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1217]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2)

그리스도와 함께 50년 (2)


그러나 이제라도 여비만 있으면 일본에로 뛴다고 맘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지지가 않았다. 몰래 올라온 형님에게 붙잡혀 함경북도 경흥 옛집에 갔다. 거기서 3년을 제 나름대로의 교육과 전도에 봉사했다. 황무한 이방이었다. 그럭저럭 여비가 마련되자 일본 동경으로 갔다. 일학기는 건축 현장에서 일했다. 이학기에 아오야마(靑山學院) 신학부에 들어갔다. 거기 밖에 갈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신학공부가 시작됐다. 하느님이 억지로 밀어넣는 예정된 은총이라고 뒤늦게사 깨닫고 감사한다.

나의 신학 편력(遍歷)

-서 설-

“신학”이란 신앙의 이론일 것이므로 소위 신도라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이 있을 것이다. 신앙이 깊어지면 이론없이 즐겁다고도 한다. 그러니 반드시 “신학자”가 있어야 할 것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애에게 무슨 이론의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급변하는 역사의 현실에서 교회에 공동(空洞)이 생기는 경우에는 몰려드는 회오리 바람의 소용돌이가 “순진”을 삼켜버린다. 그래서 “무식한” “할머니”는 “말씀”을 억지로 풀이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를(벧후 3:16)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신학자”가 나설 밖에 없다. 그런데 신학자도 한 두 사람이 아니고 그들의 이론도 꼭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논쟁은 이성적인 비판을 전제로 한다. 이 경우에 비판 받기 싫어서 무비판의 권위주의에 농성한다면 그것은 신학의 타락일 뿐 아니라, “학”이랄 수도 없다.

“학”이란 것과 나

나는 일제시대에도 중고둥학교 교사로서 교목 비슷한 일을 6년이나 했고 1940년부터 1961년까지 약 22년 동안 지금의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니 평생 “교사”로서의 목사였다고 하겠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학”의 전당으로서의 체계화한 신학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나 자신은 “학”을 위한 “학”의 사람으로서 “학”을 했노라 자부해본 적이 없다. 허긴 미국서 신학 공부라고 할 때에는 요구 대로의 Paper니 Thesis니를 낼 수 밖에 없어서 부지런히 각주(脚註) 도 달았었지만, 그건 “억지 춘향’ 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춘향” 정도가 아니라, 연자매 끄는 당나귀랄까? 생각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쉴 새도 없이 재고장을 맴돌아야 했던 것이다. “학”을 할 환경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내 “생의 넝마”(전집 제5권 56면)란 단상(短想)은 그런 처지에서의 넋두리였다.

“학”으로서의 글은 아니었지만 “글”달라는 데는 많았다. 거절하기에는 내 맘이 너무 약했다. 거기에는 “마감 날짜”란 항목이 반드시 붙어 있었기 때문에 조급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 “붓”이 피곤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쓰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뜨거움이 내 뼛 속에 숱불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예레미야 20:9).

[1]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결

교회 관계에서 나는 모르는 체 잠잠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교회 역사를 네 시기로 나눠 봤다. (1) 1885-1935년 까지의 50년은 “선교사라는 보모(保母)밑에서 철없이 자란 어린이 시절이었고, (2) 1936-1945년의 10년 동안은 갑자기 “보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이해도 사랑도 없는 의붓 애비(일본군벌)에게 학대받던 시절이었고, (3) 1945-1960년은 의붓 애비는 쫓겨 갔지만, “항심”(恒心)없는 십대(teenager)로서 갑작스런 “자유”의 회오리 바람에 휘몰렸던 시절이고, (4) 1961 이후는 “나”를 되찾아 자기비판, 재정돈, 재건설의 걸음을 시도하던 시절이었다. (1964년 5월호 “기독교 사상지”에 발표)

나는 이 논문의 한국교회 비판에서 아래의 몇가지를 지적했다. (1) 신학적으로 정통주의 신학의 절대화 - 여기에는 초대 선교사들의 죄과가 없달 수 없다. (2) 내향적인 교회주의의 아성 - 이것은 개교회, 또는 자교파 이기주의에의 농성이었다. (3) 과도한 타계(他界)주의 –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것이 전도의 표어였다. 사회 참여는 없었고 때로는 “불신앙”으로 백안시 되었었다.

