살렘 교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생명샘이 세계를 흘러 여기저기 지류들을 모아 대하(大河)를 이룬 것이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 생명이요 그 강가의 생명나무들이 세계교회라 하겠다. (묵시 22:1-3)

교회의 성격

역사 안에서의 교회의 성격에 대하여는 이미 정돈된 설명이 있다. 그것은 (1) “una” 교회는 하나다 하는 교회의 통일성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지체는 여럿이라도 몸은 하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일진대 그 몸은 하나만일 것이다. 카톨릭도 동과 서로 갈라져 있고 신교는 약 3백으로 찢겨 있다. 교리적으로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각기 갈라져서 자기들 나름의 교회로 독립한다. 그래도 “교회”는 하나다. 교파와 종파는 많아도 교회는 하나다. 이것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W.C.C가 생긴 것이다. 갑자기 한 종파로 만든다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만은 하나니 각기 지체의식으로 한 “몸”에 일치된 소속감을 나누자는 것이다.

Stanly Jones는

“Agree to differ, but
Resolved to Love, and
unite to Serve.”

라는 표어를 내걸고 세계교회의 협동에 헌신했다.

(2) Sancta -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특정된 통치영역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요 그 안에 있는 인간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겨우 용서 받은 죄인들이다. 이 점에서는 법왕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의 거룩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속량사랑을 폼으로 증거하고 복음의 자유에 용감할 때에 그 성성(聖性)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3) Catholica - 세계적 보편적인 공회성(公會性)을 의미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형상이 회복된, 회복되어가는 새 사람들의 공동체다. 거기에는 헬라사람이나 유대사람이나, 할례받은 자나 안 받은 자나, 미개인이나 수구디아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의 구별이 없고, 오직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 계신 “공동체다”(골 3:10-11)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지방적, 국가적, 민족적 문화적 또는 계급적으로, 어떤 Caste 형태 안에서 정의(define)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무난할지 몰라도 교회적으로는 결코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세계가 “한 몸”으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한, 교회의 보편성도 거기에 어느 정도 제약되지 않을 수 없다. 형제 자매가 한 집에서 자랐지만 성인(成人)이 되면 제각기 분가해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로 “남”이나 “적”이 아니고 형제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그 본질로 삼는 것이다. “개체”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개체가 있다는 말과 근사하다.

예수님의 마감 기도에서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이것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려는 것이옵니다” 하셨다. (요한 17:21)

이 점에 있어서 카톨릭은 비교적 포팔적이다. “카톨릭”에도 분파가 많고 각 분파 간에 다른 점도 많지만, 그래도 성기게나마 법왕청 산하에서 “하나”라는 인연을 끊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개인의 신앙자유를 앞세우는 가운데서 분파가 더 쉽게 합리화되고 성기게나마 그 안에 포괄적 인연을 맺을 기구적인 “엄부랄라”가 없다. 그렇다고 모두 카톨릭에 환원할 수도 없고 카톨릭식의 기구를 만들 수도 없다. 그래서 W.C.C가 생겼고 나라마다 교파간의 협의체(N.C.C)가 생겨서 “공회성”을 어느 정도 보충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N.C.C는 또 하나의 “교권”이 아니라, 각 교파의 약한데(보편성)를 도와주는, 또는 도와주려는 좋은 “친구”로 대해 줘야 할 것이다.

(4) apostolica - 교회는 사도 전승적이다. 그리스도는 친히 열 두 사람을 골라 사도를 삼았다.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내보내어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가 3:13-19)

그들은 3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다녔다. 그리스도의 사시는 스타일을 본받고 그리스도에게 메시야적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생사를 같이하려 했다. 그들이 마감 순간에서 실패했지만, 탈락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탓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와 함께 신적인 권능이 넘쳐, 약했던 마음이 소원대로 강해졌다. 그래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겁 없이 증거했다.

1) 사도들이 그리스도부터 반은 최종의 분부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선교였으며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교육이며 그것을 지키게 하는 훈련이었다(마태 28:16-20).

사도들은 이 “선교”와 “교육”을 통하여 오고오는 세대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려 했다. 이것이 주류적인 사도 정통이다.

2) 이 신교와 교육과 훈련을 위해서 공동체인 교회가 생겼다. 외톨이 신자로서는 신앙을 유지발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앙공동체가 있어야 했고 그 다음부터는 그 공동체인 교회 안에 신자가 나서 자라는 것이 마치 아이들이 가정 안에 나서 자라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정이 대가족제도에서 소가족제도, 핵가족제도에로 변해가는 것과 같이 교회도 대교회주의에서 소교회, 핵교회주의에로 변천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무산대중이 역사의 주역을 맡는 때가 온다면 대교회주의는 소교회, 핵교회주의로 변경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쨌든 교회는 교회 자체 안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요, 선교(빛)와 봉사(소금)에 의한 역사변혁(누룩)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한 방편은 다양해야 할 것이다.