이런 신학 방향에서의 Exodus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1)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2) 선교사 주도 세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에 대한 나의 첫 선언이 1935년 “신학지남” 권두에 실린 “자각ㆍ정돈ㆍ건설” 이라는 제목의 정문일침 (頂門一針) 식의 단문海文)이었다. 거기서 “三寸”이란 것은 물론 “Uncle Sam”을 의미한다. (전집 제5권 페 16면에 수록) (3) 개방적이고, 자유롭고, 진취적이고, 한국적이면서 세계적(Ecumenical)인 신학 교육기관을 설치할 것 - 이것이 1940년에 창립된 지금의 한국신학대학이다. (4) “전적인 그리스도를 전적인 사회에”란 표어 아래서 교회의 사회화를 추진시킨다. 이것은 지금, 그리고 금후에도 수난과 영광을 함께 받으며 역사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그리고 계속 싸워야 할 한국교회 - 특히 “기장”의 항구한 행동 강령이다.

[2] 한국교회 개혁의 전선(前線)

나는 적어도 한국교회를 16세기 정통주의 신학의 화석(化石)으로 만드는데 동의하거나 침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비판적 신학불변론”에 대결하여 비판적이고 생동적인 새로운 신학 풍조를 일으키려 했다. “대전 전후 신학사조의 변천”, “축자 영감설과 성서 무오설에 대하여”, “성서 비판의 의의와 그 결과”, “전통의 복음적 이해”, “정통과 이단”, “이단재판의 성서적 근거”, “양심의 성서적 위치”, “안식일 문제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그리스도교 신앙내용의 규정 문제”, “그리스도 교회의 기본적 성격”, “신학의 갈길”, “정통과 이단” 등등 전집 제1권 “신학의 엑소더스”란 제목 아래 수록된 논문들은 이런 상황에서의 나의 “응전”기록이었다. 그 무렵 나의 신학사상에 대한 총회(분립이전)로서의 심사 작업은 그 핵심을 성서 문자 무오설에 둔 것이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조를 내 신앙에 대한 심사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것은 “은혜”의 질서인 생명적인 “생활신앙”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죽이는 의문(儀問)”이었다. 신조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조를 위해 있는 것 같은 사고방식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조심스런 반론을 폈다. 그러나 총회로서는 신학부재(不在)의 거수기로 “학”을 심판하고서 승리의 쾌감을 느끼는 비극을 연출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여) 80년 전 Robertson Smith를 정죄한 스카틀랜드 장로교 총회의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청이불문廳而不聞) 이었다. 미국 교회로서도 10년 전에 “메친” 사건을 지혜롭게 처리한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선교사 자신들이 “붙는 불에 키질”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교리주의자들은 교리 신조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생활의 윤리적 의무를 초월해도 좋다고 한다. 사회가 허용한다면 중세기의 “인퀴지션”도 불사(不辭) 한다는 태도였다. 나는 당초부터 이에 반발했다. 하느님 이외에 어느 누가 형제의 신앙양심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뺀다고 달려드는 것과 같지 않느냐고 했다(마태 7:1-6). 개혁교회는 개혁한 교회임과 동시에 계속 개혁에 가는 교회다. 이런 교회개혁의 욕구와 사명 때문에 그때 그때의 필요에 몰려 글을 발표하면 그 글이 “문제”가 되어 파문을 일으킨다. 그러면 그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 또 무언가를 써낸다. 파도는 쉴새없이 밀려오는데 내 “응전”(Response)의 글을 적기(適期)에 실어 줄 기관이나 지면이 부족하게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의 잡지를 내기로 맘먹었고 동지, 동인들도 생겨서 월간 “십자군”이 간행된 것이었다. Response는 다시 제2의 Challenge를 일으킨다. 이런 때, 내가 그 “흐름” 속에 딱 버티고 선다는 것은 결사적이다. 버티고 서 있으면 “흐름”자체가 내게 부딪혀 둘로 갈라진다. 갈라지는 것이 안됐다고 내가 섣불리 발을 들었다가는 나 자신이 딩굴어 속절없이 익사(溺死)할 것이었다. 기성 교권자들의 내게 대한 요구는 바로 그것이었다. 해방되자 미국 선교사들이 다시 왔는데 그때 미국 선교사 그룹 총무였던 Adams는 연지동 자기 사택에 푸짐한 만찬을 차리고 나와 김정준을 초청하였다. 식후에 그는 나에게 “사직”을 권한다. 나는 한신 이사회에 말해 보라고 대꾸했다. 그 다음 새문안 총회 때에는 나에게 일년간 도미 휴양을 권해왔다. 이번 것은 총회 결의였고 선교사는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미국 가는 것 자체를 거절할 생각은 없으나 그 동기와 그 시기가 문제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동기와 지금의 시기로서는 수락할 수 없다고 해 두었다. 그 후 10년 동안의 “한신”으로 부터의 “김재준” 제거 운동은 치열했다. 미국 선교사와 남하한 서북난란 목사들 대부분과 이남의 보수진영과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이에 항거 도전한다는 것은 신나기도 했지만 그리 쉬운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고정된 근본주의 신학총본영인 종전의 “평양신학교”를 해방된 남한에 이식하자는 운동에 집결됐다. 거기에는 허다한 비신학적 요소도 포함돼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정통이 밥통”이라던 만우(晩雨) 형의 풍자에는 언제든지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회 현실에서 논쟁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논문은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응하기 위한 논설이었고 높이 들린 “상아탑”에서의 투명한 관조는 아니었던 것이다. 논쟁기의 중간 토막이랄 수 있는 1950년 6ㆍ25 때에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열린 총회는 내 사건에 종지부(?)를 찍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원대로 됐단 말이다. 나라와 민족 자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전쟁마당 - 더군다나 패잔자로 밀리고 쫓겨 더 갈데 없는 반도의 홍문(訌門)에 까지 와 있는 처지에서도 정통주의자들의 교권보수열은 산불(山火)처럼 태우며 퍼졌다. 그들은 1953년 대구총회에서 결국 김재준 파직, 그 추종자 심사처단, 한신 인허 취소, 한신졸업생 불채용 등등을 의결했다. 말하자면 소원성취였다. 나는 담담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교회”라면! 하고 “교회”자체의 됨됨을 의심했다. “하느님 아들을 죽이면서 하느님 일을 했노라”고 자부하는 경건한 살인자인 교회 - 그것이 지금의 한국장로교 총회가 아닌가 싶었다.

감히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비 (對備) 시킬 수는 없어도 무언가 의인과 예언자의 고난에 접근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하겠다고 부지런히, 그러나 고요하게 입으로 붓으로 외쳤다. 이 일은 1932년 귀국 당초부터의 일이었지만, 1945년 해방과 함께 지표(地表)를 뚫고 솟았으며, 1950년대에는 급류(急流)로 달리다가 1953년 제 곳을 찾았다. 이제부터 흐를수록 대하(大河)가 되어 만경 곡식밭을 생명으로 축일 수 있을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런 교회 되어지이다고 종일 혼자 기원을 올리기도 했다.

교회생명의 근원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솟는다. 그것이 흘러 흘러 큰 하수가 된다(묵시 22:1). 때로 웅덩이에 갇혀 호수가 됐다가도 또 넘쳐 바다까지 흐른다.