대가족제도랄 수 있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도전승”을 아주 좁은 의미에 집약시킨다. 마태복음 16:13-20에 있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신앙고백 기사 중에서 “너는 베드로다.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터인데 죽음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6, 18-19),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느님 아들이니이다” 하고 고백한 것 때문에 예수께서 크게 만족하셔서 “나도 네게 말한다” 하고 말씀하신 귀절이다.

카톨릭에서는 이 천국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초대 로마교회 감독(법왕)이었고, 그로부터 대를 이어 법왕이 그의 자리를 계승하는데, 천국열쇠도 그 직위상속과 함께 계승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전승”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 본문(Text) 는 마가와 누가에 다 기록돼 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쓰여졌다는 마가복음에도, 그리고 모든 자료를 충분히 상고하여 썼노라는 누가복음에도 “나도 네게 말한다…” 이하의 기사가 없다. 따라서 “교회”란 단어는 예수님 업에서는 한 번도 나온 일이 없는 것으로 된다. 부활하신 다음에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분부만 하셨고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은 없다.

그렇다면 우선 마태복음에만 있는 이 “본문”에 대한 신빙성이 희박해진다.

본문을 그대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카톨릭에서의 해석만이 정당하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질문 주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인격과 사업, 즉 그의 Messiaship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를 알고저 함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하는 것은 이 본 질문을 위한 유도질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마가 8:29) 또는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누가 9:20) 하는 것 뿐이요 그 이상 다른 기사가 붙어 있지 않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이들이십니다” 하고 그 아래에 교회와 천국열쇠에 얘기가 붙어 있다. 우선 베드로의 고백 자체가 간명한 데서 점차로 덧붙어진 수식이 늘어갔다는 것을 본다. 그것으로 기사의 선후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인간” 보다도 “바른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베드로”기 때문에 베드로가 교회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 교회의 기반을 논할 때에 먼저 거론된 것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신앙이었고 베드로는 그 신앙의 소유자란 의미에서 거론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베드로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교회의 기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 된다. 그리고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다른 사도들을 대표하여 말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이번에도 베드로 개인이라기보다도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대언한 것으로 본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예수”가 “그리스도”시라고 믿을 때에 “그리스도교”가 생겼고, 그 그리스도교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탄생시킨 것이 사실인데 이 본문에서는 그 사실이 예표된 것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천국열쇠”는 이런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들 공동체가 그 책임을 진다는 말이다.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고”는 역사의 운명은 권력주의 정치가나 맘몬주의 경제가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찬과 그 공동체인 교회에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교분리” 등등의 동굴 속에 도피하여 역사에 무관심 무책임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교회가 그 지역에서 몰려나고 자본주의 지역에서는 그들 시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역사의 Key-man으로서 Key를 포기하는 것이어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세상 나라가 하느님 나라로 되게 하기 위한 신도의 책임을 포기될 수 없다. 포기할수록 심판대 앞에서 더욱 준엄하게 그 책임이 추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선택과 자유 결단에 의하여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요한다. 우리가 그 주어진 시간 안에서 얼마나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유효 충실하게 하늘나라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운명이 결정된다. “하늘나라”란 것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땅위”를 의미한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고장이 하늘나라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하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늘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가운데”란 단어는 우리 “맘 속”일 수도 있고 우리 “사회 가운데”란 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서의 Keyman의 역할은 존엄하다. 역사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주역이다. 하느님은 처음과 나중을 보여주시고 바른 길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신 것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의 “주역”이긴 하지만 역사의 “주인”은 아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주역”을 제대로 연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드라마”가 완전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주역을 갈아세울 수도 있고 우리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에서 더 좋은 가치를 창조할 수도 있다. 가령, 한국의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는 것 때문에 자유와 정의를 위한 수난자가 생긴다. 그 수난의 영예 때문에 한국교회가 세계에 빛이 된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감사한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탄압자에게 영광이 분배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중에서도 놀라운 의미를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할 것뿐이다. 유다는 제 한 일 때문에 제 갈 길을 간 것이다.

하느님은 역사의 종말을 이미 설계하고 계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올 것이며 하늘나라는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코오스”를 위하여 자유를 박탈하고 불의하게 억지로 인간을 끌고 가지는 않으신다. 선택의 자유 없이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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