교회는 흘러야 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교회가 “나는 완전하다”, “나는 더 개혁할 필요가 없다”, “정통교회의 정통신학이면 그만이 아니냐?” 하는 순간 익은 실과 같이 꼭지가 물러 땅에 떨어져 썩는다. 한국 교회는 지금 자족하여 성령을 심판함으로 자기를 정죄하려 한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 교권자들로부터 물려 받은 교회의 “원죄” 랄까!

어쨌든, 나는 이 고정(固定)과 안일과 도피의 조개껍질 속에 도사린 한국교회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갈라져도 너희가 갈라진 것이지 내가 가른 것은 아니다. 너희가 쫓아냈으니 우리가 쫓겨난 것뿐이다. 쫓겨났으니 쫓겨난 처지에서 새 터를 마련하고 새 살림을 꾸밀 밖에 없다. 저들이 “자살”을 원한다고 내가 제손으로 죽을 까닭은 없지 않겠나! “혁명”이다. 말이 너무 거세대서 “혁신” 이라고 바꾼 것 뿐이다. 혁명을 위한 전투였다. 지금도 한국의 “기장”은 끊임 없는 “개혁”의 기수로 앞장선다고 하겠다. 적어도 그런 사명 때문에 고민하며 고난받고 또 보람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지워진 짐의 무거움이다.

나는 이 “짐”의 무게 때문에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길 틈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짐이라는 생각 때문에 불평보다도 보람을 느끼곤 했다. 나는 원래가 민첩하게 잘 돌아가는 머리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붓을 들어도 미리부터 치밀하게 구상한 것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분명치 않으면서도 어쨌든 쓰기는 써야 했기에 자신 없는 대로 붓을 든다. 얼마 후에는 붓 끝에서 생각이 흐른다. 문학작품 같은, 순수한 “내”창작일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선가 남들이 한 말이요 이제 후에도 남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들이었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내 말로 되어 나왔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40년 후의 오늘에 다시 읽어 보노라면 어딘가 “선견자”의 전광(電光)이 섞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제사장 부류는 아니었다.

[3] 살아계신 주 그리스도만

-체계화에의 혐오-

나는 체제화 또는 체계화란 것을 싫어한다. 살아계신 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격으로서의 그 분은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그를 객관화 물상화한 개념으로서의 “신학체계” 같은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럴 능력도 없다면 없었을 것이지만 그럴 의욕도 없었다. “체계”, “구조”란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삽화를 적어 넣는다. 6ㆍ25 때 부산서 스캍 박사가 내게 한 얘기다. 독일의 일류 학자가 평생 걸려 자기로서의 물셀틈 없는 학문의 체계를 확립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이 닥쳐들어 그는 “서재”아닌, “감방”에 던져졌다. 독방의 알몸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천대 받고 아프고 영락 없는 연옥이나 지옥이었다. 그의 지금까지의 자랑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그의 평생 쌓아올린 완벽한 학문의 탑은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 뒤죽박죽의 잔해(殘骸)에 다시 손댈 용기도 능력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형이하”의 밑바닥의 밑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자랑하던 “학”의 “체계”는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 물론 본 회퍼 같은 예외도 있겠지만 이것이 보통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이에 대비해 본다면, 로마 병정 아닌 어느 누구도 “그는 참으로 하느님 아들이었다” 하고 저도 몰래 중얼 거렸을 것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예수님을 “學”으로 대하려는 것이 아닌, 살아계신 예수님 그대로를 모시고 싶었다.

[4] 체계에 관심 없이 쓴 글들

체계를 세워놓고 쓴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나는 요청되는 대로 글을 썼다. 발표된 글들은 어느 잡지, 신문 등등에 실렸다가 그것들의 “빽넘버”와 함께 어느 구석 먼지 속에 매몰된다. 그런 것을 내 71세(1971년) 때, 소위 “희년기념이라고 한국신학대학 교수님들이 가까스로 들춰내서 장중한 장정의 국판 다섯 권, 총 페이지 수 4,500면의 “전집”에 담아 주었다.

질그릇에 담긴 “하늘의 은혜”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중에는 진짜 “넝마”도 섞여 있다.

늙어 80을 바라보며 이국의 서글픔을 달랠까 싶어 언연을 따라 다시 읽어본다. 그 때 뭐라고 썼던가 싶어 망각의 유물을 더듬는다. “지금 하는 말이 그 때 한 말이요 다음에 할 말이 지금 하는 말이다. 해 아래 새것이 어디 있으랴” 싶어 무딘 붓을 멈춘다.

[5] 성긴 Unity 탐색

장공전집이란 것을 들춰보면 제목들이 무던히 잡다하다. 좋게 말해서 “다양”하달까? 그래도 이 다양한 것들을 한 줄에 꿰어 놓은 Unity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이 없다면 진짜 “잡다”(雜多)일 것이고 그 “전집”은 “퇴적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신학”(편의상 신“학”이라고 해 두자)의 선 자리와 테두리는 무엇인가? 그 핵심과 주변은 어떻게 그어지는가? 그 시점(時點)과 종점, 그리고 그 달리는 길, 그 지나가는 “과정”은 어떠했는가?

내 일이면서도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당초부터 “설계도”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면 그 테두리는 그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있어서는 “내”가 “학”에 살았다는 것보다도 “삶”에서 “학”이 강요됐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학”부터 말할 용기는 없다. 그래서 우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내 삶의 핵심으로 모시고 교회생활을 내원(內圓)으로, 사회생활을 외원(外圓)으로 해서 어떤 통전(統全)비슷한 것을 내 생활에서 발굴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내 걸어온 행로(行路) 그 시점(時點)과 종점을 이어놓은 한 줄기의 길, 그것이 일직선이 못되고 “지그재그”로 헤맨 발자국이라 하더라도 아주 딴 방향, 딴 길로 탈선 또는 탈락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금후, 이 세상 삶의 종착점까지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직도 “나그네”의 여정(旅程)을 이어간다. 이건 내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될 것도 아니었다.

내가 빈들에서 메아리 없는 외침에 목멜 때, 일부러 메아리가 돼 주신 분은 그리스도였다. 일제말기 - 먹을 것, 땔 것, 신발 모두가 “거지”상태였던 때, 내 식구 일곱에 갈 데 없이 하숙에서 쫓겨난 친척 애들까지 십여명 식솔을 데리고 기아선상을 걸을 때에도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서 든든했고 담담했다. “바보의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천국”인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힘차게 계신 곳이 “천국”이라고 믿기 때문에 금세니 내세니 하는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믿음”이란 것도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신뢰(Trust) 하고 그에게 귀의(歸依-불교 용어지만)하는 삶의 태도,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서 맘 문을 열어 그가 맘대로 드나들며 나를 다시 창조해 주실 기회를 제공하는 삶의 태도, 그것이 곧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신학보다도 심정이 앞선다.

내가 빈들에 외톨이로 던져진 듯 외로울 때, 저절로 불러지는 찬송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말 찬송의 494장이다.

한국말로 번역한다면

[1]
내 가는 길 언제 어떻게
되올런지는 알길 없사오나
주는 주님 뜻을 이루시오리,
(후렴) 주시는 주님 길
걸으오리다.
오직 그 길만.

[2]
한마음 단단히 흔들릴소냐
사람은 갈리고 세상은 옮겨도

[3]
거치른 바다도 헤쳐주시고
모래 벌판에도 만나를 내리셔
주는 주님 뜻을 이루시오리

또 하나 답답할 때 저절로 불러지는 찬송이 있다. 그것은 Cardianl Newman의 Lead Kindly Light이다. 이것은 한국 찬송가에도 수록되었다. (331장)

...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언도하소서”

가 맘에 들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음의 과정(過程)에서 생긴 일, 당한 일, 되어진 일 등등은 꽤 설렌 물결이었으나 그 기록은 “범용기”(凡庸記) 라는 내 자서록 비슷한 잡필에 적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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